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다섯 번째 계절 (31)
SF 생태주의
"나는 이것을 느끼지 않아." 예술 평론에서 이 문구는 심각한 걸림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 작품들이 감동적이라고 느낍니다. 예술 작품들이 감동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술 작품들을 만들고 예술 작품들을 사랑합니다. 감동은 느낌입니다. 느낌은 주관적입니다. 느낌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똑같이 느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다양한 것처럼, 느낌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느낌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느낌들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들이 똑같은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똑같이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감동적이라고 느낍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흥미롭다고 느낍니다. 소설은 흥미로우나, 이 흥미는 감동으로 승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재미없다고 느낍니다..
"음하하, 나는 골수 SF 독자야.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전복적이야. 판타지는 낡은 골동품이고, 사이언스 픽션은 첨단 혁명이야. 그래서 나는 훨씬 전복적인 독자야." 만약 이렇게 어떤 SF 소설 독자가 자화자찬한다면, 이 자화자찬은 틀리지 않을 겁니다. 이 소설 독자처럼, SF 작가들과 평론가들과 다른 독자들은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훨씬 전복적이라고 말합니다. 데이빗 브린은 이 자화자찬에 동의할 겁니다. 왜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전복적인가요? 혁명 시대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메리 셸리와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는 초기 SF 작가들입니다. 메리 셸리와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는 19세기 서구에 속합니다. 19세기 서구는 근대화를 거치는 중이었습니다. 에서 카를 마르크스..
이 동영상(링크)은 YouTube 동영상입니다. 이 채널에서 우동이즘 작가는 웹툰을 위한 짤막한 작법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국내 웹툰 문화에서 SF 장르는 비주류입니다. 비단 웹툰만 아니라 웹소설 문화에서도 SF 장르는 비주류입니다. 만약 초보 작가가 SF 장르를 시도한다면, 기성 작가들은 이 초보 작가를 말릴 겁니다. 몇몇 SF 웹소설, 웹툰은 커다란 인기를 끌었으나, 이건 예외 사례입니다. 그 자체로서 로맨스 판타지 같은 장르는 커다란 인기를 누리나, SF 그 자체는 인기를 누리지 못합니다. 만약 작가가 이것을 시도한다면, 작가는 비주류를 각오해야 합니다. 왜 국내 (웹소설/웹툰) 문화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인기를 끌지 못하나요? 위 동영상에서 우동이즘 작가는 세 가지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
[평론가는 소설이 무인도가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우주 개척 게임 역시 마찬가지인지 모릅니다.] "엘리자베스 비숍은 를 썼어. 이건 아주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문학이야." 만약 엘리자베스 비숍이 이 호평을 듣는다면, 엘리자베스 비숍은 기분이 좋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문학 작가들은 독자들이 문학을 감동적으로 읽기 원합니다. 만약 독자들이 문학을 읽고,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한다면, 문학 작가들은 문학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독자들이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문학 평론가는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평론가에게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평론가는 문학을 읽고, 희노애락을 넘어서고, 근본적인 뭔가를 찾습니다. 여기에서 '연관성'은 근본적인 뭔가가 될 수 있습니다. 평..
[현실에서 외계 해양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게임 플레이어가 이 장면을 보고 감동하나요?] 현진건은 을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얼마나 일본 제국에서 조선 하층민들이 처참하게 살아가는지 고발합니다. 운수가 좋다는 제목과 달리, 이 단편 소설은 비극입니다. 소설 주인공 김첨지는 작은 행운을 만나고 운수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설 시점은 이게 행운이 아니라고 암시합니다. 김첨지는 뭔가가 불안하다고 느끼고, 소설이 결말로 향하는 동안, 점차 긴장감은 커집니다. 결국 커다란 긴장감 속에서 김첨지는 비극에 부딪힙니다. 행운은 행운이 아니었고, 김첨치는 소리칩니다.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작은 행운은 너무 커다란 비극으로 몰락합니다. 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은 이런 맞물림입니다. 이 단..
[중생대 공룡과 홀로세 늑대는 다릅니다. 하지만 양쪽은 똑같은 조건, 지구 생물 다양성에 기반합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샌드 박스이고, 다른 하나는 오픈 월드입니다. 샌드 박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생태계를 직접 조성합니다. 화가가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채우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빈 땅에 식물상과 동물상(과 미생물상)을 채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비단 생물종들을 채울 뿐만 아니라 지형을 바꿉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언덕을 높이거나, 갯벌을 만들거나, 해안을 늘릴 수 있습니다. 많은 샌드 박스 생태계 게임들은 '테라포밍' 능력을 포함합니다. 이런 사례는 테라포밍이라는 개념이 생물 다양성, 자연 생태계를 포함한다고 증명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유명한 테라포밍..
[옵티머스 프라임과 싸움박질은 SF 장르의 전부가 아닙니다. SF 장르는 사변 문학을 포함합니다.] 이른바 초식계, 초식남(草食系, 草食男)은 온순한 남자를 가리킵니다. 왜 초식계가 온순한 남자를 가리키나요? 초식동물이 온순하기 때문입니다. 토끼는 초식동물입니다. 토끼는 온순합니다. 아무리 토끼가 성깔을 부린다고 해도, 인간보다 토끼는 온순하고 연약합니다. 인간은 토끼를 쉽게 제압합니다. 반면, 사자는 육식동물입니다. 사자는 사납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성깔을 부린다고 해도, 사자보다 인간은 온순하고 연약합니다. 사자는 인간을 쉽게 제압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토끼는 초식동물이나, 토끼는 초식동물의 전부가 아닙니다. 육식동물 사자는 육식동물의 전부가 아닙니다. 물방개는 육식동물입니다. 하지만 토끼보다 물..
전통적으로 여러 문학들에서 고아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거나 문학 주인공 배경이 됩니다. 소설 는 대표적입니다. 이 소설에서 고아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이 소설이 고아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쌍한 올리버가 스프 한 그릇을 부탁할 때, 독자들은 비참한 고아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소설 에서 고아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이 소설이 고아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소설 분위기가 아주 밝다고 해도, 제루샤 애벗이 고아원 출신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불쌍한 고아원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소설 에서 고아원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이 소설에서 고아원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오목이 고아원에 속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비참한 고아원 분위기를 연상할 ..
[대체 진화 역사는 SF 장르에 속합니다. 왜 SF 장르가 비일상적으로 상상하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엄마와 아빠, 두 아들은 우주선을 타고 머나먼 탐사를 떠납니다. 그들은 여러 외계 행성들을 방문하고 외계 생태계들을 조사합니다. 아니면 지구에서 인류는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전면 핵 전쟁 때문에, 인류 문명은 중세로 후퇴했고, 사람들은 우주선은 고사하고 인공 위성조차 꿈꾸지 못합니다. 비록 전면 핵 전쟁이 인류 문명을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빈부 격차를 강화할 테고, 미래 메트로폴리스는 극단적인 빈익빈 부익부가 될 겁니다. 유사 중세 문명처럼, 미래 자본주의 메트로폴리스는 너무 우울합니다. 다행히 세계화 자본주의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인류 문명은 사회주의 혁명을 ..
※ 이 게시글은 빅터 라발이 쓴 소설 의 치명적인 결말 누설을 포함합니다. [인류 혐오와 허무주의는 지배 관념에 편승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왜 오직 크툴루만 조명을 받나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비극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류 문명이 무너졌다고 이야기하고, 이건 너무 비극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류 문명이 무너졌다고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인류 그 자체를 혐오한다고 해도, 인류 혐오자들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비극이라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수구 꼴통들이라고 해도, 수구 꼴통들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비극이라고 간주할 겁니다. 인류 문명은 무너졌고, 이건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비극이라고 해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분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