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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오늘날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꽤나 능숙하게 스마트폰을 조작합니다. 심지어 6살짜리 아이조차 음성 검색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거나 스마트폰과 거실 네트워크를 연결하거나 인공 지능들을 품평하죠. 어른들은, 특히, 노인들은 이런 모습에 많이 놀랄 겁니다. 노인들은 스마트폰이나 거실 네트워크나 인공 지능에 익숙하지 않죠. 노인들이 쩔쩔매며 검색창에 글자들을 두드릴 때,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음성 검색합니다. 노인들은 아이들을 놀란 시선으로 쳐다보겠죠. 심지어 어떤 노인들은 '종자가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이들이 정말 새로운 생물종이라는 뜻이 아니겠죠. 이건 그렇게 세상이 바뀌고 사람들 역시 바뀐다는 뜻이겠죠. 현재 세대들은 강력한..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가끔 소설 작가들이나 문학 평론가들은 이 문구를 읊조립니다.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소설 역시 없을 겁니다.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소설이 없다면, 수많은 소설들은 비슷하겠죠. 옛날 소설과 현대 소설은 비슷할 테고, 이 작가가 쓴 소설과 저 작가가 쓴 소설은 비슷할 겁니다. 여자 작가가 쓴 소설과 남자 작가가 쓴 소설 역시 비슷하겠죠. 수많은 연애 소설들은 두 연인이 사랑하고 결혼에 골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통상적인 연애 소설들은 그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두 연인은 사랑하고,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겪으나 결국 두 연인은 결혼에 골인합니다. 조선의 고전 은 그런 내용이고, 블록버스터 영화 은 그런 내용이고, 19세기 유럽 소설 은 그런 내..
종종 이 블로그에서 저는 SF 작가가 현재의 문제를 미래에 투영하거나 미래를 현재로 끌어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SF 작가는 현재를 미래에 투영하거나 미래를 현재로 끌어옵니다. 따라서 SF 세상에는 '투영하기'와 '끌어오기'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투영하기는 SF 작가가 현재의 문제를 미래에 대입한다는 뜻입니다. 미래를 상정하는 숱한 SF 소설들은 여기에 해당할 겁니다. 가령, 그렉 이건이 쓴 은 미래 디스토피아 도시를 그립니다. 하지만 미래 디스토피아 도시가 그렇게 나타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렉 이건이 묘사하는 미래 시대는 오직 현재의 문제들을 뻥튀기한 결과물일지 모릅니다. 그렉 이건은 여러 모드들을 언급합니다. 모드는 인간의 생체를 조절하고 강화하..
영화는 극장 매체입니다.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극장을 찾습니다. 거대한 화면, 북적거리는 관객들, 고소한 팝콘 냄새, 매표소와 길다란 줄, 대형 포스터. 이런 것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종종 어떤 사람들은 극장보다 2차 매체(비디오, DVD, 블루레이, 유료 다운로드)들을 선호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의 없이 시끄럽게 떠드는 관객들 때문에? 음료수를 너무 많이 마신다면, 화장실을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광고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이유들이 있겠으나,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가 실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실시간입니다. 관객이 어떤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어떤 대사를 놓친다고 해도, 영화는 관객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관객이 영화가 제시한..
영화 은 전문가들이 활약하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는 정보 전문가들이 정보를 능숙하고 치밀하게 수집하는 내용이고, 관객들은 거기에서 즐거움을 얻습니다. 저는 을 아직 못 봤습니다. 하지만 여러 평론가들과 수많은 관객들은 이 수작이라고 평가합니다.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전문가들이 정말 전문가들로서 행동하기 때문이겠죠. 비단 만이 아니라 전문가들을 조명하는 창작물들은 많습니다. 온갖 소설들, 만화들, 애니메이션들, 영화들, 비디오 게임들은 전문가들을 내보내고 전문적인 세계를 그립니다. 은 테크노 스릴러에 가까운 정보 수집 전문가들을 보여주고요. 우리는 그런 장면들에 열광하죠. 왜 우리가 그런 전문가들에게 열광할까요? 왜 전문가들이 활약하는 장면들이 즐거울까요? 거기에 무슨 매력이 있을까요..
작가라는 단어는 온갖 무게들과 꼬리표들과 압박들을 짊어졌습니다. 흔히 우리는 작가가 굶주리는 직업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우리는 작가들이 슬럼프를 겪는다고 말합니다. 작가는 고뇌하는 예술가이고, 자신의 세상을 펼쳐보이고, 유일무이한 뭔가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꽤나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은 오직 빅토르 위고만이 쓸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프랑스 6월 공화주의 혁명을 소설로 쓸 수 있겠으나, 그건 이 되지 못하죠.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작가는 혼자 유일무이한 뭔가를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화가, 조각가, 작곡가, 영화 감독 같은 예술가들 역시 작가와 비슷한 위상을 점유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라는 영역은 오직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죠. 어떤 예술은 텍스트 작품보다 훨씬 파..
[이런 그림처럼, SF 세상에서 인간성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고정적인 인간 군상은 없습니다.] '인간!' 소설 에서 주인공 켈빈은 이런 쪽지(반창고)를 발견합니다. 그건 솔라리스 정거장에서 누군가가 휘갈겨쓴 쪽지입니다. 살아있는 플라즈마 바다가 일으키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 그 사람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고찰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SF 소설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고찰하기에 좋은 매체입니다. 왜? 처럼 SF 소설은 익숙한 환경을 떠나고 낯선 환경으로 들어갑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우리는 익숙한 존재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게 SF 소설의 가장 큰 특징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때문에 수많은 독자들은 SF 소설을 읽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결국 SF 소설이 사람들의 보편적..
[하드 SF의 장점은 외계인이 아니라 복잡한 공학을 찬미하는 가능성입니다. (이미지 출처)] 소설 를 비평하는 어떤 글에서 듀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20세기의 정통 하드 SF 대부분은 곧 구닥다리가 될 것이다. 윌리엄 깁슨이 얼마 전 트위터에서 지적했듯, 우리의 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예언한 건 하드 SF 작가들이 아니라 J.G. 발라드와 같은, 다른 비전을 가진 작가들이었다." 이 비평은 꽤나 모순적인 상황을 지적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드 SF 소설들이 복잡하고 엄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뉴웨이브 소설이나 소프트 SF 소설은 헐렁하고 과학적으로 엄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드 SF 소설들이 가장 핵심적인 SF 장르라고 여기죠. 하지만 복잡하고 엄중하기 때문에 하드 SF 소설은 특정 시대..
장 폴 사르트르는 에서 작가와 독자들이 무슨 관계를 맺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가장 먼저 읽는 독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작가보다 먼저 작가의 소설을 읽는 독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오직 혼자 소설을 읽지 않아요. 작가가 쓰는 소설은 작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죠.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작가가 그 자체로서 생산자가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독자들이 존재할 때, 작가는 생산자가 될 수 있죠. 따라서 독자들이 없는 작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설을 살펴볼 때, 우리는 무슨 독자들이 그 소설을 읽는지 함께 살필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소설을 쓸 때, 작가가 어떤 독자들을 염두에 둘까요? 작가가 어떤 독자들을..
SF 소설은 꽤나 거시적입니다.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거시적인 관점에서 수많은 SF 소설들은 인류 문명을 논의했습니다. 다른 주류 문학들과 달리, SF 작가들은 주저하지 않고 원시 시대와 고대 시대와 중세 시대와 근대 시대와 가까운 미래와 우주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런 소설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SF 작가들은 고대부터 우주 시대까지 둘러보고, 그런 장대한 시각은 엄청난 경이감을 선사하죠. 왜 SF 작가들이 이렇게 거시적으로 시대를 살펴볼 수 있을까요? 원인이 뭘까요? 왜 19세기 이전 사람들과 달리,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는 고대와 미래를 동시에 둘러볼 수 있을까요? 자연 과학과 이성적인 사고 능력이 발달했기 때문에?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과 함께 또 다른 이유가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