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왜 SF 소설은 발상의 문학이 되는가 본문
흔히 사람들은 SF 소설이 '발상의 문학'이라고 말합니다. SF 소설은 발상, 아이디어 문학입니다. 이건 독창성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SF 소설들을 평가할 때, 종종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얼마나 작가들이 독창성을 발휘했는지 따집니다. 작가 지망생들은 자신들이 누구도 쓰지 않은 아주 독창적인 설정들을 펼칠 거라고 기대하죠. 사실 그런 설정들은 짜집기들이 될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그런 설정들은 독창적이지 못하고 그저 이것저것을 조합한 결과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조합 역시 독창성이 될 수 있으나, 흔히 사람들은 이런 조합을 독창성이라고 간주하지 않아요. 뭔가가 독창적일 때,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것이 새로워야 한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작가 지망생이 정말 독창적인 설정을 고안했다고 해도, 그게 무조건 좋은 이야기가 될까요. 아쉽게도 독창적인 설정과 좋은 이야기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설정이 독창적이라고 해도, 작가가 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건 좋은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은 오직 설정에만 주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성격 묘사나 내면 심리, 등장인물 관계, 현실과 부조리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어떤 관점에서 소설 창작은 꽤나 골치가 아프고 까다로운 행위입니다.
왜 소설 작가들이 이렇게 골치가 아프고 까다로운 행위를 좋아할까요. 그들이 자신들을 정신적으로 고문하기 원할까요. 그건 그렇지 않겠죠. 소설 작가들은 현실을 창조하고 싶을 겁니다. 소설 작가들은 현실에서 특정한 부분을 떼어내고 그걸 창조하고 가공하기 원하겠죠. 그렇게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고, 작가는 소설 속의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신은 전지전능해야 합니다. 적어도 창조신은 세계를 폭넓게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소설 창작은 재미있는 동시에 괴롭습니다. 작가가 등장인물 관계나 내면 심리를 잘못 서술한다면,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그걸 호되게 지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SF 소설들은 이런 지적에서 좀 더 자유로울지 모릅니다. SF 소설이 발상의 문학이기 때문에, 발상이 신선하다면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호평할지 모릅니다. 사실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랜드 마스터들조차 이런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아요. 독자들은 아이작 아시모프가 내면 심리를 아주 탁월하게 묘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작 아시모프는 독창적이고 신선한 관점들을 제시하고, 독자들은 거기에 열광합니다. 아무리 <스타십 트루퍼스>가 유치한 설교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전투 강화복이 있기 때문에, <스타십 트루퍼스>는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수 있겠죠.
오직 전투 강화복 하나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스타십 트루퍼스>가 길이길이 빛나는 SF 소설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례들처럼 SF 소설들은 신선하고 독창적인 발상을 이용해 호평들을 끌어모을 수 있습니다. 왜 SF 소설들이 발상의 문학이 되었을까요. 왜 SF 작가들과 독자들과 평론가들이 발상을 중시할까요. 어쩌면 19세기 유럽 격동기에서 SF 소설이 태어났기 때문에 SF 소설은 발상의 문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여러 게시글들이 설명한 것처럼, 19세기 유럽은 격동기였습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뒤집었기 때문에 19세기 유럽은 수많은 사상들을 쏟아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온갖 혁명들은 일상 다반사였고, 새로운 사상들은 새로운 사회들을 만드느라 애썼습니다. 어떤 사상가는 숱한 책들을 썼습니다. 하지만 혁명들이 일상 다반사라면, 사상가가 책상 앞에 붙어있을 수 있겠습니까? 미하일 바쿠닌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는 혁명들을 쫓아다니느라 바빴고, 책들을 쓸 시간은 거의 없었죠. 이렇게 19세기 유럽에서 혁명들은 드물지 않았습니다. 비단 사회적인 혁명만 아니라 진화 이론이나 전기 장치처럼, 과학적인 혁명들 역시 드물지 않았습니다. 혁명은 새로운 것입니다. 혁명은 기존의 것을 뒤집고 새로운 것을 만들죠. 새로운 것들이 팍팍 튀어나오는 동안 SF 소설들은 탄생했습니다.
따라서 태생적으로 SF 소설들은 혁명적인 것, 새로운 것, 전복적인 것과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19세기 SF 작가들이 이런 사회적이고 과학적인 분위기에서 완전히 동떨어졌을까요? 그건 그렇지 않을 겁니다. SF 작가들 역시 이런 사회적이고 과학적인 분위기를 겪었고 이걸 SF 소설들에 반영했습니다. 그래서 SF 소설은 독창적인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전투 강화복처럼 독창적인 것을 선보일 때, SF 소설은 커다란 호평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19세기 유럽에서 SF 장르 이외에 다른 소설들 역시 탄생했습니다. 그런 소설들 역시 세계가 새로워지는 과정을 목격했죠.
하지만 그런 소설들은 그저 목격했을 뿐입니다. 목격은 전망으로 이어지지 않았어요. 하지만 SF 소설들은 목격을 전망으로 연결했습니다. 사회가 바뀌고 과학이 바뀔 때, SF 소설들은 미래 역시 바뀔 거라고 전망했어요. 미래는 새롭게 바뀔 테고, 따라서 SF 소설은 새로움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전투 강화복처럼, SF 소설들은 새로운 것을 선호합니다. 기존의 것, 인간 중심주의, 절대적인 신, 평범한 중산층 가족, 유일한 생명의 요람 지구. SF 소설들은 이런 것들을 신나게 날려버립니다. 수많은 문학들 중에서 SF 소설들은 가장 독창성을 갈구하는지 모릅니다. 독창성이 아기 SF 소설에게 밥줄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정말 독창적인 것이 존재할까요. 독창적이고 새로운 것이 무조건 좋을까요. 사실 19세기 전까지, 심지어 19세기 유럽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작가들은 독창적이고 새로운 문학을 경멸했습니다. 새로운 도덕은 없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문학은 없습니다. 신은 인류에게 여러 계명들을 선사했고, 그건 기나긴 전통을 자랑합니다. 아무리 19세기에 진화 이론이나 공산주의가 번쩍 등장했다고 해도, 감히 진화 이론과 공산주의가 기나긴 전통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중세 1000년 동안 인류는 신의 계명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고작 100년조차 되지 않은 진화 이론과 공산주의가 감히 신의 계명들에 도전할 수 있나요.
이건 웃기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독창적이고 새로운 문학을 경멸했습니다. 아무리 기이한 동식물들을 연구했다고 해도, 천재 하나는 세계를 뒤집지 못합니다. 설사 수많은 과학자들이 점진적으로 진화 이론에 기여했다고 해도, 진화 이론은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이건 불경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진화나 혁명이 없었습니다. 예술은 독창성을 경멸해야 합니다. 예술은 전통을 생생하게 다듬어야 합니다. 이렇게 작가들과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독창성을 경멸할 수 있죠.
설사 이런 고전적인 사고 방식에 기대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독창성을 폄훼할지 모릅니다. 전투 강화복? 이건 갑옷의 일종입니다. 이건 아주 진보된 갑옷입니다. 갑옷은 새롭지 않아요. 아무리 진보했다고 해도, 전투 강화복은 갑옷이고, 갑옷은 새롭지 않습니다. 구태여 <아이반호>를 읽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갑옷이 새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겁니다. 이렇게 누군가는 독창성이 독창적이지 않다고 공격할지 모르죠. 물론 SF 소설들은 신나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아이반호>에는 절대 진보나 과학이나 우주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반호>와 <스타십 트루퍼스>가 똑같이 갑옷을 말한다고 해도, <스타십 트루퍼스>는 진보나 과학이나 우주를 말할 수 있어요. <아이반호>는 절대 그렇지 않죠.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스타십 트루퍼스> 역시 진보보다 전통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스타십 트루퍼스>는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이미 19세기 사상들이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비판했음에도, <스타십 트루퍼스>는 그런 사실을 외면하고 지배 계급을 옹호하죠. 전투 강화복이 독창적이라고 해도, <스타십 트루퍼스>는 아주 낡은 관념을 드러내는지 모릅니다. 고작 장비 하나 때문에 소설이 독창적이라면, 그건 소설을 모독하는 행위일지 모르죠.
이렇게 독자들은 독창성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SF 소설들을 읽을 때, 독자들은 무엇이 독창적인지 이리저리 해석할 수 있어요. SF 소설이 정말 발상의 문학이라면, SF 독자들은 물을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정말 무엇이 독창적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