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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썸 탈거야>와 주관적인 가치 판단 본문

감상, 분류, 규정/기타

<썸 탈거야>와 주관적인 가치 판단

OneTiger 2021. 8. 1. 20:00

"나는 이것을 느끼지 않아." 예술 평론에서 이 문구는 심각한 걸림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 작품들이 감동적이라고 느낍니다. 예술 작품들이 감동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술 작품들을 만들고 예술 작품들을 사랑합니다. 감동은 느낌입니다. 느낌은 주관적입니다. 느낌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똑같이 느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다양한 것처럼, 느낌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느낌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느낌들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들이 똑같은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똑같이 느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감동적이라고 느낍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흥미롭다고 느낍니다. 소설은 흥미로우나, 이 흥미는 감동으로 승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재미없다고 느낍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소설이 너무 지루하고 난해하다고 느낍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소설이 흥미롭다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아니, 뭐야? 이 소설은 흥미롭지 않아. 나는 흥미를 느끼지 않아." 어떤 사람들에게 소설은 흥미로우나, 다른 사람들에게 소설은 재미없고, 의견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갈등과 대립으로 이어집니다. 갈등과 대립이 나타나기 때문에, 예술 평론은 반박에 부딪혀야 합니다.



만약 평론가가 왜 소설이 재미있는지 설명한다면, 어떤 독자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아니, 나는 소설이 재미있다고 느끼지 않아." 이 독자들이 재미를 느끼지 않기 때문에, 이 독자들은 평론가에게 반박합니다. 재미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이 독자들은 평론가에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술 작품이 감동적이라고 해도, 감동이 느낌이고, 느낌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예술 평론은 반박에 부딪힙니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느끼지 않기 때문에, 반박에서 예술 평론은 절대 벗어나지 못할지 모릅니다. 많은 예술 평론들은 주관적인 반박 가능성("나는 이것을 느끼지 않아.")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테티스와 펠레우스는 결혼합니다. 많은 신들은 이 결혼식에 참가합니다. 하지만 테티스와 펠레우스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에리스는 화가 났습니다. 에리스는 결혼식에 난입하고 황금 사과를 내놓습니다. 이 황금 사과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위한 선물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아름다움은 느낌입니다. 감동이 느낌인 것처럼, 아름다움은 느낌입니다. 아름다움이 느낌이기 때문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객관적으로 규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할 겁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누가 아름다운지 합의하지 못합니다. 만약 헤라가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한다면, 아테나와 아프로디테는 반박할 겁니다. "어떻게 헤라가 가장 아름다울 수 있지? 나는 이것을 느끼지 않아." 만약 아프로디테가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한다면, 헤라와 아테나는 반박할 겁니다. "어떻게 아프로디테가 가장 아름다울 수 있지? 나는 이것을 느끼지 않아." 아름다움이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 평가(누가 가장 아름다운가)는 주관적인 반박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반박에서 이 평가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름다움은 주관적인 가치 판단입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보다 주관적인 가치 판단입니다. 헤라와 아테나와 아프로디테가 다른 가치들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 가치 판단들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가치 판단과 달리, 사실은 객관적입니다. 디오니소스는 남신입니다. 헤라와 아테나와 아프로디테는 이것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만약 디오니소스가 황금 사과를 갖기 원한다면, 세 여신들은 객관적으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디오니소스는 남신이야. 남신은 황금 사과를 갖지 못해!" 만약 아폴론이 황금 사과를 갖기 원한다면, 세 여신들은 아폴론이 여신보다 남신이라고 객관적으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아폴론은 남신이고,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아니, 뭐야? 어떻게 아폴론이 남신일 수 있지? 나는 이것을 느끼지 않아." 이 반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만약 크레토스가 황금 사과를 갖기 원한다면, 세 여신들은 객관적으로 반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크레토스는 결혼식을 때려부술지 모릅니다.) 세 여신들이 크레토스가 남신이라고 객관적으로 합의하는 것처럼, 주관적인 가치 판단들은 아주 다양하나, 아무도 객관적인 사실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모두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두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가치 판단보다 객관적인 사실은 중요합니다.

만약 어떤 SF 소설이 아주 거~대한 개척 우주선과 아주 거~대한 바이오 돔을 묘사한다면, 이 소설은 생물 다양성, 자연 생태계, 지구 생물권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에서 울창한 열대 밀림이 번성하기 때문에, 열대 밀림 속에서 수마트라 호랑이는 어슬렁거립니다. 우주선 환경 사회학자는 수마트라 호랑이를 관찰하고 자연 생태계를 논의합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인류 문명이 살아가기 때문에, 자연 환경이 원초적이고 근본적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주제를 표현합니다. 분명히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역시 동의해야 합니다.)



이 소설은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주제(생물권)를 표현합니다. (크레토스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이 객관적인 사실에 동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과 주관적인 가치 판단은 다릅니다. 이 소설이 근본적이기 때문에, 이 소설이 재미있나요? 재미는 가치 판단입니다. 재미가 가치 판단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소설이 재미있지 않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아프로디테는 이 소설이 재미있지 않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아, 그래. 이 SF 소설은 근본적인 주제, 생물권을 논의해. 나는 이 소설이 근본적이라고 인정해. 하지만 나는 이게 재미있다고 느끼지 않아. 나는 재미를 느끼지 않아."

모두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가치 판단보다 객관적인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주관적인 가치 판단보다 객관적인 사실을 중시합니다. 그들이 뭔가를 주장할 때, 그들은 주관적인 가치 판단보다 객관적인 사실에게 기반합니다. 그들이 객관적인 사실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주장들이 객관적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팩트'를 중시합니다. 객관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팩트'에게 기반합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관적인 느낌, 가치 판단을 말하기보다 객관적인 사실, 팩트를 말해야 합니다.



주관적인 판단들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치 판단에 관해 침묵해야 합니다. 반면, 모두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객관적인 사실, 팩트를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논리 철학 논고>들을 주장합니다. '팩트'가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팩트'를 중시하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논리 철학 논고>들은 지배적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객관적인 사실을 중시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오직 객관적인 사실만 말할 수 있나요? 만약 사람들이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다면, 그 자체로서 이게 객관적인 발언인가요?

 

노라 제미신은 휴고상들을 세 번 받았습니다. 노라 제미신은 휴고상들을 연이어 받았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분명히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모두 이 객관적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남한 사람이 이 사실을 인식하나요? 모든 남한 사람이 노라 제미신이 휴고상들을 세 번, 연이어 받았다고 인식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노라 제미신은 <다섯 번째 계절>을 썼습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분명히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모두 이것을 인정합니다. 모든 남한 사람은 이 사실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남한 사람이 이 사실을 인식하나요? 모든 남한 사람이 노라 제미신이 <다섯 번째 계절>을 썼다고 인식하나요? 모든 남한 사람이 <다섯 번째 계절>을 읽나요? 그건 아닙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다섯 번째 계절>을 읽지 않습니다. 심지어 많은 남한 사람들은 노라 제미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왜 많은 남한 사람들이 노라 제미신을 알지 못하나요? 그들이 사이언스 판타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SF 독자들이 이 장르를 좋아하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노라 제미신이 <다섯 번째 계절>을 썼다고 인식하고 이 소설을 읽으나, 이건 가치 판단에 속합니다.

 

"SF 소설은 재미있어." 재미는 가치 판단입니다. SF 독자들이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섯 번째 계절>을 읽습니다. 다른 많은 남한 사람들은 SF 소설을 아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치를 판단하고 <다섯 번째 계절>을 읽지 않습니다. SF 독자들과 다른 많은 남한 사람들이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노라 제미신을 인식하고, 다른 많은 남한 사람들은 노라 제미신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이 노라 제미신과 <다섯 번째 계절>을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어떤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해도, 이 사실은 필연적인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어떤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해도, 이건 객관적인 사실이 필연적인 인식으로 이어진다고 보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볼빨간사춘기는 <썸 탈거야>를 불렀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분명히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SF 독자들은 이 객관적인 사실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SF 독자들은 볼빨간사춘기가 <썸 탈거야>를 불렀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SF 독자가 이 사실을 인식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이게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해도, SF 독자들은 이것을 필연적으로 인식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SF 독자들이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이 소설과 달리, <썸 탈거야>는 사이언스 판타지가 아닙니다. 비록 장르 분류가 고정적이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다고 해도, 비록 장르 분류가 유동적인 논의 그 자체라고 해도, <썸 탈거야>는 SF 장르 규칙을 충족하지 않습니다. <썸 탈거야>가 사이언스 판타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SF 독자들은 이 노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볼빨간사춘기가 <썸 탈거야>를 불렀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 SF 독자들과 달리, 많은 남한 사람들은 이것을 인식합니다. 그들이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보다 대중적이고 달달한 가요에게 가치를 부여합니다. <썸 탈거야>는 대중적이고 달달한 가요입니다. 그래서 많은 남한 사람들은 볼빨간사춘기가 <썸 탈거야>를 불렀다고 인식합니다. "노라 제미신은 <다섯 번째 계절>을 썼다."와 "볼빨간사춘기는 <썸 탈거야>를 불렀다."는 똑같은 객관적인 사실이나, 많은 남한 사람들은 전자보다 후자를 인식합니다. 아무리 두 가지가 똑같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해도, 많은 남한 사람들이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보다 대중적이고 달달한 가요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자보다 후자를 인식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과 <썸 탈거야>는 객관적인 사실이 필연적인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는지 모른다고 보여줍니다. 객관적인 사실과 필연적인 인식은 절대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사실과 필연적인 인식은 얼마든지 떨어질지 모릅니다. 사실과 인식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사실을 주장하기 전에, 사람들은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이것을 주장할 수 있나요? "노라 제미신은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을 썼다." 사람들이 이것을 주장하기 전에, 분명히 사람들은 노라 제미신이 <다섯 번째 계절>을 썼다고 필연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뭔가를 인식할 때, 사람들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아무리 <다섯 번째 계절>이 감동적이라고 해도, 이게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이기 때문에, 많은 남한 사람들이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노라 제미신이 <다섯 번째 계절>을 썼다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이 사례는 사람들이 사실을 주장하기 전에 사람들이 사실에게 가치를 부여한다고 보여줍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소설'입니다. 이건 영화보다 '소설'입니다. 영화와 달리, 소설은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영화가 영상 매체이기 때문에, 영화는 시각적입니다. 소설이 영상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소설이 글자 매체이기 때문에, 소설은 시각적이기보다 추상적입니다. 소설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소설은 어떤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들려주지 않습니다. 만약 <다섯 번째 계절>이 실사 영화이고, 실사 영화 속에서 시에나이트가 엄청난 지진을 일으킨다면, 실사 영화는 엄청난 지진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테고, 엄청난 지진은 막대하고 요란한 소음을 동반할 겁니다. 이건 혼란스러운 아비규환일 겁니다.



실사 영화 <다섯 번째 계절>은 혼란스러운 아비규환을 시각적으로 보여줄 겁니다. 이 아비규환을 연출하기 위해 실사 영화는 비싼 시각 효과, 특수 효과를 동원할지 모릅니다. 반면,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시각 효과, 특수 효과를 동원하지 않고, 엄청난 지진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막대하고 요란한 소음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소설은 추상적입니다. 소설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심지어 자칭 SF 팬들조차 SF 소설들을 읽지 않습니다. 자칭 SF 팬들은 SF 소설들보다 (시각적인) SF 만화들, SF 영화들, SF 비디오 게임들을 떠벌입니다. 자칭 SF 팬들은 소설들보다 영화들에게 가치를 부여합니다.

사람들이 사실을 주장하기 전에, 사람들은 사실에게 가치를 부여합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이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노라 제미신이 <다섯 번째 계절>을 썼다고 인식하지 않고, 그들이 이것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이 사실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칭 SF 팬들조차 SF 소설들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자칭 SF 팬들은 SF 소설들을 인식하지 않고, 그들은 SF 소설들보다 SF 영화들을 열심히 떠벌입니다. (우와, 그들은 너무 훌륭한 SF 팬들입니다!) <다섯 번째 계절>과 <썸 탈거야>는 사실과 인식이 다르고 가치 판단이 개입한다고 보여줍니다.



비단 <다섯 번째 계절>만 아니라 다른 사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쥬라기 공원>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복제 공룡 사파리를 묘사합니다. 현실에서 복제 공룡 사파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이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복제 공룡들은 비(非)현실 설정입니다. 이 비현실 설정은 첨단 과학(유전 공학)에게 기반합니다. '비현실 설정+첨단 과학'은 <쥬라기 공원>을 구성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 역시 비현실 세계를 설정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첨단 과학(생체 개조 기술)은 비현실 설정을 뒷받침합니다. '비현실 설정+첨단 과학'은 이 소설을 구성합니다.

 

'비현실 설정+첨단 과학'은 <쥬라기 공원>과 <다섯 번째 계절>을 구성합니다. 비단 <다섯 번째 계절>만 아니라 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비현실 설정+첨단 과학'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쥬라기 공원>은 똑같은 '비현실 설정+첨단 과학'입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분명히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아무도 이 사실을 거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사람들이 <쥬라기 공원>을 좋아한다면, 그들이 <다섯 번째 계절>을 좋아하나요? 만약 어떤 사람들이 <쥬라기 공원>을 좋아한다면, 그들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좋아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쥬라기 공원>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들은 비현실 설정+첨단 과학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쥬라기 공원>이 (복제) 공룡들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복제) 공룡들에게 가치를 부여할지 모릅니다. 이 사람들이 비현실 설정+첨단 과학보다 공룡들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고생물학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쥬라기 공원>이 (복제) 공룡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고생물학 다큐멘터리는 공룡들을 보여줍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분명히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이 사실은 가치를 얻습니다.

 

<쥬라기 공원>과 스페이스 오페라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쥬라기 공원>과 고생물학 다큐멘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자보다 후자에게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들은 스페이스 오페라 보드 게임을 플레이하기보다 고생물학 다큐멘터리를 시청합니다. 전자와 후자는 똑같은 객관적인 사실이나,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쥬라기 공원>과 고생물학 다큐멘터리는 이어집니다. 아무리 어떤 것들이 사실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고 선택하기 때문에, 어떤 사실은 중요하고, 어떤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유럽 판타지가 비슷한가요? 개인적으로 저는 두 장르가 다르다고 분리합니다. 저는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를 분리합니다. 제가 근대, 이성, 진보, 과학, 산업, 계몽주의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서사시, 비현실 세계, 웅장한 전쟁, 문명 부흥/몰락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가 비슷하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에게는 공통점(비현실 세계, 웅장한 전쟁, 문명 부흥/몰락)이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에게는 차이(근대, 진보, 과학, 산업, 계몽주의)가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고 사실을 선택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는 비슷하거나 다릅니다. <다섯 번째 계절>과 <썸 탈거야>가 보여주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쥬라기 공원>과 고생물학 다큐멘터리가 비슷한 것처럼, (자칭 SF 팬들이 SF 소설들을 열~심히 무시하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가 다르거나 비슷한 것처럼, 사람들은 가치를 부여하고 사실을 선택합니다.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떤 것은 사실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이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보다 달달한 대중 가요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들이 <다섯 번째 계절>보다 <썸 탈거야>를 인식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이 비현실 설정+첨단 과학보다 중생대 야생 동물들에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들이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쥬라기 공원>과 고생물학 다큐멘터리를 연결하는 것처럼, 아무리 어떤 것들이 사실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떤 사실을 주장하고, 어떤 사실은 중요합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서구 제국주의는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수탈했습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심지어 그 악랄한 소비에트 연방보다 서구 제국주의는 훨씬 폭력적입니다. 만약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하지 않았다면, 20세기 자본주의는 땡전 한 푼도 벌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만약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하지 않았다면, 내부적인 경제 공황 때문에, 자본주의는 망했을 겁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아주 부유합니다. 자본주의는 으리으리하고, 삐까번쩍하고, 아주 호화롭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분명히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모두 이 사실을 인정합니다.



식민지 수탈은 사실이고, 부유한 자본주의는 사실입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은 전자보다 후자에게 가치를 부여합니다. 부유한 자본주의는 식민지 수탈에게 기생하나, 많은 남한 사람들이 식민지 수탈을 외면하고 오직 부유한 자본주의에게만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본주의가 옳다고 착각합니다. 왜 많은 남한 사람들이 착각하나요? 그들이 바보 멍청이들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세뇌합니다. 이 세뇌에서 벗어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많은 남한 사람들을 세뇌하기 때문에, 그들은 착각합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이 <다섯 번째 계절>보다 <썸 탈거야>를 인식하는 것처럼, 많은 남한 사람들은 식민지 수탈보다 오직 부유한 자본주의만 인식합니다. 아무리 부유한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에게 기생한다고 해도, 아무리 이게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해도, 사실과 인식은 다릅니다. 사실과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남한 사람들은 이 사실(자본주의는 식민지 수탈에게 기생한다)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식민지 수탈조차 왜곡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식민지 사람들이 열등하기 때문에 제3세계에서 독재자들이 활개치고 제3세계 사람들이 가난하다고 왜곡합니다.



아무리 식민지 수탈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해도, 보수 우파 지식인들에게 이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보수 우파들이 가치를 부여하고 사실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사실(식민지 수탈)조차 왜곡합니다. 사회주의는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사실을 왜곡한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가치 판단은 주관적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사실을 주장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실을 선택합니다. 가치 판단이 주관적이고,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이건 사실이 객관성을 100%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가치 판단이 사실 인식에게 개입하기 때문에, 이른바 팩트는 객관성을 100% 보장하지 않습니다. 주관적인 가치 판단 속에서 사람들은 사실을 선택하고 인식합니다. 주관적인 가치 판단 속에서 사람들이 사실을 선택하기 때문에, 이 주장(주관적인 가치 판단 속에서 사람들은 사실을 선택한다) 역시 사실보다 가치 판단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주관적인 가치 판단 속에서 사람들이 사실을 선택한다는 주장 역시 주관적인 가치 판단인지 모릅니다. 이 객관적인 주장 그 자체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주의가 보수 우파 지식인들을 객관적으로 비판한다고 해도, 이건 주관적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주관적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것을 주장한다면, 이 사람이 인간이기 때문에, 이 주장 그 자체는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일 겁니다. 인간이 주관적이라는 주장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주관적이라는 주장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선택할 때, 언제나 우리는 이 문제에 부딪힙니다. (문학 평론에서 이건 아주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많은 평론가들은 해석에게 치중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요? 아니, 이 문제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주관성에서 인간이 100% 벗어날 수 있나요? 누가 이것을 장담하나요?

 

이건 우리가 과학을 해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객관성이 과학을 보장하기 때문에, 만약 주관성에서 인간이 벗어나지 못한다면, 과학은 성립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객관성 그 자체는 존재합니다. 만약 객관성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학은 발달하지 않을 겁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기 때문에, 시대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시대가 고정적인가요? 아니, 중세 사람들과 달리, 21세기 초반 도시 사람들은 비행 무인 드론들에 친숙합니다. 21세기 초반 도시 사람들이 비행 무인 드론들을 멋지게 조종하는 것처럼, 분명히 객관적인 과학은 발달합니다. 문제는 당파성입니다.



비행 무인 드론들은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비행 무인 드론들은 제국주의 전쟁을 지적하지 않고 기후 변화, 행성급 환경 오염을 경고하지 않습니다. 무인 드론들과 달리, 당파성이 개입할 때, 객관성보다 주관성은 커다란 가치를 얻을지 모릅니다. 너무 애석하게도, 당파성이 개입할 때, 주관성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주관적인 판단은 객관적인 사실에게 개입하고, 사실은 객관성을 100% 보장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사회주의가 보수 우파 지식인들을 객관적으로 비판한다고 해도, 이건 객관성을 100% 보장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주관성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사회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열심히 떠들기 때문에, 심지어 수구 꼴통 할배들조차 공산주의가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든다고 떠벌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에게는 아주 소중한 가치(링크)가 있는지 모릅니다. 당파성이 개입할 때, 인간은 주관적인지 모르나, 수구 꼴통 할배들과 골수 빨갱이들은 공산주의가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든다고 똑같이 떠벌입니다. 양쪽은 극단적으로 대립하나, 양쪽은 똑같이 떠벌입니다. 엄중하고 객관적인 사실보다 가난한 사람들 때문에, 사회주의는 소중합니다.


※ 게임 <Stars of Akarios> 커버 아트 출처:
https://www.kickstarter.com/projects/mccaskellgames/starligh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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