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하늘 아래에서 SF 소설은 새로울 수 있다 본문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가끔 소설 작가들이나 문학 평론가들은 이 문구를 읊조립니다.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소설 역시 없을 겁니다.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소설이 없다면, 수많은 소설들은 비슷하겠죠. 옛날 소설과 현대 소설은 비슷할 테고, 이 작가가 쓴 소설과 저 작가가 쓴 소설은 비슷할 겁니다. 여자 작가가 쓴 소설과 남자 작가가 쓴 소설 역시 비슷하겠죠. 수많은 연애 소설들은 두 연인이 사랑하고 결혼에 골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통상적인 연애 소설들은 그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두 연인은 사랑하고, 이런저런 어려움들을 겪으나 결국 두 연인은 결혼에 골인합니다.
조선의 고전 <춘향전>은 그런 내용이고, 블록버스터 영화 <타이타닉>은 그런 내용이고, 19세기 유럽 소설 <오만과 편견>은 그런 내용이고, 연말 영화로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러브 액츄얼리>는 그런 내용이고, 수많은 인터넷 연애 소설들 역시 비슷한 이야기들을 반복합니다. 존 스칼지가 쓴 <노인의 전쟁>은 SF 밀리터리 소설이나, 연애는 가장 중요한 화두이고, 이 소설에서도 두 연인은 이런저런 사건들을 거치고 결국 결혼에 골인하죠. 그래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
사실 수많은 연애 소설들에서 결론 그 자체는 새롭지 않을 겁니다. 독자들은 두 연인이 사랑하고 결혼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예 그걸 읽기 위해 독자들은 연애 소설을 집어들지 모릅니다. 수많은 인터넷 연애 소설들은 아예 그런 취향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인터넷 연재 소설들은 실시간입니다. 독자들은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작가들은 독자들의 의견들을 반영하고, 소설 내용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인터넷 연애 소설들을 읽을 때, 독자들은 두 연인이 분홍 색깔 봄바람을 풀풀 풍기기 바랍니다. 만약 작가가 두 연인을 갈라놓는다면, 독자들은 그걸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작가가 뭔가 독창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해도, 인터넷 연애 소설들에서 결국 두 연인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해야 합니다. 그걸 읽기 위해, 그런 진부한 결론을 읽기 위해 독자들은 인터넷 연애 소설들을 찾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연애 소설 작가들은 말합니다.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연애 소설은 없습니다. 독자들은 진부한 결론을 바랍니다. 두 연인이 사랑하고 결혼한다면, 그건 진부한 결론이 되겠으나, 그런 진부한 결론을 읽기 위해, 독자들은 구태여 인터넷 연애 소설들을 뒤적입니다. 인터넷 연애 소설들 이외에 통상적인 연애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달달한 분위기와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없다면, 왜 독자들이 연애 소설들을 읽겠어요.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결론은 없습니다. 두 연인이 아쉽게 헤어지는 연애 소설들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연애 소설들에서 두 연인은 사랑을 확인해야 합니다. 결혼은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그래서 두 연인은 결혼합니다. 어쩌면 수많은 연애 소설 작가들은 익숙하고 진부한 결론이 최고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해답은 이미 존재합니다. 연애 소설을 쓰기 전부터, 연애 소설을 읽기 전부터, 작가와 독자는 두 연인이 서로 사랑을 확인하거나 결혼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결론이 이미 존재함에도,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습니다. 결국 작가와 독자 모두 진부한 것을 원하기 때문에. 두 연인이 진부하게 사랑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결론이 없기 때문에.
사실 전문적인 문학 평론가들 역시 이런 문구를 읊조립니다. 새로운 문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문학은 없습니다. 심지어 일부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은 독창적이고 새로운 문학을 경멸합니다. 어떤 작가들은 독창적인 문구나 형식을 시도했으나, 그건 작위적인 헛수고가 됩니다. 그런 작위적인 헛수고보다 익숙하고 안전한 결론은 훨씬 나을지 모릅니다. 특히, 인터넷 소설들처럼 가벼움을 추구하는 소설들은 훨씬 익숙한 결론을 선호하겠죠.
하지만 여기에서 작가들이나 문학 평론가들은 한 가지 사실을 놓칩니다. 결론은 진부할지 모르나, 결론을 바라보는 시선은 진부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관점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관점들에서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다양한 관점들 때문에 사람들은 다양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대항해 시대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누구나 대항해 시대를 압니다. 대항해 시대를 바라볼 때, 사람들은 유럽 백인들이 범선들을 이용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이건 통상적인 이야기입니다. 다들 대항해 시대가 이런 기나긴 범선 항해라고 말하죠.
하지만 우리가 관점을 돌린다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대항해 시대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대항해 시대는 유럽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유럽 백인들이 항해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대항해 시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메리카 사람들은 항해하지 않았습니다. 아메리카 사람들은 수탈을 당했습니다. 아메리카 사람들은 아주 끔찍하게 수탈을 당했습니다. 유럽 관점에서 17세기 장거리 항해는 대항해 시대일 겁니다. 하지만 아메리카 관점에서 이건 아주 끔찍한 식민지 수탈입니다. 대항해 시대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똑같이 하나의 사건을 바라볼 때, 누군가는 장대한 탐험 항해를 이야기할 수 있고, 누군가는 아주 끔찍한 수탈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건이 하나라고 해도, 관점들이 다르기 때문에.
연애 소설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연애 소설 작가들은 페미니즘을 압니다. 고전 <춘향전>이 나왔을 때, 조선에는 페미니즘이 없었습니다. 춘향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몰랐을 겁니다. 어떻게 춘향이 19세기 유럽 사상 페미니즘을 알겠어요. 하지만 20세기 연애 소설 작가들은 페미니즘을 연애 소설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때 두 연인이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한다고 해도, 그건 색다른 관점을 보여주겠죠. 결론이 진부하다고 해도, 관점은 다릅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건 새로운 이야기가 됩니다. 독자는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소설은 그저 주인공이 결론을 향해 신나게 달리는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소설은 색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건 사건이나 배경이나 등장인물이나 줄거리보다 훨씬 중요할지 모릅니다. 19세기 이전에도 연애 소설들은 많았고, 두 연인은 사랑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연애 소설들은 페미니즘을 몰랐어요. 설사 여자가 주체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해도, 그런 연애 소설들은 그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연애 소설들은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건 아주 커다란 차이입니다.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결론은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관점은 존재합니다.
새로운 관점은 존재합니다. 사실 관점들은 계속 바뀝니다. 관점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하늘, 신을 두려워했습니다. 20세기 사람들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은 아주 넓게 퍼졌습니다. 19세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천박한 계층이 고귀한 계층을 떠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세기 사람들은 (형식적이나마) 그런 사상을 거부합니다. 게다가 일부 사람들은 그걸 완전히 거부하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심지어 자신들의 목숨조차 바칩니다. 이런 평등한 사상이 늘어난다면, 세상은 훨씬 좋아지겠죠. 그런 평등한 세상에서 두 연인이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에 골인한다면, 그건 아주 다른 관점을 보여줄 겁니다. <춘향전>처럼, 그런 이야기 속에서 두 연인은 진부한 결론에 다다르겠으나, 관점은 완전히 다를 겁니다.
사실 <춘향전> 이후에 신소설이나 프로 문학이 나오는 이유는 관점들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그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관점들은 절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변화는 소설에 영향을 미치고, 연애 소설에서 두 연인 역시 새로운 관점을 드러낼 수 있죠. 하지만 여러 작가들이나 문학 평론가들은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건 꽤나 이상합니다. 분명히 관점들이 엄청나게 바뀌었음에도, 심지어 그런 관점들이 급진적인 혁명을 일으킴에도, 왜 작가들이나 문학 평론가들은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할까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세상은 고정적이다. 이건 형이상학적인 시각이죠. 사실 지배 계급들은 이런 형이상학적이고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시각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지배 계급들은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뀐다면, 급진적인 혁명이 터진다면, 지배 계급들은 권력을 잃을 겁니다. 그래서 지배 계급들은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계속 퍼뜨립니다. 학교 교육들, 언론 매체들, 문화 예술들은 그런 관념을 재생산합니다. 그래서 소설 작가들이나 문학 평론가들 역시 새로운 소설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이건 새로운 문학을 거부하는 평론이 무조건 지배적인 관념에 복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고정적이라는 사고 방식과 새로운 문학 형식이 없다는 평론은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정말 형이상학적인 시각이나, 후자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문학 사조를 고려한다면, 평론가들은 새로운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가할 수 있어요. 하지만 분명히 관점들은 바뀌고, 그것들은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장르를 낳습니다. 문학 사조를 고려한다고 해도, 문학 평론가들은 그것을 완전히 부인하지 못하겠죠. 그리고 여러 장르들 중에서 SF 장르는 새로운 문학 형식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그 자체로서 SF 소설들은 형이상학적인 관점을 거부합니다. SF 소설들은 19세기 근대적인 진보에서 비롯했습니다. 19세기 근대적인 진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SF 소설들은 나타나지 못했을 겁니다. SF 소설들에서 등장인물들은 진보, 기계, 평등, 혁명, 이성, 과학, 진화를 이야기합니다. 19세기 이전 사람들은 절대 이것들을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춘향이와 이몽룡이 기계나 혁명이나 진화를 말할 수 있었겠어요. 소설 줄거리들은 비슷할지 모릅니다. 소설 결론들은 비슷할지 모릅니다. <춘향전>과 <노인의 전쟁>에서 두 연인은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에 골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춘향전>은 진보, 기계, 평등, 혁명, 이성, 과학, 진화를 절대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노인의 전쟁>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상 없이 SF 소설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서 SF 소설들은 세상이 고정적이라는 편견을 거부합니다. 물론 SF 작가들 역시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세상을 전복함에도 숱한 SF 작가들은 엉뚱한 결론을 내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숱한 작가들이 엉뚱한 결론을 내린다고 해도, 사실은 사실입니다. 관점들은 계속 바뀌고, 그런 관점들은 소설들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SF 작가들이 그걸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SF 소설들은 살아있는 증인입니다. 앞으로 당분간, 적어도 몇 백 년 동안 SF 소설들은 계속 그걸 증명할 겁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뭐라고 주절거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