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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다섯 번째 계절>과 우동이즘 작가의 SF 해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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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계절>과 우동이즘 작가의 SF 해석

OneTiger 2020. 8. 5. 19:47

 


이 동영상(링크)은 YouTube <우동이즘 스토리텔링> 동영상입니다. 이 채널에서 우동이즘 작가는 웹툰을 위한 짤막한 작법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국내 웹툰 문화에서 SF 장르는 비주류입니다. 비단 웹툰만 아니라 웹소설 문화에서도 SF 장르는 비주류입니다. 만약 초보 작가가 SF 장르를 시도한다면, 기성 작가들은 이 초보 작가를 말릴 겁니다. 몇몇 SF 웹소설, 웹툰은 커다란 인기를 끌었으나, 이건 예외 사례입니다. 그 자체로서 로맨스 판타지 같은 장르는 커다란 인기를 누리나, SF 그 자체는 인기를 누리지 못합니다. 만약 작가가 이것을 시도한다면, 작가는 비주류를 각오해야 합니다.

 

왜 국내 (웹소설/웹툰) 문화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인기를 끌지 못하나요? 위 동영상에서 우동이즘 작가는 세 가지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기술력이고, 둘째는 최근 SF 흐름이고, 셋째는 국내 문화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우동이즘 작가가 SF 장르를 충분하게 파악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SF 장르를 논의하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SF 장르를 '전반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SF 장르를 '부분적으로' 파악한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오류에 빠질 겁니다. 만약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코끼리를 만진다면, 코가 길다랗기 때문에, 사람들은 코끼리가 뱀이라고 오해할 겁니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코끼리가 뱀이라고 오해하고, 이건 '어둠 속의 편견', 성급한 일반화가 됩니다. 만약 사람들이 SF 장르를 '부분적으로' 파악한다면, 사람들은 '어둠 속의 편견'에 빠질 겁니다. 우동이즘 작가는 어둠 속의 편견에 빠지고 사이언스 픽션을 성급하게 일반화합니다. 특히, 첫째 이유와 셋째 이유보다 둘째 이유에서 우동이즘 작가는 훨씬 커다란 오류에 빠집니다. 우동이즘 작가가 둘째 이유를 설명하는 동안, 우동이즘 작가는 사이언스 픽션을 몇몇 영상 매체에 한정하고, 그래서 폭넓은 논의는 사라집니다. 비단 우동이즘 작가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비슷한 오류에 빠집니다.

 

레프 트로츠키가 영화를 호평한 것처럼, 20세기 이후,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매체가 되었습니다. 국내 문화 예술에서도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매체입니다. 반면, 소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특히, 21세기 초반 오늘날, 국내 문화는 소설들을 읽지 않습니다. 출판사 관계자들은 국내 문화가 소설들을 읽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소설은 뭔가를 직접 보여주지 못합니다. 독자는 글자들을 읽고 스스로 상상합니다. 이 과정은 귀찮습니다. SF 소설이 비(非)현실 설정을 묘사하기 때문에, SF 독서는 훨씬 귀찮습니다. 반면, SF 영화는 비현실 설정을 직접 보여줍니다.



만약 SF 소설이 외계 식생들을 묘사한다면, 독자는 글자들을 읽고 상상할 겁니다. 독자는 자신이 옳게 상상했는지 확인하지 못합니다. 글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SF 영화는 시각 효과를 동원하고 외계 식생들을 직접 보여줍니다. 관객은 힘들게 상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관객은 극장 화면에 몰입합니다. 만약 SF 소설이 궤도 정거장을 묘사한다면, 독자는 글자들을 읽고 상상할 겁니다. 독자는 자신이 옳게 상상했는지 확인하지 못합니다. 글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SF 영화는 시각 효과를 동원하고 궤도 정거장을 직접 보여줍니다. 관객은 힘들게 상상하지 않습니다.

 

관객이 힘들게 상상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는 대중적입니다. 독자가 힘들게 상상하기 때문에, 국내 문화 예술에서 소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영화는 비단 영상만 아니라 음악과 소리를 들려줍니다. 영화에서 배우들이 연기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인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소설은 음악과 소리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인상을 찌푸린다고 해도, 이건 그저 글자들에 불과합니다. 하얀 것은 종이들이고, 검은 것은 글자들입니다. 소설은 그저 하얀 종이들과 검은 글자들에 불과합니다. 영화는 영상과 음악과 소리와 인간을 동원합니다. 영화는 아주 생생합니다.



영화와 달리, 소설은 생생하지 않습니다. 소설이 생생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추상적인 소설을 읽기보다 생생한 영화를 관람합니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다운로드/스트리밍 프로그램들이 발달했기 때문에, 영화를 관람하기는 훨씬 쉽습니다. 지하철 정류장에서 사람들은 핸드폰들을 꺼내고 영화들을 쉽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아주 독보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이 영향에서 SF 역시 자유롭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해석은 옳지 않은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SF 소설과 SF 영화에게는 이 차이점들이 있고, 국내 SF 문화에서도 영화는 아주 독보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국내 문화에서 사람들이 소설들을 읽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SF '소설'을 논의하지 않습니다. 우동이즘 작가 역시 SF '소설'을 논의하지 않습니다. 위 동영상은 소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가 초기 SF 작가인 것처럼, 소설에서 SF 장르는 비롯했습니다. SF 장르가 자리를 잡는 동안, 소설은 중요한 역할을 계속 맡았습니다. 이른바 SF 황금 시대는 SF 영화나 SF 만화나 SF 게임보다 SF 소설을 가리킵니다. SF 소설들이 다양한 설정들을 선사했기 때문에, SF 장르는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소설들 덕분에, SF 장르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SF 장르에서 소설은 핵심 매체입니다.



SF 영화와 SF 소설 중에서 무엇을 만들기가 훨씬 쉬운가요? 대답은 SF 소설입니다. 소설이 글자 매체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기는 훨씬 쉽습니다. 아무리 소설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소행성 내부를 굴착하고, 테라포밍하고, 야생 보호 구역을 지정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글자들이고, 글자들을 쓰기는 쉽습니다. 글자(언어)는 사회적인 기호이고, 사회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쓰고 읽고 소통하기 때문에, 소설을 쓰기는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반면, 만약 실사 영화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소행성 내부를 테라포밍한다면, 이것을 촬영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실사 영화 제작자들은 비싼 시각 효과를 동원해야 합니다.

 

실사 영화 제작자들이 비싼 시각 효과를 동원하기 때문에, SF 영화는 거대 사업이 됩니다. SF 영화가 거대 사업이기 때문에, 영화 제작자들은 대세, 주류에 순응합니다. 소설 작가는 대세를 거스르고 새로운 것을 실험할 수 있으나, 거대 영화 사업에서 (상대적으로) 이건 어렵습니다. 저렴한 독립 영화는 대세를 거스르고 새로운 것을 실험할 수 있으나, 제작 비용이 낮기 때문에, 독립 영화는 거창한 규모를 시도하지 못합니다. SF 소설은 거창한 규모를 시도하고 새로운 것을 실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엄청난 시각 효과를 퍼붓는다고 해도, 여전히 SF 장르에서 소설은 가장 핵심 매체입니다.



게다가 소설은 추상적인 측면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만약 외계 소행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테라포밍을 시도한다면, 그들은 수많은 것들을 논의할 겁니다. 불모지 소행성이 생명의 요람이 되는 동안, 개척 과학자들은 온갖 것들을 느낄 겁니다. 소설은 이것들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논의는 언어를 이용합니다. 소설은 글자 매체이고,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뭐라고 개척 과학자들이 논의하는지 서술할 수 있습니다. 심리는 추상적입니다. 글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글자들과 심리 묘사는 잘 어울립니다. 반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보다 영상입니다. 영상 매체는 논의를 제대로 담지 못합니다.

 

영상 매체는 추상적인 심리를 서술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엄청난 시각 효과를 퍼붓는다고 해도, 영화에게는 이 단점이 있습니다. 이건 그저 연출 문제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건 형식과 매체 문제입니다. 아무리 영상 매체가 논의와 심리를 묘사할 수 있다고 해도, 영상 매체보다 글자 매체는 훨씬 낫습니다. 글자 매체로서 소설이 비현실 설정의 추상적인 측면을 서술하기 때문에, SF 장르에서 소설은 핵심 매체입니다. 이건 다른 매체들보다 소설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화, 영화, 연극, 게임, 기타 등등에는 다양한 장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소설은 핵심을 차지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의 백미는 과학 이론을 토대로 한 상상력의 구현입니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사이언스 픽션의 좋은 예시가 되겠네요. 저는 최근 SF 트렌드가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미래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예전과 판도가 바뀌었어요. 과학 이론이 충분히 덕스럽게 들어가지 않는다면, SF 매니아들의 환심을 사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SF 대상층은 과학 덕후들일 겁니다. 이과생 과학 덕후들에게 판타지 기반의 과학물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SF 장르는 판타지 기반의 과학 이야기가 아닌 과학 기반의 판타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우동이즘 작가는 설명합니다.

 

SF 장르에서 하드 계열이 백미인가요? 네, 이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SF 백미로서 하드 계열은 다른 매체들보다 '소설'을 가리킵니다. 만화, 영화, 연극,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 역시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입니다. 왜 하드 SF '소설'이 백미가 되나요? 이미 위 문단들이 설명한 것처럼, 소설이 글자 매체이고, 글자들이 이론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론을 표현할 때, 글자들은 가장 뛰어난 수단입니다. 그림과 음악과 동영상보다 글자들은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훨씬 뛰어난 수단입니다. 영상 매체는 시각적인 측면에 치중합니다.



그래서 영화 같은 매체에서 설명, 이론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과 영화 <쥬라기 공원>을 대조해보세요. 골수 SF 독자들은 소설 <쥬라기 공원>이 얄팍하다고 비판하나, 영화 <쥬라기 공원>보다 얄팍한 소설 <쥬라기 공원>은 훨씬 많은 이론들을 풀어놓습니다. 심지어 영화 <인터스텔라>보다 얄팍한 소설 <쥬라기 공원>은 훨씬 많은 이론들을 풀어놓습니다. 영화보다 소설은 훨씬 많은 이론들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이론, 사상, 심리 같은 추상적인 측면들에서 영화 같은 시각 매체는 소설 같은 글자 매체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설명, 서술은 글자(언어)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위 동영상에서 우동이즘 작가는 SF '소설'을 절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왜 우동이즘 작가가 소설을 무시하나요? 이 세상에서 놀라운 SF 소설들은 많고 많습니다. 고전 <프랑켄슈타인>부터 21세기 초반 <다섯 번째 계절>까지,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소설입니다.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비현실 설정의 추상적인 측면들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슐라 르 귄이 SF '소설 작가'가 아니었다면, 만약 시어도어 스터전이 SF '소설 작가'가 아니었다면, 두 '소설 작가'는 추상적인 측면들을 서술하지 못했을 겁니다. 위 동영상에서 우동이즘 작가는 추상적인 측면들을 무시합니다.



우동이즘 작가는 SF 팬들이 과학 덕후들이라고 설명하고 최근 SF 흐름이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동이즘 작가는 사이언스 판타지라는 용어를 직접 언급하지 않으나, 전반적인 문맥은 사이언스 판타지가 최근 SF 흐름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사이언스 판타지가 최근 SF 흐름이 아닌가요? 만약 이 설명이 옳다면, <다섯 번째 계절>이 무엇이 되나요? 이건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로서 <다섯 번째 계절>은 2016년 휴고상 소설입니다. 비단 <다섯 번째 계절>만 아니라 '부서진 대지 3부작'은 휴고상을 연이어 수상했습니다. 이게 구닥다리인가요?

 

우동이즘 작가는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최근 흐름이라고 설명하나, 하드 SF 소설보다 사이언스 판타지 소설로서 '부서진 대지 3부작'은 휴고상을 (비단 한 번만 아니라) 연이어 수상했습니다. 왜 오직 <인터스텔라>만 최근 흐름이 되고, 왜 <다섯 번째 계절>이 최근 흐름이 되지 못하나요? <다섯 번째 계절>이 소설, 글자 매체이기 때문에?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이 감히 위대한 영화느님 <인터스텔라>에게 까불지 못하나요? 위대한 영화느님 <인터스텔라> 앞에서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이 무릎을 꿇어야 하나요? 화려한 영상 앞에서 산문들이 고개를 숙여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소설(글자 매체)은 핵심 SF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드 SF 소설조차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과학 용어들을 포장한다고 해도, 결국 하드 SF 소설은 비현실 차원으로 뛰어오릅니다. 소설 <블러드 뮤직>처럼, 심지어 하드 SF 소설은 사이언스 판타지에 도달합니다. SF 장르에서 '센스 오브 원더'는 인식의 지평선을 확장합니다. 반면, <인터스텔라>는 외계 행성 개척을 묘사하나, 등장인물들은 자유주의를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이게 센스 오브 원더인가요? 아무리 <인터스텔라>가 우주 과학 용어들을 덕지덕지 바른다고 해도, 자유주의 좀비가 좋은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물론 해석들은 다양합니다. 해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것처럼, 다양한 해석들은 중요합니다. 우동이즘 작가는 SF 장르를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해석들은 충분한 근거들을 확보해야 합니다. 근거들이 충분할 때, 다양한 해석들은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동이즘 작가가 충분한 근거들을 제시하나요? 아니, 우동이즘 작가는 <다섯 번째 계절>을 무시합니다. 우동이즘 작가는 오직 영상 매체만 우대합니다. 이게 충분한 근거가 되나요? 우동이즘 작가는 왜 소설보다 영화가 뛰어난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건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우동이즘 작가는 SF 매니아들이 이과생 과학 덕후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아, 그래요? <다섯 번째 계절>을 비롯해 '부서진 대지 3부작'이 이과생 과학 덕후들을 위한 소설들인가요? <다섯 번째 계절>이 어려운 과학 용어들을 떠벌이나요? <다섯 번째 계절>과 <블라인드 사이트>가 비슷한가요? 그건 아닙니다. 하드 SF <블라인드 사이트>와 달리, <다섯 번째 계절>은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블라인드 사이트>보다 <다섯 번째 계절>은 서사 판타지(high fantasy)들에게 훨씬 가깝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듄>을 사이언스 픽션이나 판타지라고 분류하는 것처럼, <다섯 번째 계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 초반 (서구) SF 소설 흐름에서 스팀펑크는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너무 많은 스팀펑크들이 범람했기 때문에, 심지어 찰스 스트로스는 스팀펑크들이 지겹다고 한탄했습니다. 심지어 <오더 오브 스틱스> 같은 중세 유럽 판타지조차 스팀펑크를 풍자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2000년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이 스팀펑크 열풍에 공헌(?)했다고 생각합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을 썼고 스팀펑크와 온갖 판타지들을 결합했습니다. 이게 아주 매력적이기 때문에,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이후, 스팀펑크는 엄청난 열풍, 대세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해석은 틀릴지 모릅니다.



비록 이 (개인적인) 해석이 옳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을 비롯해 스팀펑크들은 커다란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스팀펑크는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과 <블라인드 사이트>는 대조적입니다. <블라인드 사이트>는 어려운 과학 용어들을 퍼붓습니다. 아무리 <페르디도 기차역>이 생소한 용어들을 퍼붓는다고 해도, 이건 이과생 덕후들을 위한 과학 용어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페르디도 기차역>이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에 가깝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페르디도 기차역>과 <다섯 번째 계절>은 비슷합니다.

 

우동이즘 작가는 <페르디도 기차역>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영화느님 <인터스텔라>는 SF 장르를 대표할 수 있으나, 소설, 글자 매체 <페르디도 기차역>은 감히 SF 장르를 대표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동이즘 작가는 SF '소설'을 무시합니다. 이건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집니다. 최근 SF 흐름에서 Cli-Fi 소설들은 대세입니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조차 기후 변화를 걱정하기 때문에, SF 장르는 기후 정의를 반영하고, Cli-Fi 소설들은 대세가 되었습니다. Cli-Fi 소설들은 하드 SF 소설이 되거나 되지 않습니다. 하드 SF 작가로서 킴 스탠리 로빈슨은 Cli-Fi 소설들을 쓰나, 킴 스탠리 로빈슨은 전부가 아닙니다.





Cli-Fi 소설들에게 엄중한 과학 지식은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비록 어떤 소설이 엄중한 과학 지식을 동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 이 소설이 심각한 환경 재앙들을 묘사한다면, 이 소설은 Cli-Fi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새시 로이드는 <카본 다이어리 2015>를 썼습니다. 이 소설은 엄중한 과학 지식들을 선사하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고등학생이고, 고등학생에게 엄중한 과학 지식들보다 다른 문제들은 훨씬 시급합니다. 이 소설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늘이 폭우를 퍼붓고, 홍수가 마을을 덮치는 때조차, 소설 분위기는 심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유머와 낙관을 잃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이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엄중한 과학 지식들을 동원하고 거창한 설정을 펼치기보다 일상에 치중합니다. 만약 독자가 굉장한 하드 SF 소설을 기대한다면, <카본 다이어리 2015>는 너무 실망스러울 겁니다. 이 소설은 굉장한 하드 SF 소설보다 소소한 10대 성장 소설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카본 다이어리 2015>는 Cli-Fi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Cli-Fi 대세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이 Cli-Fi 대세에 합류할 수 있는 것처럼, Cli-Fi 울타리에서 엄중한 과학 지식들은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비의 마흔 징표들 Forty Signs of Rain> 같은 소설들은 Cli-Fi 소설의 전부가 아닙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 같은 10대 성장 소설부터 <비의 마흔 징표들> 같은 훨씬 진지한 소설들까지, Cli-Fi 소설들은 다양합니다. 다양한 Cli-Fi 소설들은 최근 SF 흐름입니다. 왜 이 흐름이 외면을 받나요? 왜 <인터스텔라>가 최근 SF 흐름이 되고, 왜 Cli-Fi 소설들이 되지 못하나요? <인터스텔라>가 막대한 제작 비용을 퍼붓기 때문에? 만약 어떤 문화 예술이 엄청난 자본을 퍼붓는다면, 이 문화 예술이 중요한가요? 자본이 문화 예술을 좌우해야 하나요? 문화 예술이 자본을 추구해야 하나요? 만약 문화 예술이 자본을 추구해야 한다면, 어떻게 자본주의가 나타났나요? 왜 자본주의가 존재하나요?

 

많은 사람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자본주의가 뚝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사람들은 합리적인 서구 백인 남자들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자본주의는 나타났습니다. 17세기 서구 문명이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수탈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막대한 부는 자본주의로 이어졌습니다. 18세기 이후, 초기 상업 자본주의가 본격적인 산업 자본주의로 확장하는 동안, 산업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바뀌었습니다.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식민지 논쟁은 커다란 화제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럽 수구, 보수, 진보는 제국주의에게 들러붙고 식민지 수탈에게 찬성합니다.



심지어 진보 정당들조차 수구, 보수와 손을 잡았고 식민지 수탈에게 찬성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식민지 수탈에 반대했고 혁명을 외쳤으나, 진보 정당들은 사회주의자들을 배신했고 수구, 보수에게 들러붙었습니다. 이 사건은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에게 필연적으로 기반한다고 증명합니다. 심지어 진보 정당들조차 식민지 수탈에 찬성한 것처럼, 식민지 수탈 없이,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식민지 민중들을 필연적으로 수탈하고 열대 밀림들을 필연적으로 파괴합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는 인종 차별, 식민지 수탈, 환경 오염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최근에 엄청난 폭우들은 심각한 화제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코로나 19 사태보다 엄청난 폭우들은 훨씬 심각한 화제입니다. 적어도 코로나 19 사태는 건물을 무너뜨리지 않고, 차량을 휩쓸지 않고, 토양을 침식하지 않습니다. 반면, 폭우들은 사회-자연 인프라에게 물리적인 피해를 미칩니다.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가 엄청난 폭우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모른다고 추측합니다. 만약 이 추측이 옳다면, 가까운 미래에서 기후 변화가 훨씬 심각해진 이후, 기후 변화는 훨씬 충격적인 피해를 미칠 겁니다. 기후 변화 때문에, 인류 사회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소모할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는 대대적인 행성급 환경 재앙입니다.



어떻게 기후 변화가 나타났나요? 왜 인류 사회가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하나요? 하늘에서 기후 변화가 뚝 떨어졌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미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파괴했습니다. 여전히 세계화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중입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이 상황에서 문화 예술이 자본을 추구해야 하나요? 문화 예술이 행성급 환경 오염을 추구해야 하나요? 우동이즘 작가는 소설을 무시하고 고개를 끄덕일지 모릅니다.

 

Cli-Fi 소설들보다 <인터스텔라>는 막대한 제작 비용을 퍼붓습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비의 마흔 징표들>보다 <인터스텔라>는 막대한 제작 비용을 퍼붓습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보다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인터스텔라>는 제작 비용을 퍼붓습니다. 그래서 이건 절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터스텔라>가 자본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터스텔라>는 자본주의 모순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인터스텔라>가 행성급 환경 재앙을 보여준다고 해도, 아무리 <인터스텔라>가 막대한 자본을 퍼붓는다고 해도, 이 영화는 이윤 축적 경제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반면, <비의 마흔 징표들>은 이윤 축적 경제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시사적인 관점에서 <인터스텔라>보다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비의 마흔 징표들>은 훨씬 낫습니다. 영화가 거대 사업이고, 소설을 쓰기가 쉽기 때문에,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Cli-Fi 소설은 주류, 자본주의를 훨씬 비판할 수 있습니다. 만약 Cli-Fi가 블록버스터 영화가 된다면, 이 영화는 자본주의를 쉽게 비판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환경 재앙은 그저 신나는 볼거리에 불과할 겁니다. 반면, 소설이 거대 자본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은 주류에 반박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감독보다 소설 작가는 시대의 양심, 지식인에게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동이즘 작가는 이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우동이즘 작가는 오직 영상 매체 <인터스텔라>만 언급합니다. Cli-Fi 소설들이 대세가 되든 아니든, 우동이즘 작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직 (화려한) 영상 매체만 SF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무리 범주가 좁아진다고 해도, 아무리 오직 영상 매체만 범주가 된다고 해도, 우동이즘 작가는 잘못 설명했습니다. <인터스텔라>는 2014년 영화입니다. <쥬라기 월드>는 2015년 영화입니다. <쥬라기 월드>는 압도적으로 흥행했습니다. 이게 과학 덕후들을 위한 영화인가요? <인터스텔라>처럼, <쥬라기 월드>가 하드 SF 계열인가요? 이건 헛소리입니다.



오히려 고생물학 덕후들은 <쥬라기 월드>를 까댑니다. <쥬라기 월드>가 고생물학을 제대로 고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생물학 덕후들에게 <쥬라기 월드>는 좋은 안주거리입니다. 하지만 2015년 영화 <쥬라기 월드>는 대박을 쳤습니다. 이게 최근 SF 흐름이 되지 못하나요? <쥬라기 월드>가 최근 SF 흐름이 되지 못하나요? 왜 오직 <인터스텔라>만 최근 SF 흐름이 되고, 왜 <쥬라기 월드>가 최근 SF 흐름이 되지 못하나요? <어벤져스> 시리즈는 어떤가요? 최근 SF 실사 영화들 중에서 <어벤져스> 시리즈는 가장 초대박일 겁니다. 이 영화 시리즈가 엄중한 이과생 덕후들을 위한 시리즈인가요?

 

아니, <쥬라기 월드>보다 <어벤져스> 시리즈는 사이언스 판타지에 훨씬 가깝습니다. 하지만 왜 <인터스텔라>가 최근 SF 흐름이 되고, 왜 <어벤져스> 시리즈가 최근 SF 흐름이 되지 못하나요? <인터스텔라>보다 <어벤져스> 시리즈는 훨씬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나, 왜 오직 <인터스텔라>만 최근 SF 흐름을 대표하나요? 왜 <쥬라기 공원>과 <어벤져스> 시리즈보다 오직 <인터스텔라>만 최근 SF 흐름을 대표하나요? 왜 하드 SF 계열이 특혜를 받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드 SF 계열에게 특혜를 받기 위한 절대적인 근거가 있나요? 언제나 하드 SF 계열이 SF 문화를 뒷받침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많은 상황들에서 스페이스 오페라를 비롯해 사이언스 판타지는 SF 문화를 뒷받침했습니다. <쥬라기 월드>는 테크노 스릴러이나, 비디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2>가 <쥬라기 공원>을 은근슬쩍 조롱하는 것처럼, <쥬라기 월드>는 하드 SF 계열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리 <쥬라기 월드>가 고생물학 고증을 무시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으로서 <쥬라기 월드>는 SF 문화를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어벤져스> 시리즈는 사이언스 판타지에 훨씬 가깝습니다.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어벤져스> 시리즈는 마법사들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벤져스> 시리즈처럼, 2019년 영화 <고지라: 괴수왕>은 사이언스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특히, 티타누스 모수라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모스라는 판타지 거대 괴수 같습니다. (원작 모스라 역시 판타지 거대 괴수입니다.) 여러 관객들은 <고지라: 괴수왕>과 <어벤져스>를 비교합니다. 여러 관객들은 2019년 <고지라: 괴수왕>이 괴수 판본 <어벤저스>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례는 (<어벤져스> 시리즈와 함께) <고지라: 괴수왕>이 최근 SF 흐름을 대표할 수 있다고 증명합니다. 하지만 우동이즘 작가는 오직 하드 SF 흐름만 중시합니다. 사이언스 판타지가 너무 미천한 불가촉 천민인가요? 미천한 사이언스 판타지가 감히 고상하신 하드 사이언스 픽션느님에게 까불지 못하나요?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절대 지존이기 때문에?



저는 SF 장르에서 하드 SF가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저는 사이언스 판타지보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랭크 허버트와 옥타비아 버틀러와 차이나 미에빌과 노라 제미신보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훨씬 우월합니다. 심지어 저는 신화, 민담, 동화, 공포, 판타지, SF, (무협) 같은 사변 문학들 중에서 하드 SF 소설이 가장 우월한 사변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변 문학들 중에서 하드 SF 소설이 자본주의 문명을 가장 구체적으로 진단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문명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20세기 이후, 세계화 인류 문명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지배적입니다.

 

자본주의와 산업과 과학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과학 혁신 없이, 산업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변 문학들보다 하드 SF 소설은 자본주의 문명을 가장 구체적으로 진단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변 문학들보다 하드 SF 소설은 우월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에스에프 에스프리>가 지적하는 것처럼, 하드 사이언스 픽션보다 사이언스 판타지는 SF 문화를 뒷받침했습니다. 여전히 사이언스 판타지는 SF 문화를 뒷받침하는 중입니다. 하드 SF 절대 지존은 그저 얄팍한 시각에 불과합니다. 우동이즘 작가의 해석은 그저 '어둠 속의 편견'에 불과합니다.

 

 

만약 우동이즘 작가가 이 게시글을 읽는다면, 우동이즘 작가는 이 게시글이 까칠하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네, 맞습니다. 이 게시글은 까칠합니다. 솔직히 우동이즘 작가는 사이언스 판타지를 의도적으로 왜곡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우동이즘 작가가 그저 오해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상 매체는 사이언스 픽션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오직 이과생 덕후들만을 위한 문화 예술이 아닙니다. 오로진 시에나이트와 뉴크로부존 도시와 탄소 일기와 복제 공룡 사파리와 티타누스 모수라와 페니 파커(와 SP//dr) 역시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 게임 <쥬라기 월드 에볼루션> 스크린샷 출처: ADJ,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2148960378

 

※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팬 아트 출처: Ang Chen,

https://www.artstation.com/artwork/OlxqJ

 

※ 사진 <Flood Danube Sandbag Park Basketball Palisade> 출처: lmaresz,

https://pixabay.com/photos/flood-danube-sandbag-park-13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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