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검마 판타지의 유토피아 소설 본문
유토피아 소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은 서로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풍요롭고 평등한 세상을 노래하고, 다른 하나는 비참하고 폭력적인 지옥을 보여줍니다. 흔히 디스토피아가 유토피아의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야말로 유토피아의 극단일지 모릅니다. 디스토피아에서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가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나니까요. 물론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문명의 끝을 이야기할 뿐이고, 그 자체는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작품에 따라 긍정적인 멸망도 많습니다. <유년기의 끝>이나 <블러드 뮤직>은 분명히 대규모 멸망을 이야기하지만, 그리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건하고 신비롭죠. 반면, 디스토피아는 예외 없이 부정적입니다. 애초에 디스토피아 자체가 부정적인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태어난 셈입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진정한 반대 상황은 디스토피아일지 모릅니다. 경외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있으나, 경외적인 디스토피아는 없을 겁니다. 음, 정말 없을까요? 잘 모르겠군요. 여하튼 디스토피아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보다 훨씬 부정적인 것 같습니다.
유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는 모두 SF 계열에 속합니다. 몇몇 작품들은 예외일 수 있으나, 대부분 평론들은 이런 장르들을 SF 울타리 안에 집어넣습니다. 사실 <에코토피아 뉴스>나 <아이슬란디아>, <해변에서>, <로드> 같은 소설은 딱히 사이언스 픽션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에코토피아 뉴스>가 SF 소설이 아니라거나 <로드>가 유치한 SF 소설이 아니라는 말도 들어봤습니다. 아마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외계인과 우주선과 광선총과 돌연변이가 사이언스 픽션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나 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겠죠. 아마 사변 소설이라는 용어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걸요. 뭐,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SF 문화는 상당히 척박하고, 따라서 그런 오해나 무지도 당연한 현상입니다. 만약 SF 잡지나 개론서, 평론이 널리 퍼졌다면, 그런 오해나 무지가 줄어들었겠으나, 우리나라 현실은 그렇지 않죠. 솔직히 미국이나 영국, 일본처럼 SF 문화가 융성한 곳에서도 저런 오해나 무지가 없지 않을 걸요. 어쨌든 저런 오해나 무지를 떠나서 유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주로 SF 계열에 속합니다.
물론 어떤 작품들은 판타지나 공포물에 속할지 모릅니다. 검마 판타지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이용해 저런 소설들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엘프, 드워프, 오크, 고블린, 트롤을 이용해 유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논할 수 있겠죠. 판타지 왕국도 얼마든지 지상 천국이 되거나 멸망할 수 있잖아요. 마법사들이 엄청난 마법 대결을 펼쳤기 때문에 세상이 풍지박산이 날 수 있어요. 검마 판타지에는 메테오 스트라이크나 뭐 그런 마법들이 많잖아요.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는 마법 역병 같은 어마어마한 사건도 있고요. 아니면 엘프들이나 드워프들이 그야말로 천국을 만들 수 있죠. 엘프와 드워프가 손을 잡고, 발달된 기계로 값싼 공산품들을 양산하거나 숲을 보존하거나 군주제를 폐지하고 의원제를 실시하거나 그럴 수 있을지 모르죠. 사실 <에코토피아 뉴스>의 사회주의자들은 마법을 안 쓸 뿐이지 실반 엘프들이랑 다를 바 없습니다. 다들 잘 생겼고, 화목하게 살아가고,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이룩했죠. 검마 판타지도 엘프들을 이용해 이런 유토피아 소설을 쓸 수 있을 겁니다. 얼마든지 검마 판타지도 유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유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검마 판타지의 하위 장르로 들어가는 경우는…. 별로 못 본 것 같습니다. 아니, 저런 것들은 판타지의 하위 장르에 별로 들어가지 않아요. 아마 그 이유는 사변, 사고 실험이 사이언스 픽션의 고유 영역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외계인이고 드워프고 상관없이, 사변이나 사고 실험 자체가 사이언스 픽션의 전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고 실험을 고려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의 범주는 흔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넓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