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광기의 산맥>과 비경 탐험의 관계 본문
[보드 게임 <광기의 산맥>의 표지 그림은 비경 탐험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 것 같습니다.]
소설 <광기의 산맥>은 우주적 공포 소설입니다. 인류 이전에 각종 외계인들이 지구에 정착했고, 인류는 그들의 피조물에 불과하고, 그들은 언젠가 인류를 날려버릴지 모릅니다. 이 무한하고 영원불멸한 우주에서 인류는 그저 한 순간의 먼지에 지나지 않아요. 이런 감수성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여러 소설들을 관통하고, <광기의 산맥>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광기의 산맥>은 비경 탐험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남극 탐사대 소속이고, 탐사대는 극지방에서 외계인의 유골을 발굴하거나 고산 지대에서 외계 유적지를 찾습니다. <광기의 산맥>은 남극 탐사대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주인공은 외계인의 광대한 도시와 유적지를 방황합니다. 마치 <아서 고든 핌>처럼. 그래서 쇼거스는 "테켈리 리!"라고 외치겠죠. 사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비단 <광기의 산맥>만 아니라 다른 단편이나 중편 소설들에서도 탐사대나 탐험가를 집어넣곤 했습니다. 비경 탐험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요소들 중 하나일 겁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 속에서 주인공들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로 떠납니다. 그런 장소는 열대 밀림이 될 수 있고 고산 지대가 될 수 있습니다. 혹은 환상적인 꿈나라가 될 수 있고, 깊고 깊은 바닷속이 될 수 있습니다. 머나먼 무인도나 외딴 시골 역시 소설의 무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주인공이 항상 탐험가는 아닙니다. 주인공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오지로 흘러가곤 합니다. 어떤 이는 모험을 찾아 고산 지대에서 악귀들과 싸웁니다. 누군가는 해군 소속이고 잠수함이 침몰했기 때문에 해저 도시를 방문합니다.
또 누군가는 기이한 능력으로 꿈나라의 환상적인 지리를 탐색합니다. 바다에서 표류하는 도중 선원들은 무인도에 들리고 거기에서 괴수나 외계인들과 만납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항상 적막하고 음산한 오지만 좋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러브크래프트는 저런 비경이나 오지만큼 북적거리는 대도시도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비경과 오지는 낯선 외계인이나 괴수를 숨기기 좋고, 그래서 러브크래프트는 비경 탐험을 곧잘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외계인의 장대한 유적이나 거대한 괴수는 북적거리는 대도시에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것들은 금방 눈에 뜨일 겁니다. 때때로 흐느적거리는 괴물들은 도시의 뒷골목이나 폐가나 지하실에 도사릴 수 있지만, 러브크래프트는 그저 작은 괴물 따위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러브크래프트는 가상의 이질적인 문화를 보여주기 원했고, 그래서 드넓은 도시와 웅장한 건축물과 각종 유적이나 예술품, 종족들의 흥망을 설정했습니다. 특히 이 양반은 뒤틀리게 기하학적이고 웅장하고 거대한 건축물에 집착합니다.
소설 속에서 수많은 종족들이 서로 싸우거나 사라지거나 퇴행합니다. 작가가 이런 설정을 보여주기 원한다면, 거대 구조물이나 유적이 숨을 수 있도록 소설 배경을 비경이나 오지로 삼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장소들을 찾아가야 할 겁니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는 소설 주인공들을 다양한 수난에 빠뜨립니다. 그 와중에 소설 주인공들은 낯설고 적막한 비경에 당도하고, 거기에서 차마 형용할 수 없이 까마득한 장대함과 마주칩니다. 운이 좋은 주인공들은 도망치지만, 대부분 미치거나 괴물들에게 잡아먹히죠. 이런 탐험의 결말은 비참한 광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주적 공포와 상관없이 이따금 러브크래프트는 환상적인 여정 그 자체에 매력을 느낀 것 같습니다. <광기의 산맥>이 우주적 공포와 비경 탐험의 조합이라면, <미지의 카다스를 향한 몽환의 추적>은 우주적 공포에서 몇 걸음 물러났습니다. <미지의 카다스>에도 외계인들이 나오고 인류의 앞길을 가로막으나, 주인공 랜돌프 카터는 여타 소설 속 주인공들과 다르게 미치거나 괴물에게 잡아먹하지 않습니다. 사실 <미지의 카다스>는 우주적 공포 소설이 아니라 약간 기이한 환상 소설에 가깝습니다.
랜돌프 카터는 뭔가 이상향을 찾아 탐험을 떠나고 외계인들이나 반신과 만나지만, 그 탐험의 결말은 비참한 광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실버 키>나 <실버 키의 관문을 지나> 역시 우주적 공포와 광기의 비경 탐험보다 환상적인 여정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주인공이 탐험을 떠나고 온갖 외계인들과 마주치고 이질적인 문화를 둘러본다고 해서 무조건 이런 소설들을 <광기의 산맥>과 비슷한 유형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죠.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상상력이 가장 빛을 발하는 작품들은 기이하고 적막한 비경 탐험이 아닌가 합니다.
SF 소설 속에서 비경은 열대 밀림이나 고산 지대나 사막이나 심해나 외계 행성을 가리킵니다.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주인공들은 저런 곳에서 차마 목격할 수 없는 것들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경'은 항상 열대 밀림이나 고산 지대나 심해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설 <벽 속의 쥐>는 <광기의 산맥>과 달리 전형적인 비경 탐험 소설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저택을 관리하기 원할 뿐이었고 탐험을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택에 머무는 도중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고 저택 지하로 내려가기 위해 원정대를 조직합니다. 원정대는 저택 지하에서 광대한 동굴을 발견하고, 이후 <벽 속의 쥐>는 <광기의 산맥>처럼 비경 탐험의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아, 그리고 보면, 러브크래프트는 어둡고 적막한 동굴을 괴물들의 은거지로 잘 써먹었군요. 게다가 이런 지하 세계는 대도시 아래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구태여 주인공을 열대 밀림이나 고산 지대로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픽맨의 모델> 같은 소설은 전형적인 비경 탐험 소설이 아니지만, 픽맨이 끔찍한 지하 세계를 탐험했음을 암시합니다.
<찰스 덱스터 워드의 사례> 역시 탐험의 기운을 풍깁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열대 밀림이나 사막이나 심해가 아닙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저택의 지하실로 탐험을 떠납니다. 음, 이건 사이언스 픽션의 비경 탐험보다 검마 판타지의 던전 탐험에 더 가깝군요. 만약 던전 탐험을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찰스 덱스터 워드의 사례>는 아주 좋은 선택이 될 겁니다. 러브크래프트는 폐가나 폐허를 묘사하기 좋아했고, 이런 음산한 지하실을 구성하기 위해 꽤나 공을 들였습니다. 음산한 지하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풍기기 때문에 러브크래프트는 그런 감성을 자기 소설에 녹이려고 애썼죠.
이 양반은 공간적 설정에 아주 고심하는 작가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지하실보다 열대 밀림이나 고산 지대나 심해가 러브크래프트에게 훨씬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터무니없이 웅장하고 방대한 상상력이 이런 지하 공간에서 좀처럼 펼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외계인의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나 대도시 유적은 지하 공간보다 무인도나 해저, 사막에서 그 규모를 자랑하기 쉽겠죠. 그렇다고 해서 <찰스 덱스터 워드의 사례>가 <광기의 산맥>보다 떨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둘 다 좋은 소설이지만, <광기의 산맥>이 보다 러브크래프트답다는 뜻입니다.
사실 비경 탐험과 기이한 문명의 조합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러브크래프트 이전에 여러 작가들이 비경 탐험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 주인공들은 다양한 장소로 탐험을 떠났고, 일부는 차원을 넘거나 시간을 거스르거나 외계 행성에 진출했습니다. 비록 그런 소설들은 우주적 공포를 읊조리지 않지만, 우주적 공포만큼 기이하고 낯설고 암울한 세계를 묘사했습니다. SF 작가들의 상상력은 그저 '문명 세계'에만 머물지 않았고, 장소와 시간을 뛰어넘곤 했습니다. 그 결과 SF 소설은 우주적 공포에 필적하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가령, 허버트 웰즈의 작풍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와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타임 머신>이나 <모로 박사의 섬>에서 주인공은 '문명 세계'를 떠나고 낯설고 적막한 세계에 도착합니다. 주인공들은 거기에서 끝도 없는 암울함에 빠지거나 잔인하고 추악한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물론 러브크래프트가 허버트 웰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SF 소설들은 오래 전부터 탐험과 낯선 문명과 절망을 혼합하곤 했지만, 러브크래프트가 거기에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러브크래프트는 어느 정도 그런 흐름에 심취했을지 모릅니다. (장르 소설의 흐름에 심취한 것은 분명합니다.) SF 비경 탐험 소설들과 러브크래프트와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살피면 좋겠지만, 제가 그만한 지식이 없군요.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다른 SF 소설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일련의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은 SF 비경 탐험 소설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광기의 산맥>은 러브크래프트 소설 중에서도 SF 비경 탐험의 분위기를 가장 강하게 풍깁니다. 흔히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러브크래프트의 최대 야심작이라고 평가합니다. 만약 그런 평론이 옳다면,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의 최대 야심작을 SF 비경 탐험 소설로 썼다는 뜻입니다.
물론 러브크래프트는 사이언스 픽션을 그리 크게 의식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양반은 소설을 쓸 때 공포를 강조하기 위해 장르를 최대한 활용했으나, 사이언스 픽션이니 무슨 하위 장르니 하는 것들에 별반 관심이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류는 탐험의 장소를 넓혔고, 러브크래프트 역시 그런 탐험의 로망을 우주적 공포와 결합하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과학의 발달이나 기술의 발달은 이런 방식으로 창작가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들이야말로 기술 발달과 상상력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지만, 그런 관계는 때때로 <광기의 산맥> 같은 결과물을 낳을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