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블랙 톰의 발라드>와 해수면 상승 본문
※ 이 게시글은 빅터 라발이 쓴 소설 <블랙 톰의 발라드>의 치명적인 결말 누설을 포함합니다.
[인류 혐오와 허무주의는 지배 관념에 편승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왜 오직 크툴루만 조명을 받나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비극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류 문명이 무너졌다고 이야기하고, 이건 너무 비극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류 문명이 무너졌다고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인류 그 자체를 혐오한다고 해도, 인류 혐오자들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비극이라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수구 꼴통들이라고 해도, 수구 꼴통들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비극이라고 간주할 겁니다. 인류 문명은 무너졌고, 이건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비극이라고 해도, 포스트 아포칼립스 분위기는 비극이 아닐지 모릅니다.
애니메이션 <월-E>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인류 문명은 무너졌으나, 이 애니메이션은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월-E는 이브를 심쿵심쿵하게 바라봅니다. 두 연인이 발렌타인 데이를 맞이하는 것처럼, 아무리 하트♥가 뿅뿅~ 날아다닌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먹구름 같은 우울함보다 두근거리는 뿅뿅~ 하트♥는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어떤 관객들은 <월-E>가 비단 포스트 아포칼립스일 뿐만 아니라 두 로봇이 심쿵심쿵 연애하는 이야기라고 간주할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는 오직 포스트 아포칼립스만 있지 않습니다.
빅터 라발이 쓴 <블랙 톰의 발라드>는 우주적인 공포입니다. 다른 여러 크툴루 신화 매체들처럼, 이 소설은 그레이트 올드 원이 인류 문명을 무너뜨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다른 크툴루 신화 매체들과 달리, 이 소설에서 흑인 차별은 핵심 소재입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흑인 차별과 크툴루 신화는 거의 대등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흑인 차별은 크툴루 신화를 향해 이어지고, 두 가지 사이에는 긴밀한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차별, 소외, 편견은 훨씬 커다란 재앙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예전에 어떤 게시글(링크)이 설명한 것처럼, 이미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이것을 보여줬습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조인간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조인간을 먼저 차별하기 때문에, 인조인간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인조인간을 먼저 차별하지 않았다면, 인조인간 역시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을 겁니다. 인조인간은 자비를 호소하나,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책임을 회피합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만들었음에도,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책임을 짊어지지 않습니다. 인조인간은 분노하고, 분노는 재앙이 됩니다. <프랑켄슈타인>이 보여준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서 차별, 소외, 편견은 광기, 복수, 폭력을 향해 이어지고, 이건 훨씬 커다란 재앙이 됩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을 비롯해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서 초인들, 돌연변이들, 로봇들, 외계인들, 이른바 '이방인들'은 차별을 향해 분노합니다. 이런 분노는 훨씬 커다란 재앙을 향해 번집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섯 번째 계절>과 <블랙 톰의 발라드>에게는 비슷한 감성이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조인간이 분노하고 살인자가 되는 것처럼, <블랙 톰의 발라드>는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합니다. 인조인간이 분노하고 살인자가 되는 것처럼, 이른바 블랙 톰은 분노하고 훨씬 커다란 재앙을 소환합니다.
블랙 톰은 흑인입니다. 인종 차별 미국 사회에서 블랙 톰은 흑인입니다. 이건 블랙 톰이 온갖 차별들을 감당한다는 뜻입니다. 인종 차별 사회에서 흑인은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흑인들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야 하고, 블랙 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사람들이 인조인간을 차별하는 것처럼, <다섯 번째 계절>에서 오로진들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흑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아무리 인종 차별 사회가 흑인들을 탄압한다고 해도, 흑인들은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합니다. 블랙 톰은 나락을 겪고, 분노, 광기, 복수는 무시무시한 재앙을 부릅니다.
많은 독자들이 예상하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재앙은 크툴루입니다. 블랙 톰은 크툴루를 깨우고, 언젠가 크툴루와 그레이트 올드 원들은 지구를 지배할 겁니다. 인류는 파멸할 테고, 인종 차별은 사라질 겁니다. 인종 차별 사회가 흑인들을 억압하기 때문에, 블랙 톰은 분노하고, 결국 블랙 톰은 그레이트 올드 원을 깨웁니다. 비록 블랙 톰이 그레이트 올드 원을 깨운다고 해도, 어떤 독자들은 블랙 톰을 동정적으로 바라볼 겁니다. 아니, 많은 독자들은 블랙 톰을 동정할 겁니다. 독자들은 블랙 톰을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비록 그레이트 올드 원이 인류 문명을 짓밟는다고 해도, 블랙 톰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블랙 톰이 그레이트 올드 원을 깨운다고 해도, 미국 사회가 흑인들을 너무 차별하기 때문에, 블랙 톰은 광기와 복수에 빠졌고, 결국 블랙 톰은 크툴루를 깨웠습니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블랙 톰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인종 차별 미국 사회입니다. 독자들이 블랙 톰을 비판한다고 해도, 블랙 톰보다 인종 차별 사회는 훨씬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블랙 톰을 동정적으로 바라볼지 모릅니다. 독자들이 블랙 톰을 동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는 메갈리아를 동정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비록 메갈리아가 폭언들을 쏟아낸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메갈리아보다 가부장 문화입니다.
인종 차별 사회에서 블랙 톰이 분노하고 광기에 빠진다고 해도, 블랙 톰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블랙 톰처럼, 가부장 문화 속에서 메갈리아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가부장 문화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블랙 톰을 동정하는 것처럼, 우리는 메갈리아보다 가부장 문화를 비판해야 합니다. 블랙 톰은 그레이트 올드 원을 깨웠으나, 메갈리아는 그레이트 올드 원을 깨운 적이 없습니다. 메갈리아는 보크루그는 고사하고 지나가는 미고조차 건드린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메갈리아가 폭언들을 쏟아낸다고 해도, 고작 욕설 따위는 그레이트 올드 원이 아닙니다. 하지만 남한 사회에서 독자들이 블랙 톰을 동정한다고 해도, 이런 독자들은 메갈리아를 힐난할지 모릅니다.
메갈리아는 다곤을 깨운 적이 없고, 쇼거스를 만든 적이 없고, 이브 사람들을 학살한 적이 없고, 프나코틱 필사본을 읽은 적이 없고, 니알라토텝에게 충성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블랙 톰은 다른 무엇보다 크툴루를 깨웠습니다. 블랙 톰이 크툴루를 깨웠음에도, 메갈리아가 지나가는 미고 집게 다리조차 건드린 적이 없음에도, 남한 독자들은 블랙 톰을 동정하고 메갈리아를 비난할지 모릅니다. 이건 얼마나 헬조선 사회가 가부장적인 편견에 빠졌는지 보여줍니다. 어쩌면 제가 글을 쓰는 동안, 가부장적인 헬조선 어딘가에서 어떤 여자들은 광기에 빠지고 복수를 꿈꾸는지 모릅니다. 자랑스러운 헬조선이 자본주의 사회이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부장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여자 무급 노동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이고, 가부장 제도 속에서 여자들은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메갈리아는 분노를 드러냅니다. 가부장적인 헬조선 사회에서 메갈리아가 분노를 드러내는 것처럼, 인종 차별 사회에서 블랙 톰은 분노를 드러내고, 광기에 빠지고, 크툴루를 깨웁니다. 크툴루가 바다에 속하기 때문에, 크툴루는 해수면을 높일 겁니다. 대기는 너무 후덥지근해질 테고, 해수면은 크게 상승할 테고, 해수면 상승은 도시들을 집어삼킬 겁니다. 해수면 상승 속에서 인류 문명은 몰락할 테고, 바닷속에서 크툴루(와 다곤과 보크루그)는 웅장하게 헤엄칠 겁니다.
이렇게 소설 <블랙 톰의 발라드>는 흑인 차별과 크툴루 신화를 연결합니다. 우주적인 공포 소설에서 더 이상 흑인 차별은 그저 단순한 사회 문제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흑인 차별은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 인류 문명 멸망, 그레이트 올드 원으로 이어집니다. 블랙 톰의 마음이 무너졌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함께 무너집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개인적인 비극은 세계적인 파멸로 확장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오직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개인적인 비극은 머물지 않습니다. 소설 <사람의 아이들>이 처절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개인적인 비극은 세계적인 파멸을 향해 나갑니다.
개인적인 비극이 세계적인 파멸을 향해 확장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처절한 비극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크툴루 강림은 그저 단순한 공포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건 모든 사이언스 픽션이 개인적인 비극을 세계적인 파멸로 확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보드 게임 <아컴 호러>에서 보크루그가 강림한다고 해도, <아컴 호러>는 개인적인 비극을 확장하지 않습니다. 보드 게임 <아컴 호러>에서 세계적인 파멸은 개인적인 비극의 확장 판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블랙 톰의 발라드>는 사회 문제를 세계 멸망과 연결합니다.
소설 결말에서 블랙 톰은 미래에 대기가 뜨거워지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바다가 도시를 집어삼킬 거라고 예언합니다. 바닷속에서 크툴루는 고층 건물들 사이를 누빌 겁니다. 블랙 톰은 언제 기후 변화가 본격적으로 나타날지 알지 못하나, 블랙 톰은 기후 변화를 예언합니다. 그래서 21세기 초반 오늘날, 기후 변화 시대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중입니다. 어쩌면 인류 문명에서 21세기 초반 생태 사회주의자들은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자들인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에게 21세기 초반이 변곡점, 티핑 포인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너무 억압하기 때문에, 생태 사회주의자들은 약세입니다.
미국 사회가 흑인들을 억압하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생태 사회주의를 억압하기 때문에, 생태 사회주의는 약세입니다. 그래서 생태 사회주의는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할지 모르고,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에 부딪혀야 할지 모릅니다. 만약 나중에 인류 문명이 생태 혁명을 일으키고 기후 변화에 대처한다고 해도, 생태 사회주의자들에게 21세기 초반은 너무 서글픈 역사가 될지 모릅니다. 만약 어떤 소설 독자들이 생태 사회주의자들이라면, 그들은 <블랙 톰의 발라드>를 향해 힘겨운 한숨을 내쉴지 모릅니다. 위대하고 훌륭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선생님께서는 환경 오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오염들을 비판했음에도, 이미 '1906년' 소설 <정글>이 추악한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과 비참한 이민자들을 구구절절 떠들었음에도,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자본주의 오염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단편 소설 <레드 훅의 공포>가 보여주는 것처럼,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전형적으로 두 눈이 째진 아시아 이민자 쓰레기들을 욕하느라 바빴습니다. <레드 훅의 공포>와 <블랙 톰의 발라드>가 똑같은 소재들을 이용함에도, 오히려 <블랙 톰의 발라드>는 인종 차별을 지적하고, 심지어 이 소설은 기후 변화, 지구 온난화, 해수면 상승을 경고합니다.
<레드 훅의 공포>와 달리,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기후 변화는 그레이트 올드 원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이 소설은 기후 변화를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블랙 톰의 발라드>가 인류 혐오를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블랙 톰은 인류 전체가 쓰레기라고 간주하고 인류 전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블랙 톰은 크툴루를 깨웁니다. 크툴루와 그레이트 올드 원들은 기후 변화를 일으킬 테고, 해수면 상승은 도시를 집어삼킬 겁니다. 어쩌면 빌어처먹을 독점 자본가 계급은 크툴루 사교 집단인지 모릅니다. 다국적 석유 기업 간부들은 "Iä! Iä! Cthulhu fhtagn! Dagon fhtagn!"을 외치는지 모릅니다.
블랙 톰이 인류 전체를 혐오했고, 그래서 블랙 톰이 크툴루를 깨웠기 때문에, 크툴루는 태극기 할배들을 세뇌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인류 전체가 문제인가요? 아니, 인류 혐오는 그저 편견에 불과합니다. 그 자체로서 인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가 모두 똑같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류 혐오는 또 다른 차별입니다. 캐나다 백인 사장 남자와 볼리비아 시골 원주민 할머니는 똑같은 인류가 절대 아닙니다. 캐나다 백인 사장 남자와 볼리비아 시골 원주민 할머니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에 속합니다. 계급은 인간을 나눕니다. 계급 때문에, 인간은 바뀝니다. 심지어 계급은 생물종을 뛰어넘습니다.
[Iä! Iä! Daaaaagon fhtagn~!! 어쩌면 다곤 밀교, 독점 자본가 계급, 기후 변화는 이어지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빈곤층입니다. 빈곤층은 처참하게 굶주립니다. 먹고 살기 위해 빈곤층은 쓰레기 더미를 뒤적거려야 합니다. 깡마른 제3세계 아이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적이는 동안, 애완견들은 비싼 사료들을 우적우적 먹습니다. 지배 계급, 중산층들이 애완견들을 키우기 때문에, 애완견들은 굶지 않습니다. 오히려 애완견들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을 갖고, 좋은 사료를 먹습니다. 중산층 사람들과 제3세계 아이들이 똑같은 호모 사피엔스에 속하고, 애완견들이 카니스 루푸스 파밀리아리스에 속함에도, 애완견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제3세계 아이들은 쓰레기 더미를 뒤적입니다.
안락한 중산층 애완견과 쓰레기 더미 속의 제3세계 아이가 보여주는 것처럼, 계급은 생물종을 뛰어넘습니다. 심지어 생물종 차이조차 계급 차별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인류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물종 차이보다 계급 차별이 훨씬 심각함에도, 어떻게 생물학적인 분류(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문제가 될 수 있나요? 이건 편견, 망상, 헛소리입니다. 인류 혐오가 망상임에도, <블랙 톰의 발라드>는 인류 혐오를 드러냅니다. 적어도 블랙 톰은 인류 그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블랙 톰이 너무 분노했기 때문에, 블랙 톰은 광기에 빠졌고, 블랙 톰은 인류 그 자체를 혐오하고 저주합니다.
이게 작가 의도인가요? 작가 빅터 라발이 인류 그 자체를 혐오하기 때문에, 블랙 톰이 인류를 혐오하나요? 이건 작가 의도가 아닌지 모릅니다. 흑인 차별이 너무 지독하기 때문에, 블랙 톰은 광기에 빠졌습니다. 작가 의도와 소설 주인공 심리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인류 그 자체가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빅터 라발은 <블랙 톰의 발라드>를 쓰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현실 속의 지배 계급 관념입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들은 <블랙 톰의 발라드>를 읽습니다. 현실 속에서 지배 계급 관념은 편견, 망상, 헛소리를 퍼뜨립니다. 지배 계급 관념은 인류가 문제라고 지랄지랄합니다.
여러 생물학 교과서들을 보세요. 여러 생물학 교과서들은 인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설명합니다. 환경 운동가들 역시 인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설명합니다. 진보 좌파들 역시 탐욕스럽고 멍청한 인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설명합니다. 인류 전체를 비난하기보다 소수 지배 계급을 비판하기 위해 대기 화학자 파울 크뤼천은 인류세를 주장했으나, 많은 사람들은 인류세가 인류 그 자체를 지적한다고 오해합니다. 이건 편견, 망상, 헛소리입니다. 하지만 생물학 교과서들, 환경 운동가들, 진보 좌파들, 대중적인 통념은 탐욕스럽고 멍청한 인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착각합니다.
왜 이런 헛소리들이 퍼지나요?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리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들을 일으킵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반드시 착취하고 수탈하고 파괴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는다면, 사람들은 자본가 계급에게 저항할 겁니다. 자본주의를 떠받들기 위해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보다 인류가 문제라고 세뇌합니다. 자본주의 지역이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음에도, 자본주의를 떠받들기 위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인류의 야만성, 악의 평범성을 지껄여대는 것처럼,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보다 인류 그 자체가 환경 범죄자라고 세뇌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보다 인류 그 자체가 환경 범죄자이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자본가 계급 책임이 아닙니다. 자본가 계급이 제3세계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하고, 학살함에도, 기후 변화는 자본가 계급 책임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보다 인류가 환경 범죄자이기 때문입니다. 자본가 계급이 제3세계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하고, 학살함에도, 제3세계 사람들이 인류에 속하기 때문에, 제3세계 사람들은 환경 범죄자가 됩니다. 인류 혐오는 차별, 편견, 헛소리입니다. 인류 혐오가 부유한 자본가 계급과 굶주리는 빈곤층이 똑같은 인류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인류 혐오는 빈곤층을 차별합니다.
소설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인종 차별은 핵심 소재입니다. 인종 차별이 크툴루 강림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크툴루 강림은 훨씬 인상적인 재앙이 됩니다. 보드 게임 <아컴 호러>에서 조사자들이 보크루그 강림을 막지 못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아쉽고 섭섭한 게임 실패에 불과하나, 소설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크툴루 강림은 훨씬 압도적인 무게를 드러냅니다. 심지어 어떤 독자들은 원작 <크툴루의 부름>과 <레드 훅의 공포>보다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크툴루 강림이 훨씬 무게를 드러낸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크툴루의 부름>에서 크툴루 강림은 암울하고 압도적이나, 현실에서 크툴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크툴루를 만나지 않습니다. 어떤 독자들에게 크툴루는 단순한 외계신보다 불가해한 상황을 상징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불가해한 상황은 추상적입니다. 적어도 불평등한 사회 구조보다 불가해한 상황은 추상적입니다. 하지만 귀싸대기를 후려치는 손길처럼,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현실입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인종 차별은 크툴루 강림을 유발합니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서 인종 차별은 비롯합니다. 인종 차별은 지배적인 백인과 피지배적인 흑인 관계입니다. 지배적인 흑인과 피지배적인 백인 관계는 인종 차별이 되지 않습니다. 지배적인 백인과 달리, 지배적인 흑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지배자-피지배자로서 흑인-백인 관계보다 백인-흑인 관계가 성립하나요? 태생적으로 백인들이 우월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백인에게 흑인을 억압하기 위한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서구 제국주의입니다. 이른바 대항해 시대 이후, 서구 문명은 식민지들을 적극적으로 수탈하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 이후, 이건 자본주의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19세기 이후, 식민지 수탈 없이,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 식민지 수탈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확장합니다. 그래서 1차 세계 대전은 제국주의 전쟁입니다. 노예 제도 역시 여기에 속합니다.
노예 제도는 고립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서구 문명이 식민지들을 수탈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노예 제도는 나타납니다. 식민지 수탈, 자본주의 부흥, 제국주의 전쟁과 노예 제도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서구 문명이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원주민들을 부려먹고, 흑인들을 탄압하기 때문에,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인종 차별 문화를 형성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흑인 노예보다 원주민 노동자, 인도 노동자는 훨씬 비참합니다. 미국 남부 목화 농장보다 볼리비아 은광과 인도 홍차 농장은 훨씬 잔혹합니다. 이런 수탈이 자본주의 부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서구가 선진국이라고 떠받듭니다.
영국이 인도를 수탈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영국이 선진국이라고 떠받듭니다.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불평등한 사회 구조, 자본주의 부흥, 서구 제국주의와 인종 차별은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인종 차별은 고립적인 현상이 절대 아닙니다. 이건 오직 자본주의 시장 경제만 인종 차별 원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유일한 인종 차별 원인이라면, 이건 너무 편협하고 기계적인 환원론일 겁니다.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많은 요인들은 인종 차별 문화를 형성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서구 자본주의 부흥은 아주 커다란 원인입니다. 어쩌면 자본주의는 가장 핵심적인 원인인지 모릅니다.
서구 제국주의에서 인종 차별이 비롯함에도, 소설 <블랙 톰의 발라드>는 서구 제국주의를 직접 비판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이 서구 제국주의를 직접 비판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소설은 현실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인생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관념이 인류 혐오를 지랄지랄 떠들기 때문에, 독자는 자본주의보다 인류 그 자체가 문제라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인권 운동가들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보다 배타적인 민족 감성을 떠벌이는 것처럼, 심지어 인권 운동가들조차 인종 차별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지배 관념은 단순한 오해가 아닙니다.
게다가 소설 <블랙 톰의 발라드>는 기후 변화와 크툴루 강림을 연결합니다. 크툴루는 그레이트 올드 원이고, 인류는 그레이트 올드 원을 막지 못합니다. 그레이트 올드 원은 절대적입니다. 인류 문명은 그레이트 올드 원을 절대 막지 못합니다. 인류 문명이 그레이트 올드 원을 절대 막지 못하고, 크툴루 강림과 기후 변화가 이어지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를 절대 막지 못합니다. 이게 작가 의도인가요? 빅터 라발이 인류 문명이 기후 변화를 절대 막지 못한다고 주장하기 원하나요? 어쩌면 빅터 라발은 기후 변화를 경고하기 원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문제는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엘리너 아나슨이 비판한 것(링크)처럼, 지배적인 관념은 인류 문명이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한다고 세뇌합니다. 이미 패배는 기정 사실입니다. 인류 문명이 그레이트 올드 원을 절대 막지 못하는 것처럼, 인류 문명은 기후 변화를 절대 막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이 허무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에, <블랙 톰의 발라드>는 여기에 일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인류 혐오, 허무주의에 반드시 기반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 <서브머지드>를 보세요. 비디오 게임 <서브머지드>에서 해수면은 상승했고 바다는 도시를 덮쳤습니다.
<서브머지드>에서 게임 주인공은 쪽배 소녀 미쿠입니다. <서브머지드>는 구체적인 배경 설정을 설명하지 않으나, 미쿠는 제3세계 소녀 같습니다. 흑인으로서 블랙 톰이 사회적인 약자, 밑바닥 계급인 것처럼, 제3세계 사람으로서 미쿠는 사회적인 약자, 밑바닥 계급입니다. 특히, 미쿠는 소녀입니다. 블랙 톰은 성인 남자입니다. 아무리 블랙 톰이 흑인이라고 해도, 흑인 소녀보다 흑인 성인 남자는 지배자입니다. 성인 남자보다 소녀는 훨씬 약자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가부장적인 편견을 드러내는 것처럼, 약자들 내부에서도 성 차별은 심각합니다. 블랙 톰과 달리, '소녀' 미쿠는 밑바닥 계급에 훨씬 가깝습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처럼, <서브머지드>는 해수면 상승과 침수된 도시를 보여줍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처럼, <서브머지드>에서 주연 등장인물은 밑바닥 계급입니다. 성인 남자 블랙 톰보다 쪽배 '소녀' 미쿠는 밑바닥 계급에 훨씬 가깝습니다. 하지만 <서브머지드>는 인류 혐오와 허무주의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브머지드>는 풍요롭고 웅장한 자연 환경을 감동적으로 바라봅니다. 쪽배 소녀 미쿠에게 고래 상어는 거대 괴수와 비슷하나, 거대 괴수 고래 상어는 미쿠를 해치지 않습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거대한 크툴루는 무시무시하나, 쪽배 소녀 미쿠는 고래 상어를 감동적으로 바라봅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와 <서브머지드>는 침수된 도시에서 거대한 뭔가가 헤엄친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그레이트 올드 원과 웅장한 고래 상어는 다릅니다. <서브머지드>는 울창한 녹색 식물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그래서 웅장한 고래 상어는 풍요로운 자연 환경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후 변화가 세상을 무너뜨린다고 해도, 생명은 계속 번성할 겁니다. 게임 분위기가 고즈넉하고 풍요롭고 웅장하기 때문에, 게임 주제 역시 인류 혐오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브머지드>는 인간을 바라보기 위한 따스한 시선을 비춥니다. <서브머지드>는 혐오보다 희망입니다.
<서브머지드>는 인류 그 자체가 잘못이고 인류가 죽어야 한다고 지껄여대지 않습니다. <서브머지드>는 지배적인 관념에 편승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서브머지드>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소설 주인공이 인류 혐오를 너무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이건 지배적인 관념에 편승할지 모릅니다. 무시무시한 그레이트 올드 원은 허무주의에 동조할지 모릅니다. 이건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인류 혐오와 허무주의를 반드시 배척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인류 혐오와 허무주의에 기반한다고 해도,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이 게임이 환경 아포칼립스라고 해도, 이 게임은 사악한 외계신보다 웅장한 자연 풍경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관념이 인류 혐오와 허무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에, 만약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인류 혐오와 허무주의에 기반한다면, 이건 지배 계급 관념을 강화할지 모릅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보다 현실 속에서 독자는 소설을 읽습니다. 현실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이 인간상을 만들고,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소설을 쓰고 읽기 때문에, 지배적인 관념과 소설 작가/독자는 절대 떨어지지 못합니다. 아무리 SF 칼럼니스트가 그 자체로서 SF 장르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고 해도, 이미 현실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인간상을 만들고, 인간은 소설을 쓰고 읽습니다. SF 칼럼니스트는 이것을 간과합니다.
그리고 <블랙 톰의 발라드>에서 인류 혐오와 허무주의 이외에 또 다른 것 역시 아쉽습니다. <블랙 톰의 발라드>는 해저를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막판에 해수면 상승을 예언합니다. 하지만 오직 크툴루만 해저와 해수면 상승에 어울리나요? 그건 아닙니다. 단편 소설 <다곤>과 중편 소설 <인스머스의 그림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다곤 역시 해저와 해수면 상승에 어울립니다. 다곤이 물고기 거인이기 때문에, 다곤 추종자 해저인들이 물고기 인간이기 때문에, 크툴루보다 다곤은 해저와 해수면 상승에 훨씬 어울립니다. 아무리 크툴루가 유명하고 대표적이라고 해도, 크툴루보다 다곤은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소설 <인스머스의 그림자>가 엄청난 인기를 끌어모음에도, 다곤은 주연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곤이 해저에 훨씬 어울림에도, <블랙 톰의 발라드>는 크툴루를 선택합니다. 가끔 크툴루 신화 매체들에서 다곤은 수모(?)를 당합니다. 보드 게임 <아컴 호러>에서 다곤은 신화적인 존재보다 신화적인 매개체에 가깝고, 롤플레잉 게임 <크툴루의 부름>에서도 다곤은 신격보다 외계인에 가깝습니다. 다곤이 첫째 그레이트 올드 원임에도, 다곤이 물고기 거인이기 때문에, 물고기 거인이 별로 무섭지 않기 때문에, 다른 초자연적인 외계신들보다 다곤은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네크로노미콘 게임북>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관점에서 다곤은 인어 뻥튀기입니다. 해저인들은 인어입니다. 인어 공주 에리얼과 달리, 해저인들은 흉측한 인어들이나, 흉측한 인어 역시 인어입니다. 다곤은 해저인 뻥튀기입니다. 다곤이 해저인 뻥튀기이고, 해저인이 흉측한 인어이기 때문에, 다곤은 인어 뻥튀기입니다. 다곤은 거대한 인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어가 흉측하다고 해도, 인어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닙니다. 동화들이 (아름다운) 인어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미 인어는 친숙합니다. 기이한 색깔, 흐느적거리는 점액질, 모호한 거품들, 기어다니는 검은 파라오와 달리, 인어는 친숙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곤보다 크툴루가 해저 그레이트 올드 원에 훨씬 가깝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블랙 톰의 발라드> 역시 다곤보다 크툴루를 선택했는지 모르고,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역시 다곤보다 크툴루를 상위 존재라고 설정했는지 모릅니다. 비록 이런 이유가 합당하지 않다고 해도, 만약 이 소설이 크툴루보다 다곤이나 보크루그를 이야기했다면, 우주적인 공포 전형에서 이 소설은 좀 더 벗어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물론 이 소설에서 그레이트 올드 원이 뭔가를 직접 하지 않기 때문에, 크툴루, 다곤, 보크루그, 어떤 해저 그레이트 올드 원이 나오든, 이건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팬 아트(링크)처럼, 만약 보크루그가 정말 거대한 모니터 도마뱀이나 구식 복원 모사사우루스에 가깝다면, 어떤 거대 괴수 팬들은 요그-소토스 같은 추상적인 존재보다 보크루그 같은 야생 동물 형태를 선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그-소토스, 슈브-니구라스 같은 이질적인 형태보다 모사사우루스는 너무 친숙합니다. 인어 뻥튀기 다곤처럼, 보크루그는 이질적인 느낌보다 친숙한 느낌을 풍깁니다. 어쩌면 이런 친숙함 때문에, 보크루그와 다곤은 크툴루를 뛰어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다곤과 달리 보드 게임 <아컴 호러>에서 보크루그는 그레이트 올드 원 자리를 해먹습니다.)
사실 <블랙 톰의 발라드>는 <레드 훅의 공포>와 <크툴루의 부름>에 기반하나, 어떤 관점에서 몇몇 소재는 <사나스에 찾아온 운명>과 비슷합니다. 인종 차별, 제노사이드, 복수와 재앙, (해)수면 상승, 침몰한 도시, 수중(aquatic) 그레이트 올드 원. 만약 <블랙 톰의 발라드>가 <사나스에 찾아온 운명>에 기반했다면, 이 소설이 기후 변화를 경고했다고 해도, 소설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을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레이트 올드 원이 사악하다고 생각하나, 보크루그는 악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사나스 문명이 이브 문명을 학살하고 인종 차별을 미화하기 때문에, 보크루그는 복수합니다.
인종 차별에서 <사나스 운명> 역시 벗어나지 못하나, 끔찍한 복수와 (해)수면 상승, 침몰한 도시, 수중 그레이트 올드 원은 크툴루보다 보크루그에 어울립니다. 문제는… 보크루그가 강대한 외계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러브크래프트 독자들은 보크루그가 강하지 않다고 평가합니다. 사람들이 크툴루 신화에 친숙하다고 해도, 이런 사람들은 다곤, 크툴루, 요그-소토스, 니알라토텝 같은 외계신들을 들어봤을 겁니다. 하지만 보크루그는 '듣보잡' 외계신입니다. 소설 <블랙 톰의 발라드>는 인종 차별을 강렬하게 비판하나, 강렬한 비판과 '듣보잡' 외계신, 구식 모사사우루스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겁니다.
물론 만약 <블랙 톰의 발라드>가 <사나스에 찾아온 운명>에 기반했다고 해도, 결국 포스트 아포칼립스로서 <블랙 톰의 발라드>는 인류 혐오와 허무주의를 드러냈을지 모릅니다. 엘리너 아나슨이 미래를 위한 희망을 말하는 것처럼, 기후 변화 시대에서 우리에게는 인류 혐오와 허무주의보다 희망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소설 <블랙 톰의 발라드>와 달리, 비디오 게임 <서브머지드>는 풍요로운 자연 환경, 웅장한 고래 상어, 따스한 희망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서브머지드>가 환경 아포칼립스라고 해도, 이 게임은 사악한 외계신보다 웅장한 고래 상어를 보여줍니다.
※ 게임 <서브머지드> 스크린샷: Ba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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