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 본문
※ 이 글은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의 첫 번째 소감문입니다.
※ 두 번째 소감문: http://sfecology.tistory.com/72
※ 세 번째 소감문: http://sfecology.tistory.com/80
<2001 우주 대장정>, <라마와의 랑데부>, <유년기의 끝>…. 이런 소설들만 보면, 아서 클라크가 굉장히 진지한 작가처럼 보입니다. 농담이나 개그나 잡담을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아요. 항상 경외적이고 심각하고 장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니까요. 하지만 진지한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해서 웃기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스타니스와프 렘도 <솔라리스>를 썼고, 한편으로 <우주 비행사 피륵스>를 썼습니다. 두 소설의 분위기나 주제는 사뭇 다르죠.
아서 클라크도 얼마든지 웃기거나 배꼽 잡는 이야기를 쓸 수 있어요. 썰렁한 영국 유머가 아니라 진짜 웃기는 이야기를 쓸 수 있습니다. SF 감성을 전혀 놓치지 않고요. 황금가지의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은 아서 클라크의 기가 막힌 면모들을 조명합니다. <유년기의 끝>처럼 진지한 소설만 아니라 얼마나 허풍을 잘 떠는지 보여주죠. 그렇다고 해서 아이작 아시모프만큼 자기 잘난 맛에 능청을 늘어놓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서 클라크는 아시모프보다 좀 더 담백하다고 할까요.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은 모두 33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주 짧고 소품적인 이야기부터 하나의 길고 중대한 여정까지, 독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단편 소설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이게 소설이 맞나 싶기도 합니다. 가령, <다른 호랑이>는 평행 우주를 짧게 소개합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세계들이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는 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른 세계에서 우리들 자신은 지금과 전혀 다른 상황에서 살아갈지 모릅니다.
어쩌면 다른 세상에서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하고, 생물 다양성 위기가 없는 상황에서 살아갈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미 전면 핵전쟁이 벌어지고, 방사능 오염과 각종 질병과 끔찍한 지옥이 현실이 되었을지 모르죠. 우리는 당장 눈 앞에 닥친 일에 급급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세상, 우리의 상식과 전혀 다른 세상이 엄청나게 많을지 모릅니다. 비록 증명하기 힘들고, 우리가 그걸 직접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이 우주의 모든 것은 아닐 겁니다. <다른 호랑이>는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문학적인 장치에 별로 신경을 안 쓰고, 그래서 소설보다 비유적인 사설을 읽는 듯하더군요.
<홍보 활동> 역시 <다른 호랑이>만큼 짧은 소설입니다. 미지와의 조우, 인간과 외계인의 조우를 이야기하는데, 그 과정이 정말 골 때립니다. 표면상으로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풍자하는 것 같지만, 그 너머에는 미지를 두려워하는 인류의 심리가 담겼습니다. 인간 이외의 것을 배척하는 심리는 자극적인 블록버스터로 이어지고, 그것이 마침내 인류 전체의 재난으로 이어집니다. 아서 클라크는 이 단편 전집에서 가끔 영화 산업에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런 쪽에 관심이 꽤나 많았나 봅니다. 아니면 영화 산업의 편파적이고 관습적인 SF 요소가 마음에 안 들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풍자 소설답게 웃으며 읽을 수 있고, 이런 분위기가 단편 전집의 초반 분위기를 이룹니다. <무기 경쟁> 역시 비슷한 분위기의 단편입니다. 짧고, 풍자적이고, SF 영화를 언급하고, 자극적인 연출을 위한 사소한 시도가 커다란 재앙으로 이어지죠. 그 과정의 엉뚱함이 배꼽을 잡게 하고요. 등장인물들은 뭐 그리 입체적이라고 할 수 없겠으나, 사람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군요. 제목이 <무기 경쟁>이지만, 아서 클라크가 이것으로 강대국의 무기 개발을 풍자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보다 SF 영화 풍자가 훨씬 두드러집니다. 사실 아서 클라크만 아니라 SF 영화는 SF 소설가에게 언제나 좋은 풍자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해저 목장>은 (비유하자면) 어느 양치기의 이야기입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 같은 소설에서 양치기는 험한 숲 속에 살고, 늑대나 곰 같은 야수에게서 양떼를 지키고, 그걸 위해 사냥총을 다루고, 목양견을 부립니다. 물론 <별>에서 양치기는 좋아하는 아기씨와 화기애애한 밤을 보내죠. 하지만 <해저 목장>의 화기애애함은 좀 다릅니다. 이 단편에서 양치기는 사실 잠수정 조종사이고, 사냥총 대신 잠수성의 어뢰나 폭발성 작살을 사용하고, 목양견 대신 개조 돌고래를 다룹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양치기 이야기의 미래 해저 버전입니다.
딱히 특별한 구석은 없지만, 어쩌면 이런 시대가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지 모르겠어요. 개조 돌고래나 해저 목장은 이제 그리 머나먼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런 개조 동물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나름대로 흥미롭게 봤습니다. <더 이상 아침은 없다>는 회의주의적인 시각을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SF 작가들은 시야가 넓기 때문인지 인류 전체의 미래를 비관하는 경향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인류 전체가 사라지는 미래를 꿈꾸기도 합니다. 커트 보네거트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더 이상 아침은 없다>는 그런 부류에 가까운 소설입니다. 아서 클라크가 인류를 이렇게 비관적으로 바라볼 줄 몰랐군요. 보네거트만큼 풍자는 있으나, 미소나 웃음은 없습니다. 그런 게 안 어울리는 소설이기도 하고요.
<대박의 꿈>은 행동 조종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신기술을 이용해 뭔가 대박을 노리면, 항상 예상치 못한 자연 재난에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행동 조종이나 동물에 의한 재난은 재미있지만, 그리 특별한 구석은 없군요. 그리고 <대박의 꿈>은 이른바 '하얀 사슴 시리즈'입니다. 하얀 사슴이라는 술집에서 일련의 과학자들이 모여서 허풍을 떠는 내용입니다. 특히, 해리 퍼비스라는 인물이 이 술집에서 제일 가는 허풍쟁이입니다. 이 인물의 끝없는 허풍을 듣노라면, 정말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이 책에는 이런 '하얀 사슴 시리즈'가 꽤나 많이 나옵니다. 술집에서 맥주 한 잔을 홀짝거리며, 과학자의 허풍을 느긋하게 듣는다…. 아서 클라크도 이런 로망이 있었군요. <특허 심사> 역시 하얀 사슴 시리즈이고, 감정 공유가 소재입니다. 새로운 발명품 덕분에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을 완벽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발명품은 곧이어 섹스 산업으로 이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섹스의 산업화를 해학적으로 그리는 대목이 돋보이는군요. 누가 보더라도 섹스 산업은 정말 마르지 않는 돈줄인 듯합니다.
<망명자>는 우주 여행을 빙자한(?) 영국 문화 답사기입니다. 미국 우주선 선장이 영국에 착륙하고, 영국 왕자를 접견합니다. 그 와중에 미국인 선장은 영국의 온갖 풍습과 문물에 문화적인 차이를 느낍니다. 누구나 자기 고향에 애착을 느끼는 것처럼 아서 클라크도 영국 문화에 애착을 느끼는가 봅니다. 아니면 자기가 잘 아는 영국 문화를 이용해 문화적인 상대성을 꼬집으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유럽 사람들은 왜 그리 왕실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를 그렇게 자랑하면서 왕실이라니, 시대 착오적이지 않나요. 정말 소설 속의 대사처럼 그저 전통일 뿐일까요.
하여간 그런 점을 제쳐두고, (짧은 이야기임에도) 우주를 향한 로망을 참 제대로 담아낸 것 같습니다. 네, 우주를 항한 로망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죠. <동방의 별>은 굉장히 장대하고 인상적인 우주 탐험물입니다. 분량은 전혀 길지 않으나, 그 깊이만큼은 압도적입니다. 수많은 문명과 행성의 흥망이 이 안에 담겼군요. 더 놀라운 점은 그런 행성 문명의 흥망성쇠가 고립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우주는 드넓고, 어느 행성의 시발점은 어느 문명의 파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거시적이고 중후한 상상력이야말로 <동방의 별>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아마 <동방의 별>은 이 책의 초반부 소설들 중 가장 인상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분위기도 사뭇 다르고요. 다른 단편 소설들의 풍자나 해학, 웃음은 없고, 우주를 바라보는 냉철한 시각과 비판적이면서 동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개인적으로 <더 이상 아침은 없다>가 <동방의 별>보다 인상적이었으나, <동방의 별>의 아련한 마무리를 잊기 힘들군요. 어쨌든 두 소설 모두 인간 위주의 시각에서 탈피하게 해주는 작품이고, 이런 시각이야말로 SF 소설만의 장점임을 역설합니다.
이 세상에 주인공은 없습니다. 그저 우주적인 질서가 돌아갈 뿐이죠. 우리들은 그런 우주적인 질서 속에서 발버둥칠 뿐이고요. 개인의 비극은 그 개인에게 아픔이겠지만, 우주 전체로서는 그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군요.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저는 <더 이상 아침은 없다> 같은 소설을 볼 때마다 왜 인류 전체가 끝장이 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왕 파격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면, 좀 더 건설적으로 사고할 수 있잖아요. 진짜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세상이라든가…. 그런 것조차 시도하지 않고 인류 멸망부터 말한다면, 성급한 시도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반중력>은 하얀 사슴 시리즈입니다. 우리의 허풍쟁이 주인공 해리가 음모론자를 물리치기 위해 열심히 이빨을 까는군요. 해리는 그야말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고 말도 안 되는 허풍을 치지만, 그 열의와 분위기는 정말…. 로망이 흐른다고 할까요. 사실 SF 작가들도 '과학스러운 허풍쟁이'입니다. SF 작가들도 충분히 음모론스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죠. 그렇다고 해서 SF 소설이 음모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도발적이고 어딘지 논리적인 설정이 SF 독자의 마음 한 구석을 찌른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사이언스 픽션의 재미 중 하나죠.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논리가 있고, 그래서 그 논리가 현실과 맞닿습니다.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천체 물리학이든, 진화 생물학이든, 환경 사회학이든, 뭐든 간에 비단 상상만 아니라 논리까지 추구해요. 그런 논리가 꼭 엄정한 고증을 거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과학스럽게 보이면' 그만입니다. 하드 SF 독자들은 고증을 지키라고 주장하겠으나, 저는 허풍이 꼭 고증을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임스 발라드가 말했듯 과학스러운 것이 과학은 아니죠. <네이처>나 <사이언스>가 SF 소설 모음집이 아닌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