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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들과 시간적인 격차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SF 소설들과 시간적인 격차

OneTiger 2018. 10. 22. 17:26

오늘날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꽤나 능숙하게 스마트폰을 조작합니다. 심지어 6살짜리 아이조차 음성 검색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거나 스마트폰과 거실 네트워크를 연결하거나 인공 지능들을 품평하죠. 어른들은, 특히, 노인들은 이런 모습에 많이 놀랄 겁니다. 노인들은 스마트폰이나 거실 네트워크나 인공 지능에 익숙하지 않죠. 노인들이 쩔쩔매며 검색창에 글자들을 두드릴 때,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음성 검색합니다. 노인들은 아이들을 놀란 시선으로 쳐다보겠죠. 심지어 어떤 노인들은 '종자가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이들이 정말 새로운 생물종이라는 뜻이 아니겠죠. 이건 그렇게 세상이 바뀌고 사람들 역시 바뀐다는 뜻이겠죠. 현재 세대들은 강력한 인공 지능이 무슨 모습일지 기대하거나 걱정하는 중이나, 나중에 아이들은 그런 인공 지능에 아무렇지 않게 적응할지 모릅니다. 현재 세대는 강력한 인공 지능이 나타나는 과정을 봐야 합니다. 현재 세대는 그런 과도기를 겪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아요. 아이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게 이미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나 노인들은 스마트폰이 나타나는 과정을 지켜봤고 과도기를 겪었습니다. 그들은 스티븐 잡스가 프레젠테이션을 발표하는 장면이나 아이폰이 나타나는 충격을 지켜봤습니다. 어른들이나 노인들은 스마트폰이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아요. 어른들이나 노인들은 그게 세상에 나타나는 장면을 지켜봤어요. 반면, 아이들은 그걸 본 적이 없습니다. 스마트폰은 아이들보다 먼저 나타났고, 그래서 아이들은 그게 당연히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은 너무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걸 의심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왜 스마트폰이 나타났는지 묻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스마트폰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게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거기에 의문을 품지 않죠.


어른들이나 노인들은 말할 겁니다. "얘들아, 사실 내가 어렸을 때, 스마트폰은 존재하지 않았어. 이건 굉장히 신기한 장비야." 하지만 아이들은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죠. 아이들이 좀 더 크고 머리가 굵어진다면, 아이들은 그걸 이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당장 스마트폰이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겠죠. 관점을 확대한다면,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꽤나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공기를 호흡합니다. 공기를 호흡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목숨을 잃겠죠. 하지만 우리는 공기를 의심하지 않아요.



지구가 처음 나타났을 때, 지구는 꽤나 달랐습니다. 만약 미생물들이 열심히 산소를 조성하고 대기를 두르지 않았다면, 인간처럼 산소를 호흡하는 동물은 나타나지 못했겠죠. 하지만 평소에 그걸 의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공기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얼마든지 호흡할 수 있습니다. 그걸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걸 의심한다면, 공기가 달아나거나 없어지나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따라서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선을 과거로 돌린다면, 지구가 태어나는 순간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엄청난 격차를 발견하고 전율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죠. 아이들을 바라보는 동안 어른들이 격차를 느끼는 것처럼, 초기 지구를 바라볼 때, 우리는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현실은 당연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솟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어떤 변화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무지하다고 느낍니다. 왜 생명 현상이 발생할까요? 정말 생명체가 우주에서 날아왔을까요? 어쩌면 지구에서 화성 생명체들은 생명의 씨앗들을 뿌렸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걸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격차가 있다고 느낄 수 있죠.



종종 문학은 이런 격차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은 시대가 바뀐다고 느끼고 격차를 발견합니다. 그건 슬픔이나 충격이나 아쉬움이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문학은 그런 감성들을 표현합니다. 문학 속에서 격차를 발견한 이후 사람들은 울고 웃고 감탄하고 떠들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SF 소설들은 여기에 주목합니다. SF 소설들은 격차에 주목합니다. 세상은 바뀌고, 사람들은 격차를 발견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이런 격차는 꽤나 비일상적인 변화로 도약합니다. 심지어 인류 문명은 멸망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새로운 지적 존재는 인간들을 밀어낼 수 있습니다. 그때 인간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되돌아보고 슬퍼하거나 충격을 받거나 아쉬워하거나 웃을 수 있겠죠.


이건 독자들이 SF 소설들을 읽는 주된 이유일 겁니다. SF 소설들을 읽을 때, 독자들은 인식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습니다. 아주 커다란 격차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커다란 격차처럼 인식의 지평선은 커다랗게 넓어집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노인들이 스마트폰을 어색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격차를 어설프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SF 소설들이 부담스럽다고 느낄지 모르죠. 하지만 결국 세상이 바뀌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인정하고 SF 소설들을 좀 더 호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스마트폰이나 대기 조성이나 생명의 씨앗은 자연 과학적인 영역입니다. SF 소설들은 이런 자연 과학에 많이 주목하죠. 하지만 변화는 오직 자연 과학에만 있지 않습니다. 사회 과학 역시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연 과학보다 사회 과학에 훨씬 둔감할지 모릅니다. 자연 과학에는 지배 계급이 없으나, 사회 과학에는 지배 계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배 계급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을 퍼뜨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격차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죠. 가령, 흔히 우리는 소비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는 소비 행위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생산 과정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이건 꽤나 이상하고 피상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생산 없이 소비가 존재할 수 있나요? 이건 우주에서 공기를 호흡한다는 발상과 비슷합니다. 생산이 있기 때문에 소비는 존재할 수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생산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게 지배적인 자본가 계급에게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산에 함께 참여하는 순간, 자본가 계급은 권력을 잃을 테고 자본주의는 무너질 겁니다. 그래서 피지배 계급은 소비에 주목합니다. 지배 계급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하지만 우리가 이런 피상적인 사고 방식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격차를 느끼지 못할 겁니다. 이게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에.



자연 과학에서 격차를 느끼는 것처럼, 사회 과학에서 격차를 느끼고 싶다면, 우리는 피상적인 사고 방식을 깨야 할 겁니다. 어떻게 사회 구조가 바뀌었는지 근본적으로 파악할 때, 우리는 격차를 느낄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소비 자본주의를 믿는다면, 우리가 생산 없이 소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망상에 빠질 테고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겠죠. 우리는 격차를 느끼지 못하겠죠. 심지어 SF 작가들조차 그런 망상에 빠지고 제대로 격차를 포착하지 못합니다. 이건 꽤나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SF 작가들은 격차를 훨씬 제대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쉽지 않다고 해도, SF 소설들은 그런 길을 갈 수 있어야 할 겁니다. SF 소설들은 그런 길을 갈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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