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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잔상> - 유기체적인 공산주의 공동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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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상> - 유기체적인 공산주의 공동체

OneTiger 2017. 6. 10. 20:00

존 발리의 <잔상>은 독특한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유토피아 구성원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소설 속에서 전세계는 경제적인 디스토피아에 빠집니다. 실업률이 치솟고, 불황이 사람들을 덮치고, 모두 빈곤과 비탄과 절망에 빠집니다. 공동체 운동은 이럴 때 힘을 얻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 다양한 공동체들이 번성합니다. 각 공동체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고, 자신만의 이상을 추구합니다. 누군가는 신에게 매달리고, 누군가는 난교를 벌이고, 누군가는 산업 문명을 거부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그런 공동체들을 떠도는 나그네입니다. 실업과 불황은 주인공을 사회에서 쫓아냈고 주인공은 마음을 붙일 곳을 찾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돕니다. 주인공은 어떤 공동체들이 번성하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독자는 그야말로 별별 공동체들이 우후죽순 탄생했음을 추측할 수 있어요. 그러던 중 주인공은 (자신이 켈러라고 부르는) 어떤 공동체에 도착합니다. 여기는 꽤나 희한한 곳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켈러에서 대부분 마을 구성원들은 장애인들입니다.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으나, 그런 사람들조차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여기가 일반적인 사회였다면, '정상인'을 기준으로 굴러갔을 겁니다. '정상인'이 기준이고, 장애인은 그 정상인의 곁가지에 불과했겠죠. 그게 일반적인 사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켈러는 다릅니다. 초기 설립자들은 장애인들이었고, 그래서 여기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없습니다.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도 장애인들의 규칙을 따릅니다. 이렇게 켈러 마을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체계를 이뤘습니다.


이 마을에서 평등은 그저 계급이나 신분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서 평등이라는 개념은 그저 규범이나 법칙에 그치지 않습니다. 켈러 주민들은 앞을 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켈러 주민들은 생존하기 위해 사회적인 규범이나 법칙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평등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런 움직임은 마을 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단단하게 구성합니다. 켈러 마을에 개인이라는 관념은 꽤나 희미한 듯합니다. 개인은 마을이고, 마을은 개인입니다.



종종 이렇게 평등한 공동체는 전체주의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현실 속에서 수많은 철학들은 자유와 개인을 외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런 집단 정체성을 부정하곤 합니다. 하지만 전체를 강조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개인을 부정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라는 개념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대부분 켈러 주민들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들은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이웃 역시 장애인입니다. 그 이웃은 다른 이웃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이웃도 장애인이죠. 이렇듯 켈러 주민들은 서로가 서로를 원하기 때문에 사슬처럼 유기체럼 결속했습니다. 따로 떨어져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결속이 깨진다면 그건 종말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저 결속을 다지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만약 누군가가 집중적인 권력을 차지하고 그 권력을 자신만을 위해 휘두른다면? 기나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평등을 외치는 동시에 자신만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런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죠.



다행히 켈러 마을은 그런 독재와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고 해서 켈러 주민들이 전부 박애 정신과 인간애로 단단히 무장했기 때문은 아닌 듯합니다. 그보다 태생적인 이유가 큰 것 같습니다. 켈러 설립자들은 전부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누가 더 우위를 차지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보통 사람들이 이런 평등한 공동체를 구성하려고 시도했다면, 누군가가 집중적인 권력을 차지하고 독재적으로 굴었을지 모릅니다. 사실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구성원들은 통치자, 지도자, 관리들이 정말 평등한 정책을 실현하는지 끊임없이 감시해야 합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적극적인 감시자가 될 때, 비로소 평등한 사회가 찾아올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구성원들이 통치자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거나 자신의 권리를 내주거나 감시를 포기한다면, 중앙 권력은 언제나 탐욕과 부패에 삐질 수 있겠죠. 솔직히 현실 속의 사회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대기업들에게 광신적으로 매달리거나 떡고물만 바랍니까. 그런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패가 일어나거나 기득권이 약자들을 짓누를 수 있죠.



하지만 장애인 설립자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태생적인 이유 덕분에 그런 구조로 나갈 수 없었을 듯합니다. 물론 그런 이유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켈러 마을도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도자는 계급이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았고, 마을을 설립한 이후 조용히 사라집니다. 수많은 주민들 중 하나가 됩니다. 그 누구도 지도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지도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주인공은 그 지도자가 민주적인 공산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켈러 공동체는 카를 마르크스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상상했던 공산주의 마을과 많이 다릅니다. 켈러 공동체는 계급과 격차와 신분이 없는 마을을 이룩했고, 생산 수단(토지와 하천 등등)은 그 누구의 소유가 아닙니다. 켈러 공동체 전부가 생산 수단을 공유하죠. 하지만 켈러 주민들은 단순히 생산 수단만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삶 그 자체를 공유합니다. 장애 때문에 이들은 개인적인 벽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벽을 세우는 순간, 공동체가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살아남는 길은 무조건 서로 통합하고 소통하는 길이었습니다.



켈러 주민들은 언뜻 <유년기의 끝>이나 <블러드 뮤직>의 정신 공동체처럼 보입니다. 켈러 주민들은 그저 장애인일 뿐이고 육체도 있습니다. <유년기의 끝>이나 <블러드 뮤직>에서 인류는 육체를 버리고 정신적 공동체로 승화했으나, 켈러 주민들은 그런 변화를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육체적인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뭔가 초자연적인 방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음, 오히려 그건 너무 육체적인 방법입니다. 켈러 주민들은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 하나로 화합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주인공은 켈러 마을에 머무르지만, 그런 방법을 배우기 위해 무진장 애를 씁니다. 주인공은 기존의 관념들을 모두 버려야 했고, 자신을 온전히 공동체에게 드러내야 했습니다. 마치 발가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처럼. 사실 주인공은 발가벗고 이웃들과 어울려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켈러 주민들의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켈러 주민들은 하나의 살덩이가 되고 무수한 육체적인 접촉 속에서 정신 공동체가 됩니다.



이런 소설을 볼 때마다 저는 진정한 평등이나 공유가 무엇인지 생각하곤 합니다. 주인공이 명시한 것처럼 켈러 마을은 사회주의 공동체이지만, 켈러 주민들은 그저 생산 수단만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삶을 공유했고, 서로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줬습니다. 주민들은 성적 쾌락까지 공유합니다. 따라서 이 마을에는 전통적인 성 개념이나 가족 개념이 없습니다. 개별적인 연인은 없습니다. 연인들은 자신들의 성적 쾌락을 모두와 공유합니다. 이런 사회는 상당히 생소하게 보이지만, 이 파격적인(?) 공유 덕분에 주민들은 진정으로 계급을 없애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개인의 쾌락이 공동체의 쾌락이 됩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가 '개인의 발전이 사회 전체의 발전이 되는 공동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생산 수단을 공유한다고 해서 저런 수준에 이를 수 있을까요. <안드로메다 성운> 같은 소설도 생산 수단의 공유를 넘어 더욱 고차원적인 공유를 주장합니다. 어쩌면 사회주의자들은 그저 생산 수단의 공유에만 만족해서는 안 될지 모릅니다. 뭐, 현실에서 아직 생산 수단의 공유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꿈이지만.



하지만 언젠가 인류 문명은 생단 수단을 공유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전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이 거기에만 만족해야 할까요. 인류 문명이 <잔상>이나 <안드로메다 성운> 같은 수준에 이를 때까지 사회주의자들은 부단히 애써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는 너무 사이언스 픽션적인 상상입니다. 아마 이런 것까지 생각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발상보다 당장 환경 오염 반대 시위가 더 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죠.


하지만 사회주의는 언제나 미래를 바라봐야 하고, 저는 가끔 사회주의가 머나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의 현실적 문제들, 자유 시장의 노동 악법이나 기후 협약 탈퇴나 무분별한 핵 발전소 건설 등이 중요하겠지만, 가끔 사회주의 혁명 이후를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사회주의자들이 <잔상>을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평등과 공유라는 개념이 얼마나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지 새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잔상>은 경제적인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삼지만, 자본주의 착취나 모순을 말하지 않습니다. 아마 존 발리는 그런 것들을 잘 몰랐을 것 같습니다. 존 발리는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나 킴 로빈슨이 아니니까요. 게다가 경제 대공황은 소설 속에서 그저 배경에 불과하기 때문에 (존 발리가 그걸 알았다고 해도) 자본주의 모순을 자세히 설명할 이유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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