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조상의 밤>과 <다키스트 던전>과 계몽주의 본문
위 그림은 'SF' 게임 <산소 미포함> 스크린샷입니다. 이 게임은 2D 측면 시점을 보여줍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오직 2D 측면 시점으로만 게임 속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탑-다운 시점이나 아이소메트릭 시점이나 어깨 시점이나 파노라마 시점으로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속의 세계를 구경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게임 등장인물들이 게임 속의 세계가 2D 측면이라고 인식하나요? 게임 시점과 게임 등장인물 시점이 일치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게임 속의 세계에서 2D로서 등장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수린 작가는 단편 소설 모음집 <여름의 빌라>를 썼습니다.
<여름의 빌라>는 글자 매체입니다. <여름의 빌라>에서 글자들로서 단편 소설 속의 세계는 존재합니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세계가 글자들이라고 인식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소설이 글자 매체라고 해도, 소설 등장인물은 세계가 글자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산소 미포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 게임이 측면 시점이라고 해도, 게임 등장인물은 세계가 측면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SF' <산소 미포함>에서 등장인물이 세계를 측면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과 SF는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분명히 <산소 미포함>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분명히 <산소 미포함>은 2D 측면 시점을 보여줍니다. 양쪽 모두 사실입니다. <산소 미포함>은 사이언스 픽션이고, 동시에 이건 2D 측면 시점을 보여줍니다. <산소 미포함>은 사이언스 픽션과 2D 측면 시점을 함께 포함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과 2D 측면 시점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2D 측면 시점은 사이언스 픽션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많고 많은 비디오 게임들은 측면 시점을 보여주나, 어떤 게임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시즌스 애프터 폴>은 2D 측면 시점을 보여주나, 이 게임은 우화, 판타지입니다.
<산소 미포함>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왜 이게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등장인물들이 외계 개척 기지를 건설하고 여러 기이한 식물들과 동물들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외계 개척 기지와 기이한 식물들은 SF 설정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것 때문에, <산소 미포함>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동시에 이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여름의 빌라>처럼, <천 개의 파랑>은 글자 매체입니다. <여름의 빌라>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닌 것처럼, 글자 매체와 사이언스 픽션은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조인간 설정입니다.
명칭이 가리키는 것처럼, 북튜버들은 책들을 소개합니다. 소설은 책입니다. 소설이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소설은 책입니다. 만약 북튜버가 소설(책)을 소개한다면, 이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백수린 작가가 소설(책)을 쓰기 때문에, 만약 북튜버가 백수린 작가를 소개한다면, 이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반면, 만약 북튜버가 테이블 게임 규칙책(rulebook)을 소개한다면, 이건 이상할 겁니다. 테이블 게임 규칙책은 책, 북입니다. 명칭이 가리키는 것처럼, 북튜버는 북(책)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북'튜버는 테이블 게임 룰'북'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소설'책'과 달리, 규칙'책'은 책이 되지 못합니다.
서점은 서적들을 진열합니다. 서점은 백수린 작가의 단편 소설 모음집 <여름의 빌라>를 진열합니다. <여름의 빌라>가 소설'책'이기 때문입니다. <여름의 빌라>가 소설'책'인 것처럼, <던전스 앤 드래곤스: 플레이어즈 핸드북>은 룰'북', 규칙'책'입니다. <플레이어즈 핸드북>이 규칙'책'이기 때문에, 서점이 <여름의 빌라>를 진열하는 것처럼, 서점은 <플레이어즈 핸드북>을 진열합니다. 서점은 서적으로서 <여름의 빌라>와 <플레이어즈 핸드북>을 함께 진열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북튜버들은 <플레이어즈 핸드북>을 소개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규칙책보다 <여름의 빌라>를 소개할 겁니다.
비디오 게임 <다키스트 던전>은 책, 북이 아닙니다. 비디오 게임은 책이 아닙니다. <플레이어즈 핸드북>은 책입니다. <여름의 빌라>는 책입니다. 그래서 <다키스트 던전>보다 <플레이어즈 핸드북>이 <여름의 빌라>에 가깝나요? 북튜버들이 <다키스트 던전>보다 <플레이어즈 핸드북>이 <여름의 빌라>에 가깝다고 분류하나요? 아니, 많은 북튜버들은 <여름의 빌라>보다 <다키스트 던전>과 <플레이어즈 핸드북>이 가깝다고 분류할 겁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왜 북튜버들이 소설'책' <여름의 빌라>보다 규칙'책' <플레이어즈 핸드북>과 '게임' <다키스트 던전>이 가깝다고 분류하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자체로서 <플레이어즈 핸드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 테이블 던전 탐험 게임을 위해 <플레이어즈 핸드북>은 존재합니다. 규칙책으로서 <플레이어즈 핸드북>은 던전 탐험 게임을 설명해야 합니다. 만약 규칙책이 던전 탐험 게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게임 플레이어들이 세션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한다면, 규칙책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겁니다. 분명히 규칙책은 책이나, 규칙책은 던전 탐험 게임에 종속됩니다. 던전 탐험 게임 없이, 규칙책은 나타나지 못합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처럼, <다키스트 던전>은 (비디오) 던전 탐험 게임입니다.
테이블 게임과 비디오 게임은 다르나,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다키스트 던전>은 던전 탐험 게임입니다. 게임 범주에서 양쪽은 비슷합니다. <여름의 빌라>는 게임이 아닙니다. 이건 테이블 게임이 아니고 비디오 게임이 아닙니다. 백수린은 소설 작가입니다. 백수린은 게임 제작자가 아닙니다. 백수린 작가는 젊은 작가상을 받았습니다. <시간의 궤적>은 2019년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입니다. 젊은 작가상은 게임을 수상하지 않습니다. 게임 제작자보다 소설 작가로서 백수린은 젊은 작가상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플레이어즈 핸드북>이 규칙'책'이라고 해도, 이것과 <여름의 빌라>는 다릅니다.
<플레이어즈 핸드북>과 <여름의 빌라>는 똑같은 책이고, <다키스트 던전>은 던전 탐험 게임이나, <플레이어즈 핸드북>이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 종속되고,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던전 탐험 게임이기 때문에, <여름의 빌라>보다 <다키스트 던전>과 <플레이어즈 핸드북>은 가깝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북튜버들은 <플레이어즈 핸드북>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어떤 북튜버들은 이 '책'을 소개할지 모르나, 일반적인 북튜브는 <플레이어즈 핸드북>보다 <여름의 빌라>와 훨씬 어울립니다. <플레이어즈 핸드북>과 <여름의 빌라>가 보여주는 것처럼, 형식과 매체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북튜버들이 핸드'북'을 소개하지 않는 것처럼, 책이라는 매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여름의 빌라>와 <플레이어즈 핸드북>은 산문을 다룹니다. <달의 뒤편>은 시집입니다. <달의 뒤편>에서 산문보다 시(詩)는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달의 뒤편>이 시인들을 설명하기 때문에, <달의 뒤편>은 산문을 다루나, 이게 시집이기 때문에, (아무리 산문시가 섞였다고 해도) <달의 뒤편>에서 시는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김명순, 나혜석, 김일엽, 강경애, 백국회는 시인들입니다. 시가 산문이 아니기 때문에, <달의 뒤편>보다 <여름의 빌라>와 <플레이어즈 핸드북>이 가깝나요?
그건 아닙니다. <플레이어즈 핸드북>보다 <달의 뒤편>과 <여름의 빌라>는 훨씬 가깝습니다. 아무리 <여름의 빌라>와 <플레이어즈 핸드북>이 산문을 똑같이 다룬다고 해도, 아무리 <달의 뒤편>에서 산문보다 시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플레이어즈 핸드북>은 (던전 탐험) 게임에 속하고, <여름의 빌라>와 <달의 뒤편>은 문학에 속합니다. 문학과 게임은 다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플레이어즈 핸드북>을 문학적으로 읽을 수 있으나, 문학 평론가들은 <플레이어즈 핸드북>이 문학에 속한다고 분류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게임 규칙'책'보다 <여름의 빌라>와 <달의 뒤편>은 훨씬 가깝습니다.
<달의 뒤편>과 <여름의 빌라>와 <플레이어즈 핸드북>은 모두 똑같은 형식과 매체(책)이나, <플레이어즈 핸드북>은 다른 형식과 매체(게임)에 속합니다. 책이 게임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형식과 매체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는 여러 문학들을 논의합니다. 17세기 <태양의 도시>부터 21세기 초반 <오벨리스크의 문>까지, 이 블로그에서 여러 문학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이 블로그에서 여러 문학들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만약 소설 작가 지망생이 이 블로그를 읽는다면, 이게 소설 창작에게 도움이 되나요? 글쎄요, 대답은 다소 회의적입니다.
이 블로그는 소설 창작을 돕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이 블로그에서 여러 문학들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이 블로그는 소설 작법을 거의 설명하지 않습니다. 문학 창작 강의와 이 블로그는 다릅니다. 문학 창작 강의가 여러 문학들을 다루는 것처럼, 분명히 이 블로그는 여러 문학들을 다루나, 문학 창작 강의와 이 블로그는 다른 목적을 추구합니다. 문자 그대로 문학 창작 강의는 소설 작법을 설명합니다. 이 블로그는 SF (생태학) 장르를 분류합니다. 이 블로그에서 주된 목적은 문학보다 SF (생태학) 장르입니다. SF 장르를 비교하고 대조하고 분류하기 위해 이 블로그는 문학들을 언급합니다.
초기 사이언스 픽션들은 문학입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와 <태양의 도시>와 <불타는 세계>부터 <프랑켄슈타인>과 <해저 2만리>와 <우주 전쟁>까지,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문학입니다. <뒤돌아보며>와 <에코토피아 뉴스> 같은 과도기 SF 역시 문학입니다. 여전히 많고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소설입니다. 그래서 이 블로그는 여러 문학들을 논의합니다. 문학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은 SF (생태학) 장르입니다. 그래서 만약 소설 작가 지망생이 SF 소설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이 블로그가 문학들을 신나게 떠든다고 해도, 이 블로그는 소설 작가 지망생을 돕지 못할 겁니다.
이 블로그가 소설 작가 지망생을 돕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리 이 블로그가 문학들을 떠든다고 해도, 소설(책)이라는 형식과 매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형식과 매체보다 내용과 장르는 훨씬 중요합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광기의 산맥>을 썼습니다. <다키스트 던전>과 <광기의 산맥>은 비슷합니다. 왜 양쪽이 비슷한가요? 던전 탐험 게임으로서 <다키스트 던전>은 무작위 지도를 선보입니다. <다키스트 던전>이 무작위 지도를 선보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던전 지리를 외우지 못합니다. 반면, <아이스윈드 데일>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던전 지리를 외울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던전 지리를 외울 수 있기 때문에, <아이스윈드 데일>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아, 그래. 이 복도에는 함정이 있을 거야. 도적은 몰래 정찰하고 함정을 해제해야 해." 이렇게 게임 플레이어는 예측하고 계획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다키스트 던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예측하지 못하고 계획하지 못합니다. 만약 모험가 일행이 함정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어디에서 함정이 튀어나올지 알지 못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던전 지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만약 운이 너무 나쁘다면, 던전에서 모험가 일행은 엉뚱하게 헤맬지 모릅니다.
몇 십 분 동안, 모험가 일행은 헛다리를 짚을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모험가 일행이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다키스트 던전>에는 이 단점이 있습니다. <다키스트 던전>에게 시간 낭비라는 단점이 있고, <다키스트 던전>과 <광기의 산맥>이 비슷하기 때문에, <광기의 산맥>에게도 시간 낭비라는 단점이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광기의 산맥>이 (던전 탐험) 게임보다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독자는 남극 탐사대를 조종하지 않습니다. 올드원 지하 유적을 보여주기 위해 <광기의 산맥>은 무작위 지도 생성 프로그램을 돌리지 않습니다. <광기의 산맥>은 선형적인 소설입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무작위 지도 생성 프로그램을 돌리고 비선형적인 던전을 제시하나, <광기의 산맥>은 선형적입니다. 소설은 선형적인 전개를 제시하고, 소설 독자는 이것을 일방적으로 읽습니다. 소설 독자는 남극 탐사대에게 개입하지 못합니다. "아놔, 젠장! 여기에서 쇼거스는 튀어나올 거야! 남극 탐사 대원은 여기로 들어가지 말아야 해!" 이렇게 소설 독자는 외칠 수 있으나, 소설 독자는 남극 탐사 대원을 조종하지 못합니다. 뭐라고 소설 독자가 외치든, 결국 남극 탐사 대원은 무서운 쇼거스를 마주칩니다. 결국 남극 탐사 대원은 "테켈리-리!"를 듣습니다. 소설 독자는 이 조우를 바꾸지 못합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비선형이고, <광기의 산맥>은 선형입니다. 이건 <다키스트 던전>이 완전한 비선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일정한 흐름을 따릅니다. 모험가 일행은 6레벨을 찍고, 최종 던전으로 들어가고, 새로운 신을 물리쳐야 합니다. 일정한 흐름에서 <다키스트 던전>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다키스트 던전>은 비선형입니다. <다키스트 던전>과 달리, 세부적인 부분에서 <광기의 산맥>은 선형입니다. <다키스트 던전>이 비선형이고, <광기의 산맥>이 선형이기 때문에, 양쪽은 너무 다릅니다. 왜 <다키스트 던전>과 <광기의 산맥>이 비슷한가요?
비디오 게임 <FTL: 패스터 댄 라이트>는 비선형입니다. 이 게임은 무작위 우주 지도를 제시합니다. <다키스트 던전>과 <패스터 댄 라이트>에서 던전 지도와 우주 지도는 똑같은 무작위 지도입니다. 비단 <다키스트 던전>과 <패스터 댄 라이트>만 아니라 많은 로그라이크들, 로그라이트들은 무작위 지도를 제시합니다. 단편 소설 모음집 <여름의 빌라>는 선형적입니다. 소설 독자는 단편 소설 사건에게 개입하지 못합니다. <여름의 빌라>와 <광기의 산맥>은 똑같이 선형적입니다. 비단 <여름의 빌라>와 <광기의 산맥>만 아니라 많은 문학들은 선형적입니다. 독자는 문학을 일방적으로 읽습니다.
엘리자베스 베어는 <조상의 밤 Ancestral Night>을 썼습니다. 이건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입니다. <조상의 밤>이 소설이기 때문에, <조상의 밤>은 선형입니다. <패스터 댄 라이트>는 비선형이나, <조상의 밤>과 <여름의 빌라>는 똑같은 선형입니다. <패스터 댄 라이트>보다 <조상의 밤>과 <여름의 빌라>가 훨씬 가까운가요? 북튜버들은 고개들을 끄덕일 겁니다. 북튜버들이 소설책을 중시하고, <조상의 밤>과 <여름의 빌라>가 소설책이고, <패스터 댄 라이트>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에, 북튜버들은 <패스터 댄 라이트>를 멀리 떨어뜨리고 <조상의 밤>과 <여름의 빌라>를 함께 묶을 겁니다.
하지만 소설책보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기준이 될 때, <여름의 빌라>보다 <패스터 댄 라이트>와 <조상의 밤>은 훨씬 가깝습니다. SF 장르는 <여름의 빌라>를 멀리 떨어뜨리고 <패스터 댄 라이트>와 <조상의 밤>을 함께 묶습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소설책과 로그라이크 게임은 SF 장르를 나누지 못합니다. SF 장르는 형식과 매체(소설책과 로그라이크 게임)를 뛰어넘고 내용과 소재와 사건과 주제에게 주목합니다. 아무리 <조상의 밤>이 소설책이고, 아무리 <패스터 댄 라이트>가 로그라이트 게임이라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는 소설책과 로그라이트 게임이 비슷하다고 묶을 수 있습니다.
이건 형식과 매체가 장르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형식과 매체는 장르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메리 셸리와 에드워드 벨라미가 비디오 게임을 상상하지 못한 것처럼, 메리 셸리와 에드워드 벨라미가 오직 소설들만 썼던 것처럼, 형식과 매체는 장르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고 해도 SF 장르에서 총체적이고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형식과 매체보다 내용과 소재와 주제입니다. 내용과 소재 때문에, 소설책 <조상의 밤>과 로그라이트 게임 <패스터 댄 라이트>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똑같이 속합니다. SF 평론가는 내용, 소재, 장르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장르가 중요하다고 해도, 장르 역시 절대적인 경계선이 되지 않습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비선형이고, <광기의 산맥>은 선형이나, 양쪽은 우주적인 공포입니다. 그래서 여러 소설 독자들, 게임 플레이어들은 <다키스트 던전>과 <광기의 산맥>이 비슷하다고 분류합니다. <다키스트 던전>의 제작자들은 레드 훅 스튜디오입니다. 레드 훅 스튜디오는 <레드 훅의 공포>를 오마쥬하는지 모릅니다. 우주적인 공포는 SF 장르에 속합니다. <광기의 산맥>은 SF 소설입니다. 우주적인 공포가 SF 장르에 속하고, <광기의 산맥>이 SF 소설이기 때문에, <다키스트 던전>이 SF 장르에 속하나요?
<다키스트 던전>이 SF 장르에 속하기 때문에, <다키스트 던전>과 <조상의 밤>이 비슷한가요? 그건 아닙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SF 게임이 아닙니다. <다키스트 던전>과 <광기의 산맥>은 비슷하고, <광기의 산맥>은 우주적인 공포이고, 우주적인 공포는 SF 장르에 속하고, <광기의 산맥>은 SF 소설이나, <다키스트 던전>은 SF 게임이 아닙니다. <조상의 밤>과 <패스터 댄 라이트>는 확실한 사이언스 픽션이나, <다키스트 던전>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어쩌면 어떤 소설 독자들은 <광기의 산맥>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정말 <광기의 산맥>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닌가요?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SF 장르를 분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는 어떻게 SF 계보가 시작하는지 그려야 합니다. 언제 SF 계보가 시작했나요? 어떻게 SF 계보가 나타났나요? 언제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했나요? 만약 SF 평론가가 계보를 그린다면, 계보 시발점은 계몽주의, 서구 근대화가 될 겁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와 <태양의 도시>와 <불타는 세계>처럼, 아직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이미 계몽주의와 서구 근대화는 희미한 SF 형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는 계몽주의와 서구 근대화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오늘날 서구 근대화는 종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구 근대화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많은 사람들은 서구 근대화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근대화가 100% 옳은가요? 특히, 여기에서 계몽주의, 서구 근대화는 자본주의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중국 인민 공사가 계몽주의 사회, 서구 근대화 사회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중국 인민 공사는 계몽주의와 서구 근대화를 비판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서구 근대화=자본주의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종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너무 심각한 광신입니다.
대륙 단위에서 미국은 인종 싹쓸이를 저질렀습니다. 대륙 단위에서 북한은 인종 싹쓸이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미국은 막대한 온실 가스를 뿜었고 행성급 환경 오염을 저질렀습니다. 북한은 막대한 온실 가스를 뿜지 않았고 행성급 환경 오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북한이 깡패라고 해도, 적어도 미국보다 북한은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이건 윗동네 김씨 왕조 3대가 얼씨구나 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북한에게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미국보다 북한은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미국이 훨씬 폭력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북한을 1번 까는 동안, 우리는 미국을 100번 까야 합니다.
북한에게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으나, 기후 위기 앞에서 북한은 (상대적으로) 대단한 위험이 아닙니다. 기후 위기 앞에서 북한은 그저 한반도 반쪽짜리 문제에 불과합니다. 반면, 기후 위기는 행성급 환경 오염입니다. 기후 위기는 행성 생물권 전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북한보다 미국은 행성급 환경 오염 범죄자입니다. 비단 미국만 아니라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시발점입니다. 만약 북한이 정말 문제라면, 자본주의는 훠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얼씨이인 심각한 문제일 겁니다. 자본주의가 훨씬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북한을 1번 까는 동안, 우리는 미국을 100번 까대야 합니다.
북한이 독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나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유럽은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을 침략했고 아라비아를 침략했습니다. 수 십 만 민중들이 죽어나가든 말든, 자본주의는 끔찍한 전쟁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말하나요? 미국이 아라비아를 침략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금 당장 자본주의가 망해야 한다고 말하나요? 아니,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정말 정말 놀랍게도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정당화합니다. 북한보다 미국은 훨씬 많은 양민들을 학살했으나, 너무 너무 놀랍게도 사람들은 미국을 편들고 북한을 미워합니다.
미국이 흑인들을 착취하는 동안, 북한이 무엇을 했나요? 너무 너무 너무 놀랍게도(!) 북한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몇 십 년 전에, 이미 미국은 개망나니 짓거리를 벌이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개망나니 짓거리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미국을 편들고, 북한을 모욕합니다. 이건 너무 몰상식한 사고 방식입니다. 만약 북한이 나쁘다면, 미국은 훨씬 나쁩니다. 만약 사회주의가 나쁘다면, 자본주의는 훨씬 나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당장 자본주의가 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열심히 떠받듭니다. 자본주의는 몰상식한 사고 방식을 유발합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가 잘못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몰상식한 사고 방식을 유발합니다. 자본주의가 몰상식한 사고 방식을 유발하는 것처럼, 자유 민주주의는 너무 심각한 광신입니다. SF 평론가 역시 자본주의를 떠받들고 몰상식한 사고 방식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몰상식한 사고 방식에 빠진다면, SF 평론가가 계몽주의와 서구 근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나요? 자유 민주주의 속에서 SF 평론가가 SF 계보를 제대로 그릴 수 있나요? 그래서 SF 계보를 근본적으로 그리기 위해 SF 평론가는 자본주의, 자유 민주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 게임 <산소 미포함> 스크린샷 출처: minica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