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존 발리의 <잔상>과 그 외 본문
<잔상>은 11번째 불새 걸작선이고, 존 발리의 소설 모음집입니다. <분지 속에서>, <노래하라, 춤추라>, <기억 은행에서의 초과 인출>, <잔상>의 4개 소설이 실렸습니다. 불새 출판사가 내놓은 존 발리의 또 다른 소설들, <캔자스의 유령>이나 <역행하는 여름>, <공습>처럼 이 모음집에도 생체 개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분지 속에서>, <노래하라, 춤추라>, <기억 은행에서의 초과 인출>은 모두 생체 개조 이야기입니다.
<분지 속에서>의 주인공은 생체 개조를 잘못 했기 때문에 곤경에 처하죠. 인류는 외계 행성들에 개척지를 세웠고, 소설의 배경은 금성입니다. 모종의 사정 때문에 주인공은 금성에 들립니다. 문제는 주인공이 금성에 들리기 전에 인공 안구를 구입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건 사기이자 바가지였고, 주인공은 낯선 개척지에서 앞이 안 보이는 곤경에 처합니다. 게다가 이 개척지는 워낙 초라하고 작기 때문에 변변한 병원이 없습니다. 심지어 의사마저 없습니다. 유일무이한 의술 전문가는 어린 소녀이고, 이 소녀는 아주 당돌하고 톡톡 튑니다.
당연히 주인공은 이 소녀에게 모든 걸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연은 수술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요. 좋든 싫든, 주인공은 이 소녀와 계속 마주치고 끝내 금성의 드넓고 적막한 사막을 함께 여행합니다. 사실 소설의 주연은 이 두 명이고, 그 중에서 소녀의 활달하고 개성적인 성격이 사건을 이끌어갑니다. 소녀의 매력이 소설의 매력을 절반쯤 차지하는 것 같군요. 소설의 분위기가 사건이나 설정보다 등장인물의 분위기에 크게 기대는 것 같아요. 이 소녀는 그야말로 유쾌함과 상쾌함과 통쾌함을 보여주는 인물이고, 그저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인물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정이 약하다거나 줄거리가 시시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 소녀의 성향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두드러진다는 뜻입니다. 금성의 적막하고 기이한 풍경 묘사는 인상적이고, 사정 없이 신체를 개조하는 설정 또한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군요. 하지만 신체 개조는 양념이고 주된 요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역행하는 여름>처럼 뭔가 충격적인 전개를 기대했지만, 작가는 그보다 소녀의 매력과 금성의 사막 풍경과 오묘한 유혹을 강조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소설은 인간들 사이의 심리 묘사나 분위기를 직접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저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슬쩍 제시할 뿐이죠. 그렇게 독자는 주인공을 따라 소녀의 매력에 빠져들고, 그때부터 이야기는 신나게 굴러갑니다. <노래하라, 춤추라> 역시 커플(?)의 이야기입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인간과 공생체의 커플입니다. 주인공은 평범한 행성이 아니라 행성 궤도에서 살아가고, 덕분에 홀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공생체와 함께 살아가죠. 지성적인 식물처럼 보이는 미생물이라고 할까요. 작중 묘사는 그렇더군요.
이 미생물은 호흡부터 감각 조절까지 모든 것을 담당하고, 주인공이 행성 궤도에서 쾌적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게다가 지능까지 겸비했기 때문에 주인공과 공생체는 유쾌한 만담까지 주고 받습니다. 공생체가 신경계를 관리하기 때문에 주인공과 공생체는 엄청난 속도로 대화할 수 있죠. 생각 그 자체가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공생체는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기 때문에 사실 주인공은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차라리 인간-공생체 조합이라고 불려야 할 겁니다.
음, 저는 이 공생체가 마치 살아있는 강화복처럼 보였습니다. 살아있는 강화복은 SF 창작물에서 가끔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스타십 트루퍼스> 이후 수많은 SF 창작물들은 기계 강화복을 지겹게 우렸지만, 가끔 그 중에 생체 강화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듄의 아이들>은 생체 강화복의 아주 좋은 사례입니다. 너무 초인 액션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레토 2세와 모래송어들의 결합은 정말 놀라운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런 생체 강화복은 말 그대로 생체이기 때문에 아예 착용자와 결합합니다.
따라서 생체 강화복이 사라지면, 착용자는 죽거나 큰 고통에 휩싸이죠. 이런 생체 강화복과 착용(결합)하면, 인간은 인간성을 버려야 합니다. <노래하라, 춤추라>의 주인공-공생체가 인간일까요. 아니, 절대 인간으로 불릴 수 없을 겁니다. 주인공은 인간성을 간직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지만, 아주 사소한 동작에서 불편함을 느끼곤 합니다. 주인공이 그저 행성 궤도에 살거나 행성 문화를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생물 종의 경계가 가로막기 때문이겠죠. 이 소설은 예술을 통해 그런 종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소설 제목처럼 <노래하라, 춤추라>는 예술을 통해 과학적 상상력을 펼치는 소설입니다. 과학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방법은 많고, 그 중 하나가 예술이죠. 예술은 뭔가 창조적인 작업이고, 예술가는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인 형태(글, 그림, 춤, 노래, 기타 등등)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면, 주인공은 뭔가 다른 방법으로 예술적 감성을 표현하겠죠. 그 과정에서 얼마나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가 다른지 드러날 겁니다. 혹은 어떻게 이질적인 환경이 주류적인 환경과 다른지 드러날 겁니다.
예를 들어, 배명훈은 예술가가 인공 거주지에서 춤을 추는 소설을 썼습니다. 중력이 다르기 때문에 예술가의 춤 역시 굉장히 우아합니다. 낸시 크래스 역시 발레리나와 생체 개조를 조합했고요. 아이작 아시모프는 소설을 쓰는 로봇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추리 소설이 너무 대중적이기 때문에 예술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문학은 분명히 예술이죠. 고급 갤러리만이 예술의 영역은 아닙니다. <노래하라, 춤추라>는 이런 소설들과 상통합니다.
<기억 은행에서의 초과 인출>은 생체 개조보다 사이버펑크에 가깝습니다. <분지 속에서>와 <노래하라>가 완전히 바이오펑크라면, <기억 은행>은 제목의 어감처럼 사이버펑크입니다. 여타 사이버펑크가 그렇듯 이 소설은 바이오펑크 요소를 포함하지만, 주된 소재는 가상 현실입니다. 주인공은 가상 현실 속에 갇히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무진장 고생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주인공이 가상 현실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 자신이 원한다면 가상 현실을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의 여자를 이용해 하렘을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주인공이 무모한 짓을 저질러도 결국 그건 허상에 불과합니다. 가상 현실 속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그저 상징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주인공이 임의로 만든 상징일 뿐입니다. 주인공은 그저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헤매지 않고, 끝내 자신의 인생까지 뒤돌아봅니다. 가상 현실은 주인공이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매개체입니다. 아, 하지만 홀로 고군분투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가상 현실에만 빠지지 않도록 도우미가 도와주거든요. 결국 이것도 커플 소설이죠. 주인공과 도우미의 커플. 어째 이 소설 모음집에는 커플이나 인생의 동반자가 자주 등장하나 봅니다.
<잔상>은 소설 모음집의 제목으로 쓰였으나, 나머지 세 소설과 확연히 다릅니다. 일종의 유토피아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생체 개조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은 경제적 디스토피아에 빠졌고, 엄청난 경제 대공황이 사람들을 집어삼킵니다. 사람들은 실의에 차고 대안을 모색합니다. 이런 대안들은 공동체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세상 곳곳에 각종 공동체들이 생깁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공동체들이 수두룩하게 생깁니다.
각 공동체들은 서로 다른 이상을 추구합니다. 누군가는 종교를 외치고, 누군가는 섹스를 외치고, 누군가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외칩니다. 이런 공동체들이 무슨 결과를 향해 달려갈지 불 보듯 뻔합니다. 주인공은 떠돌이고, 수많은 공동체들을 거쳤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농아들의 공동체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사회입니다. 주인공은 이 공동체를 켈러라고 부릅니다. 주인공은 여기에서 어떤 소녀를 만나고 커플을 이루지만, 이 둘은 그저 둘만의 사랑을 나누지 않습니다.
장애인들이 구성원이기 때문에 이 켈러 공동체는 여느 공동체와 전혀 다르게 흘러갑니다. 도대체 어떻게 앞을 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인공은 켈러에 머물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여러 고정 관념을 버려야 했습니다. 장애인들은 자신들만의 사회를 이룰 수 있도록 가상의 사회 체계를 만들었고, 주인공은 그 사회 체계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버립니다. 고정 관념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온갖 유기체적인 접촉과 만남, 소통, 감정, 사랑,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네,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바로 저런 접촉과 소통과 만남과 사랑과 교환입니다. 개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구성원들은 다른 구성원들을 절실히 원합니다. 여기에는 개인라는 개념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구성원들은 사회 그 자체입니다. 마을은 하나의 유기체이고, 개인은 자신의 벽을 허물고 그 유기체에 통합되어야 합니다. 개인주의적인 사람은 이런 사회 체계가 너무 전체주의적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개인을 억압하거나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이들은 살기 위해 통합했고, 그런 통합은 모두를 평등하게 대합니다.
켈러에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도자는 켈러 공동체에 계급이 존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 지도자는 켈러가 공산주의 공동체가 되기 바랐습니다. 물론 카를 마르크스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주의는 아닙니다.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유기체적인 공산주의? 위계적인 질서가 없고, 모두가 평등하고, 개인이 아니라 사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런 공동체입니다. 어쩌면 독자들은 이게 그저 SF 소설 속의 사고 실험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켈러 공동체의 함의가 현실 사회에 적용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개인을 강조하지만, 사실 개인은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개인들은 거대한 사회 체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누구도 사회를 벗어나고 오래 생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외딴 산 속에서 사는 사람도 사실 인류 문명에서 그리 벗어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류는 사회적 동물이고, 그래서 사회 체계는 개인만큼 중요합니다. 사회 체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으나, 절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이 우리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사회 체계 역시 막강한 영향을 미치죠. 우리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체계를 바라봐야 합니다.
<잔상>은 나머지 소설들과 많이 다르지만, 제일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왜 불새 출판사가 <잔상>을 표지 제목을 골랐는지 이해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다른 작품들도 재미있습니다. <노래하라, 춤추라>의 공생체는 정말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바이오펑크를 좋아하는 독자는 이 소설을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겠죠. <분지 속에서>는 그렇게 파격적이지 않으나, 분위기가 정말 유쾌합니다. 솔직히 제일 신나게 읽었습니다. <기억 은행에서의 초과 인출>은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인 사이버펑크고요. 어느 소설도 버릴 수 없는 모음집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