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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폴 메이슨의 는 자본주의 타파를 주장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중앙 집중적인 계획 경제를 무조건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메이슨은 정보와 지식 경제가 작금의 자유 시장을 무너뜨릴 거라고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일련의 네트워크 활동은 자유 시장의 원리와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흔히 자유 시장은 인간이 더 많은 보상을 받을 때만 혁신을 달성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자 네트워크에는 그런 설명에 반박하는 사례들이 많고 많습니다. 가령, 비디오 게임의 모드는 어떨까요. 수많은 프로그래머들이 모드를 만듭니다. 모드 프로그래머들은 게임의 기본적인 사항을 변경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거대한 확장팩까지 만듭니다. 심지어 게임 자체를 통째로 뜯어 고칩니다. 물론 모드 프로그램을..
[게임 의 한 장면. 사라진 공룡들 역시 자연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바뀝니다.] 대부분 SF 소설들은 미래의 첨단 문명과 깊은 연관을 맺습니다. 사람들은 SF 소설을 이야기할 때, 공중 비행 자동차,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 거대한 발전소와 막대한 동력원, 어마어마한 도시, 각종 첨단 장비들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하지만 모든 SF 소설이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몇몇 소설들은 오히려 인류가 너무 발전에만 매달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 , , 등은 지나친 발전과 개발을 경고합니다. 가끔 이런 유토피아 소설들은 너무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나 는 퇴행적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물론 인류는 이렇게 과거로 퇴행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인류가 산업 발전과 경제 개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
강철 군화가 그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는 있다. 물론, 우리가 이것을 증명할 수 없다. 우리의 판단은 추론에 근거할 뿐이다. 정부의 첩보부 요원들은 사회주의 의원들이 테러 작전을 준비했고, 그 작전을 실행에 옮길 날을 결정했다고 보고했다. 그 날이 바로 폭탄이 터진 날이었다. 그 때문에 의사당에 군대가 미리 집결했다. 우리는 그 폭탄을 전혀 몰랐는데, 폭탄은 실제 터졌고, 당국은 그 폭발을 사전에 대비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강철 군화는 미리 알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 나아가, 우리는 강철 군화가 그런 폭행을 저질렀으며, 그들이 그런 폭행을 계획하고 범한 것은 그 죄를 우리의 어깨에 떠넘겨 우리의 파멸을 부를 목적에서였다고 고발한다. 우리로서는 그 폭탄을 누가 어떻게 던졌는지 아무도 몰..
사람들은 서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은 이야기하는 동물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일상 속에서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물론 사람만 아니라 수많은 생명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지만, 사람들은 창조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즐깁니다. 덕분에 소설가라는 업종까지 생겼죠. 심지어 소설가들은 아주 환상적인 이야기까지 짓습니다. 사무엘 콜리지는 이걸 가리켜 불신의 유예라고 불렀고요. 그런데 수많은 시, 소설, 희곡, 대본 등을 보면, 그건 대부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야기의 주제나 소재가 전부 인간 중심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줄창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만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이 사람과 만나고, 사람이 사람과 싸웠고,..
배미주의 는 사이버펑크 소설입니다. 여느 사이버펑크 소설처럼 의 주인공들은 다른 대상에 접속하죠. 그 대상은 야생 동물들입니다. 사람들은 야생 동물들에 접속하고, 동물들의 삶과 자연 생태계를 생생하게 만끽합니다. 결국 이런 접속은 자연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고요. 저는 이 소설을 읽고, 일종의 가상 동물원을 떠올렸습니다. 가상 현실 기술을 이용해 사파리를 만들고, 관람객들은 그 가상의 사파리를 체험합니다. 이런 가상 동물원은 크게 두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동물들을 착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동물원은 감옥입니다. 동물들이 갇힌 감옥이죠. 동물들은 비좁은 우리 안에서 평생 지내야 하고, 그 때문에 종종 병에 걸리거나 정신병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 하..
[이런 데이노니쿠스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중세 판타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검마 판타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저는 가끔 그런 경우를 봤습니다. 가령, 마이클 크라이튼은 을 쓸 때, 벨로시랩터를 주연으로 등장시켰습니다. 이 소설에서 벨로시랩터는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만큼 인상적인 활약을 펼칩니다. 아니, 사실 티-렉스보다 벨로시랩터가 더욱 무섭게 나오는 듯합니다. 은 영화로도 나왔고, 이 영화는 선풍적인 공룡 열기를 일으켰습니다. 덕분에 벨로시랩터는 티-렉스와 함께 육식공룡 세계의 인기 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알로사우루스처럼 전통적인 육식공룡 스타는 벨로시랩터에게 확실히 밀려난 듯합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육식공룡이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사람들은 알로사우루스보다 벨..
[만약 이게 생체 잠수함이라면, 이건 생태계 변화, 생물 다양성, 생체 개조와 쉽게 이어질 수 있겠죠.] SF 소설은 흔히 '발상의 문학'이라고 불립니다. 파격적인 발상이 SF 소설의 밑거름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유명한 SF 소설들은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발판으로 삼습니다. 뻔하고 뻔한 발상으로도 재미있는 SF 소설을 쓸 수 있으나, 위대한 사이언스 픽션은 혁신적인 설정을 대동하곤 합니다. 심지어 문학적인 완성도가 미흡해도 설정이 파격적이라면 그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의 본질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앤디 위어의 같은 소설은 뭐 엄청난 문학성 때문에 인기를 끌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지만, 그 속에 녹아있는 엄중하고 기발한 과학 실험 덕분에 하드 SF 소설의 대..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은 시간 여행물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은 타임 슬립 능력이 있고 20세기에서 19세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능력이 주인공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도때도 없이 발동이 된다는 점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하필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는 장소가 미국 남부 농장이라는 점이고요. 아, 더욱 큰 문제는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점이죠. 난데없이 과거로 추락한 흑인 주인공은 19세기 미국 남부 농장에서 지옥 같은 현실과 맞닥뜨립니다. 자신이 미래에서 온 자유인이라고 주장해봤자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좋든 싫든 주인공은 흑인 노예로서, 노예들의 가혹한 삶을 일상처럼 바라보면서 농장에서 죽도록 일해야 합니다. 채찍질이나 고문이나 폭행, 신체 절단, 강간 등은 예사이고, ..
여러 SF 장르 중에서 현실과 가장 가까운 하위 장르는 환경 아포칼립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생물 다양성 감소, 기후 변화, 미세 먼지, 핵 폐기물 등등. 환경 아포칼립스는 더 이상 SF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가렛 앳우드는 자기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다 운운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커트 보네거트와 비슷한 이유인지 모르죠.) 어쨌든 같은 소설은 정말 사이언스 픽션의 경지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그냥 또 다른 현실처럼 보입니다. 지금 이 현실에는 합성 동물도 없고, 인류 멸망도 없고, 생체 개조 매춘부도 없으나, 솔직히 에서 상상력만큼이나 현실의 파탄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더 이상 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생물 다양성이 이만큼 감..
유토피아 소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풍요롭고 평등한 세상을 노래하고, 다른 하나는 비참하고 폭력적인 지옥을 보여줍니다. 흔히 디스토피아가 유토피아의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야말로 유토피아의 극단일지 모릅니다.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가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나니까요. 물론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문명의 끝을 이야기할 뿐이고, 그 자체는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작품에 따라 긍정적인 멸망도 많습니다. 이나 은 분명히 대규모 멸망을 이야기하지만, 그리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건하고 신비롭죠. 반면, 디스토피아는 예외 없이 부정적입니다. 애초에 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