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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3)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3)

OneTiger 2017. 4. 22. 20:00

※ 이 글은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의 세 번째 소감문입니다.


※ 첫 번째 소감문: http://sfecology.tistory.com/68


※ 두 번째 소감문: http://sfecology.tistory.com/72



소설 <하늘의 저편>은 <달을 향한 모험>과 비슷합니다. 연작 단편 소설이고, 독자가 아서 클라크에게 기대하는 과학적 고증과 장엄한 시각이 담겼습니다. 주인공은 우주 정거장에 근무하는 과학자이고, 우주 정거장의 여러 일상을 들려줍니다. 사실 그런 일상들은 말 그대로 일상에 불과하지만, 소설 배경은 다름아닌 우주 정거장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사고도 흥미로운 과학적 화제가 될 수 있죠. 여러 연작 중에서 '깃털 달린 친구'는 제목처럼 애완동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애완동물은 카나리아죠.


폐쇄적인 우주 정거장과 카나리아. 뭔가 딱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 깃털 달린 친구는 카나리아의 울음이라는 고전적인 격언을 우주 시대에 상기하도록 합니다. 게다가 우주 정거장은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최첨단 시설입니다. 따라서 최첨단 시설과 가냘픈 카나리아는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울추가 (최첨단 시설이 아니라) 하필 가냘픈 카나리아로 기울어질 때 독자는 의외의 감성을 받을 수 있겠죠. 어쩐지 <달을 향한 모험>의 '녹색 손가락' 이야기가 떠오르더군요.



'숨을 깊게 쉬고'는 아주 전형적인 오해 하나를 바로잡는 소설입니다. "만약 인간이 맨몸으로 우주 공간에 노출된다면, 그 인간은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별별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급속도로 얼어 붙는다거나, 압력 때문에 눈알이 튀어나온다든가, 즉시 몸이 짜부라든다거나, 치명적인 우주 방사선 때문에 종양들이 생긴다거나, 기타 등등. '숨을 깊게 쉬고'는 그런 오해를 향해 손을 내젓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주에 맨몸으로 나간다면 하등 좋을 리 없겠죠. 어쨌든 오해를 바로잡는다는 점에서 신선했습니다.


'조우'는 말 그대로 미지와의 조우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어떻게 주인공이 우주 공간에서 연인과 밀회를 즐기는지 설명하고, 막상 조우의 순간은 짧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저편> 자체가 우주를 동경하는 마음을 담뿍 담았고 엄밀한 고증을 살렸기 때문에 그 조우의 순간은 결코 희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짧지만 강렬합니다. 마치 우주 정거장의 모든 일상이 그 조우의 순간을 위해 기다렸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마 독자마다 좋아하는 대목이 다르겠지만, '조우'의 그 순간은 <하늘을 저편>을 통틀어 가장 강렬한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언제나 미지를 탐사하고, '조우'는 그런 미지와의 조우를 전형적이고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별들이 나를 부른다'는 우주 탐사의 기나긴 여정을 회의하고 반추합니다. 탐험이라는 단어는 설렙니다. 탐험이 별로 설레는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걸 모험으로 바꿔도 좋습니다. 모험은 설레는 단어입니다. 고향을 떠나고 낯선 하늘과 낯선 땅과 낯선 거주민과 낯선 식생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런 과정에서 탐험가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인식의 지평선이 저만큼 넓어지겠죠. 던전 탐험이든 생태계 탐험이든 우주 탐험이든 어쨌든 탐험은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그 탐험이 왕복 여행이 아니라 편도 여행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고향을 완전히 떠나고, 향수병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우주는 굉장히 넓습니다. 덕분에 우주 탐험은 항상 편도 여행이고, 탐험가들은 그 점을 감수해야 합니다. 인류의 번영을 위해 누군가는 저기 머나먼 세계로 떠나야 하지만, 그 사람은 인류의 요람을 영원히 떠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탐험을 그저 로망으로만 바라볼 수 없겠죠. 이런 감수성은 <머나먼 지구의 노래>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별들이 나를 부른다'와 <머나먼 지구의 노래>는 모두 장대한 탐험의 서글픔을 드러냅니다.



<머나먼 지구의 노래>는 어느 외계 행성을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오래 전에 인류는 이 행성에 정착했고, 생산 기술은 근대적이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사회를 이룩했습니다. 어느 날 지구의 우주 탐험가들이 이 행성에 들립니다. 그들은 저 깊고 깊은 우주를 향해 떠났으나, 우주선이 망가졌기 때문에 이 행성에 임시로 들렸습니다. 우주 탐험가들은 우주선을 수리하자마자 떠날 거라고 발표하고, 행성 거주민들과 우주 탐험가들은 아주 잠시 어울립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도 사랑의 불꽃이 튈 수 있습니다. 거주민 처녀와 탐험가 총각은 서로 눈이 맞았고, 그들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열렬한 애정을 서로에게 쏟습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운명은 정해졌죠. 한 사람은 외계 행성의 정착지를 일궈야 하고, 또 한 사람은 별빛조차 낯선 세계로 떠나야 합니다. 어찌 보면, <머나먼 지구의 노래>는 뻔한 로맨스입니다. 사랑하는 연인. 비극적인 이별. 여자는 남고, 남자는 떠납니다. 여타 로맨스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도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장대한 우주가 있고, 그건 여타 로맨스 소설에 결코 등장하지 않는 요소입니다.



외계 행성의 거주민과 우주 탐험가의 이별은 단순한 연인의 이별이 아닙니다. 인류가 우주로 확장하는 장대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그 전체적인 여정은 장엄하지만, 그래서 개인의 비극이 훨씬 아프게 다가옵니다. 탐험은 로망처럼 보이지만, 단순한 로망은 아니죠. 한편으로 <머나먼 지구의 노래>는 탐험을 이용해 인류 문명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것 같습니다. 왜 탐험가들은 저 머나먼 우주로 떠날까요. 왜 그들은 고향을 등질까요. 그게 바로 인류의 번영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지구를 생명의 요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요람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요람을 벗어나고 더 먼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문명은 지구라는 좁은 그릇에만 담길 수 없습니다. 문명은 지구를 벗어나고 태양계를 벗어나고 다른 항성계들까지 닿아야 합니다. 인류는 인간 이외에 다른 지적 존재를 만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더욱 번창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비록 <머나먼 지구의 노래>는 이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지 않으나, 독자는 이야기의 밑바탕에서 저런 사상을 유추할 수 있을 겁니다. 감동적인 사상이지만, (좀 딴지를 건다면) 그렇게 우주만 바라보지 말고 밑바닥 사람들과 멸종 위기의 동물들도 바라봤으면 싶군요.



<빛이 있으라>는 하얀 사슴 시리즈이고, 다른 시리즈들처럼 해학과 웃음을 선보입니다. 과학적인 발상은 그리 크지 않지만, 재미있고 만족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가벼운 일사병>은 남아메리카의 정치를 풍자하고 축구 열풍을 빗대는 이야기 같군요. 남아메리카의 비극적인 현실을 너무 표면만 핥는 것 같지만, 뭐 어떻겠어요. 어차피 이 이야기는 코미디에 불과한데요. 이건 하얀 사슴 시리즈가 아니지만, 그만큼 해괴하고 놀랄만한 이야기입니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살인 광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빛이 있으라>보다 훨씬 대단한 살인 광선이로군요. 정말 이게 가능한지 실험해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름대로 사이언스 픽션의 매력을 십분 발휘했다고 할 수 있겠죠.


<우주의 카사노바>는 우주 탐험가의 외로움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머나먼 지구의 노래>처럼 진중함이 돋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주 탐험가의 외로움을 우스꽝스러운 사건과 연결합니다. 어쨌든 (희극적이든 비극적이든) 아서 클라크는 우주 탐험을 적막하고 고독한 여정으로 생각하나 봅니다. 아무리 세대 우주선이 시끌벅적해도 텅 빈 우주 속의 우주선은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풍기겠죠. 개인적으로 그런 고독함과 적막함을 좋아하고, 그래서 우주 탐험물을 좋아합니다.



<태양 밖으로>는 <하늘의 저편>의 '조우'처럼 미지와의 조우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과연 그 미지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미지와의 조우가 매력적인 까닭은 우리 인류가 미지를 접촉하는 그 순간, 인식이 확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강렬한 접점의 순간이죠. 그 순간은 짧지만, 그 접점의 강렬함을 확인하는 과정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비단 이런 우주 탐험물만이 아닙니다. 아서 코난 도일이 쓴 비행 생명체나 쥘 베른이 쓴 지저 생명체도 우리의 인식을 넓혀줍니다.


게다가 아서 클라크는 그 미지를 단순한 괴물이나 악마로 그리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괴물이나 악마는 우리의 뻔한 상상력에 불과하고, 오히려 고정 관념의 벽만 두껍게 만들 뿐입니다. 라마 우주선이나 오버로드가 그랬던 것처럼 아서 클라크는 경외적인 생명체(?)를 보여줍니다. 비록 <태양 밖으로>는 단편 소설이지만, 라마 우주선을 봤을 때의 경외심을 일부 느낄 수 있어요. 그만큼 아무나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지만, 아아, 이런 소설이 정말 좋군요.



<거기 누구냐?>라는 제목은 마치 존 캠벨 주니어의 소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극지방 탐험대가 변신 외계인을 만나는 소설이요. 하지만 제목만 그럴 뿐이고,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물론 제목처럼 뭔가 불길하고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선뜻 풍깁니다. 적막한 우주, 고독한 우주 비행사, 원인을 알 수 없는 사건…. 우주라는 공간 자체가 너무 넓기 때문에 현기증이나 공포를 일으킬 수 있죠. 아서 클라크는 그런 현기증이나 공포, 소름을 말하고 싶었나 봅니다.


사실 저는 이런 점 때문에, 그러니까 고독과 고립과 적막 때문에 가끔 우주 탐사물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감성을 느낍니다. 멸망한 문명과 드넓은 우주는 모두 적막합니다. 인적이 없죠. 그렇다고 해서 우주 탐사물과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그런 적막과 고독이 좋다는 뜻입니다. <요람을 벗어나, 우주로>는 일종의 찬가입니다. 인류 문명의 번영과 우주적인 확장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감동적이지만, <안드로메다 성운>이 좀 생각나는군요. (앞에서 말했듯) 우주를 바라보는 것만큼 밑바닥 사람들도 바라보면 어떨지….



<나는 바빌론을 기억한다>는 과학 만능주의를 경고합니다. 과학 만능주의는 사이언스 픽션의 흔한 소재지만, 이 소설은 독특하군요. 인공위성 중계가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서 클라크는 인공위성 중계라는 개념을 널리 퍼뜨렸죠. 사실 이런 업적 덕분에 아서 클라크는 그냥 SF 소설가가 아니라 미래학자로 알려졌죠. 아이작 아시모프가 열렬한 저술가라면, 아서 클라크는 미래학자입니다. 그런데 이 미래학자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그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혜성 속으로>는 최첨단 장비와 원시적인 장비의 대조가 뚜렷한 소설입니다. 우주 탐험은 최신예 기술을 이용하겠으나, 그런 최신예 기술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첨단 장비는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몇 천 년 전부터 다양한 기술을 응용했고, 그런 기술들은 문명을 지탱했습니다. <혜성 속으로>는 그런 고전적인 기술을 추억합니다. 우주 탐험과 고전적인 기술은 서로 어울리지 않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카타르시스는 진국입니다.



이렇게 총 3번에 걸쳐서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를 이야기해봤습니다. 아서 클라크의 명성에 걸맞게 장엄한 것들도 있고, 반면 웃기고 배꼽 빠지는 이야기들도 많군요. 장엄한 우주 탐험도 좋지만, 배꼽 빠지는 이야기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이런 소설 모음집에는 좀 실망스러운 이야기가 끼어들기 마련이지만, 전부 재미있게 읽었어요. 특히, <해저 목장>, <달을 향한 모험>의 '녹색 손가락', <지구의 다음 세입자>, <태양 밖으로>가 인상적입니다. 역시 SF 소설은 인간 이외의 존재를 돌아봐야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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