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소설 <킨>, 윤리와 도덕이라는 관념 본문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킨>은 시간 여행물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은 타임 슬립 능력이 있고 20세기에서 19세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능력이 주인공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도때도 없이 발동이 된다는 점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하필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는 장소가 미국 남부 농장이라는 점이고요. 아, 더욱 큰 문제는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점이죠. 난데없이 과거로 추락한 흑인 주인공은 19세기 미국 남부 농장에서 지옥 같은 현실과 맞닥뜨립니다.
자신이 미래에서 온 자유인이라고 주장해봤자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좋든 싫든 주인공은 흑인 노예로서, 노예들의 가혹한 삶을 일상처럼 바라보면서 농장에서 죽도록 일해야 합니다. 채찍질이나 고문이나 폭행, 신체 절단, 강간 등은 예사이고, 노예들은 한낱 물건처럼 취급을 받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19세기 백인들을 끔찍한 악마나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19세기 백인들은 그 시대에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귀를 자르고 함부로 팔아먹고 구속하는 이유는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흑인들이 재산이기 때문에, 개인의 사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백인들은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폭력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정신 질환자도 아닙니다. 백인들은 아주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흑인들을 두들겨 팹니다. 왜냐하면 19세기 미국 농장에서 흑인은 노예이고, 그런 사실이 사회적인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백인들이 흑인의 귀를 자르는 이유는 그 백인들이 굉장히 사악하거나 천성이 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게 당연하기 때문에, 그게 19세기 미국 남부 사회에서 아주 당연하게 통용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백인들 중 누군가는 정말 성질이 나쁠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정말 심보가 악마 같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성향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성향이 악하든 착하든, 백인들은 사회적인 상식과 합리를 따를 뿐입니다. 개인의 심성보다 사회 구조와 체계가 문제라는 뜻이죠. 만약 19세기 미국 남부가 노예를 철폐하는 사회였다면, 그들은 그런 상식을 따랐을 테니까요.
하지만 소설 <킨>의 주인공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미 깨달았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희망을 품었을지 모르죠. 주인공은 19세기 농장의 어느 백인 소년에게 일말의 희망을 품습니다. 자신이 이 소년을 잘 타이른다면, 소년이 '착한 백인'으로 자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이 소년은 전형적인 백인 농장 주인으로 자랍니다. 소년은 흑인들을 노예로 바라보는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당연히 그 사회의 상식과 통념을 따릅니다.
만약 이 소년이 흑인을 인간으로 대접하는 남자로 자랐다면, 오히려 사회적인 눈초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겠죠. 상식과 통념을 깼으니까요. 소설 주인공은 이런 현실을 접하고 씁쓸하게 후회합니다. 자신이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고 후회했죠. 문제는 이 백인 소년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노예로 살아가는 동안 노예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노예 생활을 너무 오랫동안 지속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노예 신세에 익숙해집니다.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사회적인 압박이 개인의 성향을 짓누릅니다.
사실 한 개인이 사회적인 통념, 거대하고 지배적인 상식에 반하기 어려울 겁니다. 어떤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싶다면, 그 사회의 통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구성원들이나 기득권들이 불이익을 줄 테고, 심지어 그 사회에서 쫓아낼지 모릅니다. 종종 지배적인 상식에 반기를 드는 별종들도 있으나, 그런 별종들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사회가 개인보다 거대하다는 점입니다. 사회는 거대합니다. 한 개인이 그 전모를 알 수 없을 만큼 사회는 거대합니다. 개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보다 사회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마련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생물이 자연 환경에 적응하듯 개인은 사회 환경에 적응합니다. 눈밭에서 살아가는 토끼는 하얀 것처럼 개인은 사회 환경을 온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개인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 체계와 구조를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개인은 사회 안에 속했기 때문에 그 사회 밖에서 바라볼 수 없고, 사회의 온갖 지배적인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합니다. 간혹 부조리와 모순에 부딪힐 수 있으나, 그걸 피상적으로 느낄 뿐이고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잘못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미 그 사회의 체계를 당연하다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부조리마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걸 바꾸지 않습니다.
소설 <킨>에 등장하는 백인들은 모두 이런 사람들입니다. 19세기 백인들은 흑인 노예를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사회적인 통념과 체계, 구조가 이 백인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당연히 누구 하나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릅니다. 눈 앞에서 아주 끔찍한 폭력이 벌어지고, 심지어 그 자신이 폭력을 행하지만, 그래도 그게 잘못임을 절대 깨닫지 못합니다. 이 백인 주인들은 종종 선행마저 베풉니다. 네, 이 백인들의 뱃속에는 악마가 살지 않습니다. 이들도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냥 별 생각없이 하루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노예를 부려야 하고, 그게 그 시대의 상식이고, 그래서 흑인들의 귀를 자를 뿐입니다. 주인공을 구속하는 백인 주인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았으나,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백인들 중에서도 몇몇 사람들은 교회에 나갈 겁니다. 흑인 목사(!)도 등장하거든요. 그 백인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착하게 살겠다고 기도했겠죠. 그리고 기도가 끝난 후, 집에 돌아가면 또 다시 흑인들을 두들겨 패겠죠. 교회에서 죄를 고백하는 백인과 흑인을 죽도록 두들겨 패는 백인. 이 두 가지는 전혀 상반되는 모습이 아닙니다. 도망치는 노예 흑인을 두들겨 패는 건 사회적으로 죄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런 소설을 보면, 도대체 상식이 무엇인지 묻게 됩니다. 상식, 통념, 정의, 선, 윤리…. 흑인 노예의 등가죽이 찢어지도록 채찍을 휘두른 백인 주인도 상식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백인의 윤리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21세기 자유인이 본다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지만, 19세기 미국 남부에서 그런 윤리는 너무 당연했습니다. 21세기와 19세기의 윤리가 그저 다를 뿐이죠. 훌륭한 SF 소설들이 그렇듯 소설 <킨>은 이런 파격적인 개념을 보여줍니다. 좋은 SF 소설들은 주류적이고 지배적인 통념을 뛰어넘는 법이죠.
<킨>은 뻔한 인간애와 진부한 윤리와 통속적인 도덕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대신 19세기 백인 주인들의 윤리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윤리, 도덕, 정의 따위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죠. 이런 도덕이나 정의는 결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정의가 옹호하는 대상들도 시대에 따라 변했습니다. 원주민은 인간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또한 흑인도 인간 취급을 못 받았고, 여자도 인간 취급을 못 받았고, 노동자도 인간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과거의 정의와 윤리, 도덕은 원주민, 흑인, 여자, 노동자 등을 결코 옹호하거나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21세기의 정의와 윤리 또한 변할지 모릅니다. 23세기의 윤리는 21세기의 윤리와 다를지 모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21세기의 정의와 윤리가 제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윤리, 정의, 도덕에 매달리는 것이 굉장히 관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상관없는 관념일 뿐입니다.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생생한 현실을 똑바로 바라봐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 현실은 무엇일까요. 저는 고통에 허덕이는 생명들이 존재한다면, 그게 바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주민들이 착취를 당한다면, 흑인들이 채찍질을 당한다면, 여자들이 강간을 당한다면, 노동자들이 기계처럼 죽도록 일한다면, 그게 바로 현실이고 부조리입니다. 게다가 이런 시각을 꼭 원주민과 흑인과 여자와 노동자로 국한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통을 느끼는 생명이 존재한다면, 그 생명이 무엇이든 부조리는 거기에 있습니다. 동성애인부터 야생 동물들까지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누린다면, 우리는 그 생명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생존할 수 있도록 싸워야 할 겁니다.
소설 <킨>의 흑인 주인공은 백인 소년에게 계속 착하게 살라고 타이릅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네, 좋은 말이죠. 누구나 그렇게 말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착함이 무엇일까요. 그 착함의 기준이나 내용이 무엇일까요. 백인 소년은 흑인에게 온갖 끔찍한 짓을 대놓고 저질렀으나, 경찰에게 잡혀가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겠죠. 흑인은 인간이 아니고, 흑인은 그 사회에서 '착함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죠. 착하게 살라는 말은 그저 관념일 뿐입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관념일 뿐이죠.
물론 저는 착하게 살자는 원론적인 정의마저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들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설교가 결국 모호하고 추상적인 토대에 기반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런 추상적인 정의나 윤리보다 생생하게 실존하는 고통과 폭력을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동물의 가죽을 산 채로 벗긴다면, 우리가 어떤 정의나 윤리를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 동물은 엄청난 고통을 느낄 겁니다. 그게 바로 착취이고 부조리이고 모순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그런 것들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