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포스트 자본주의>와 <붉은 별> 본문
폴 메이슨의 <포스트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타파를 주장하는 책입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중앙 집중적인 계획 경제를 무조건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메이슨은 정보와 지식 경제가 작금의 자유 시장을 무너뜨릴 거라고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일련의 네트워크 활동은 자유 시장의 원리와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흔히 자유 시장은 인간이 더 많은 보상을 받을 때만 혁신을 달성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자 네트워크에는 그런 설명에 반박하는 사례들이 많고 많습니다.
가령, 비디오 게임의 모드는 어떨까요. 수많은 프로그래머들이 모드를 만듭니다. 모드 프로그래머들은 게임의 기본적인 사항을 변경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거대한 확장팩까지 만듭니다. 심지어 게임 자체를 통째로 뜯어 고칩니다. 물론 모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때때로 프로그래머 혼자 아주 방대한 세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이런 대규모 모드들이 전부 공짜라는 점입니다. 아니, 사실은 공짜가 아니죠. 단지 그것이 전통적인 금액으로 환산이 되지 않을 뿐입니다. 한때 유통 업체 스팀(밸브)는 모드 유료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오히려 모드 프로그래머들은 유료화에 반대했습니다. 이런 지식/정보 제품은 공유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모드 프로그램은 포스트 자본주의의 사례로 어울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드 프로그램은 정보화 시대 이후의 사례이고, 따라서 저는 포스트 자본주의의 사례로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게 적당한 사례가 아니라면, 위키피디아 사이트 등을 거론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위키피디아는 공유 경제의 대표 주자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이트의 성장에 주목했습니다. 이런 정보/지식 제품의 장점은 복사 비용이 지극히 저렴하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해적판이 유행하고, 그건 지적 재산권을 침범하지만, 반대로 긍정적인 부분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폴 메이슨은 이런 지식 제품의 저렴한 가격 덕분에 노동 시간이 엄청나게 단축될 거라고 예상합니다. 임금 노동자는 줄어들 테고, 기존의 자본주의 구조는 무너집니다. 어떻게 본다면, 4차 산업 혁명과 기본 소득 논의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포스트 자본주의>가 4차 산업 혁명의 담론과 고스란히 똑같지 않습니다. 차이점이 많으나, 그걸 일일이 거론하기 좀 그렇군요. 그것보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의 <붉은 별>입니다. 폴 메이슨은 <붉은 별>의 사회주의 체계를 일종의 나침반으로 삼았습니다.
물론 <붉은 별>에는 지식/정보화 제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붉은 별>은 풍부한 생산량과 중앙 집중적인 계획 경제,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이루는 노동자 이동 등이 중요하게 나옵니다. 사실 이 책이 19세기 후반부의 유산임을 고려한다면, 보그다노프는 정보화 제품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19세기 SF 작가가 인터넷이나 전세계 통신망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SF 작가들은 온갖 상상력을 발휘했으나, 저는 19세기의 과학적 상상력이 인터넷을 묘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런 소설이 있을 수 있으나, 그렇다면 왜 그런 소설이 유명해지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폴 메이슨은 네트워크의 힘을 이용한다면, 인류가 <붉은 별>의 사회주의 체계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저는 폴 메이슨이 <붉은 별>을 인용하는 대목을 보고 좀 신기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경제학 서적에서 SF 소설을 인용하다니…. 물론 이런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여러 서적들은 미래 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종종 SF 소설에 의지합니다. 하지만 <포스트 자본주의>는 그저 단순히 <붉은 별>을 인용하지 않았고, 보그다노프의 사상 자체를 높게 평가합니다.
아마 이건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가 그저 SF 소설가가 아니라 진짜 혁명가였기 때문일 겁니다.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 당원이었고, 러시아 혁명에 참가했고, 레닌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보그다노프는 그저 사회주의 국가를 머릿속에서만 굴리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미래의 사회주의 전망은 SF 소설과도 연관이 깊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모든 미래 전망은 사이언스 픽션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가 수많은 위기를 양산하는 이 시점에서 보그다노프 같은 작가는 더욱 빛을 발하는 듯합니다. (책 속의 지적처럼 이상 기후 변화는 자유 시장에서 절대 해결이 될 리 만무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