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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서브노티카>와 <운수 좋은 날>, 보편성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서브노티카>와 <운수 좋은 날>, 보편성

OneTiger 2020. 6. 14. 19:43

[현실에서 외계 해양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게임 플레이어가 이 장면을 보고 감동하나요?]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을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얼마나 일본 제국에서 조선 하층민들이 처참하게 살아가는지 고발합니다. 운수가 좋다는 제목과 달리, 이 단편 소설은 비극입니다. 소설 주인공 김첨지는 작은 행운을 만나고 운수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설 시점은 이게 행운이 아니라고 암시합니다. 김첨지는 뭔가가 불안하다고 느끼고, 소설이 결말로 향하는 동안, 점차 긴장감은 커집니다. 결국 커다란 긴장감 속에서 김첨지는 비극에 부딪힙니다. 행운은 행운이 아니었고, 김첨치는 소리칩니다. "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작은 행운은 너무 커다란 비극으로 몰락합니다.


<운주 좋은 날>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은 이런 맞물림입니다. 이 단편 소설은 완전한 비극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김첨지를 밑바닥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이 단편 소설은 작은 행운을 내세웁니다. 작은 행운 덕분에, 김첨지는 어느 정도 상승합니다. 하지만 소설 시점이 복선을 깔기 때문에, 이건 불안한 상승 기류입니다. 불안한 상승은 파국으로 치닫고, 김첨지가 어느 정도 상승했기 때문에, 김첨지가 추락할 때, 아픔은 훨씬, 훨씬 커집니다. <운수 좋은 날>에서 '운수'는 김첨지를 떨어뜨리기 위한 복선입니다. 불안한 상승은 긴장감을 높이고, 결국 이건 치명적인 추락과 맞물리고, 비극은 훨씬 커집니다.



이 구성이 인상적이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은 <운수 좋은 날>을 호평합니다. <운수 좋은 날>에서 상승과 추락은 교묘하게 맞물리고, 김첨지가 밑바닥으로 떨어질 때, 독자들은 함께 밑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문제는 <운수 좋은 날>이 식민지 남자 성향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김첨지는 식민지 피지배 계급입니다. 일본 제국에서 김첨지는 힘겹게 살아갑니다. 일본 제국이 지배 계급, 강자이기 때문에, 김첨지는 피지배 계급, 약자입니다. <운수 좋은 날>은 김첨지가 서러운 피지배 계급, 약자라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김첨지는 완전한 약자가 아닙니다. 김첨지에게는 아내가 있고, 아내에게 김첨지는 강자입니다.


<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는 아내를 두들겨팹니다. 이건 구타, 가정 폭력입니다. 분명히 이건 구타, 가정 폭력입니다. 하지만 소설 시점은 가정 폭력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설 시점은 김첨지가 아내를 사랑한다고 묘사합니다. 비록 김첨지가 아내를 두들겨팬다고 해도, 이건 김첨지가 아내를 싫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식민지 인생이 고달프고 서럽기 때문에, 김첨지는 애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삐뚤어지고 폭력적인 사회에서 식민지 사람들은 삐뚤어지고 폭력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폭력적인 식민지 사회에서 피지배 김첨지가 밝고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나요?



그래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김첨지는 아내를 두들겨팹니다. 김첨지는 가정 폭력을 휘두르나, 이건 폭력보다 애정에 가깝습니다. 식민지 사회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김첨지는 그저 폭력을 휘두를 뿐입니다. 아무리 김첨지가 아내를 두들겨팬다고 해도, 이건 김첨지 잘못이 아닙니다. 아니, 잠깐. 이게 김첨지 잘못이 정말 아닌가요? 분명히 <운수 좋은 날>은 김첨지가 약자라고 바라봅니다. 하지만 오직 일본 제국 앞에서만 김첨지는 약자입니다. 아내 앞에서 김첨지는 약자가 아닙니다. 김첨지가 아내를 얼마든지 두들겨패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반항하지 못합니다. 아내는 일방적으로 얻어맞습니다.


아내가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때문에, 김첨지는 강자이고, 아내는 약자입니다. 김첨지에게 가정 폭력은 삐뚤어진 애정 표현이나, 아내는 어떤가요? 아내가 이것이 애정 표현이라고 받아들이나요? 아내가 김첨지를 이해하고 폭력을 용인하나요? <운수 좋은 날>은 아내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이 단편 소설에서 주인공은 김첨지, 남편입니다. 소설 시점은 남편을 조명하고 아내를 조명하지 않습니다. 이 단편 소설에서 아내는 비극적이고 서러운 남편을 강조하기 위한 도구에 가깝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한 도구입니다. 제국주의-식민지 남자를 강조하기 위해 <운주 좋은 날>은 아내를 이용합니다.



<운수 좋은 날>이 제국주의-식민지 남자를 부각하기 때문에, 폭력적인 남자-피해자 여자는 희미해집니다. 소설 시점이 아내를 조명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김첨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김첨지 시점에서 독자는 사건을 바라봅니다. 김첨지 시점에서 독자가 사건을 바라보고, 김첨지가 가정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 역시 가정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가정 폭력은 서러운 식민지 남자를 부각하기 위한 도구, 장치가 됩니다. 이 구성은 가정 폭력, 지배적인 남자를 미화하고 정당화합니다. 식민지 남자가 슬프기 때문에, 피해자 여자(아내)는 사라집니다.


<운주 좋은 날>에서 피해자 아내가 그저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단편 소설이 가부장 편견을 드러낸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독자들은 이 단편 소설이 감동적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아무리 독자가 가부장 편견을 비판한다고 해도, 한편으로 독자는 <운수 좋은 날>이 감동적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두 해석은 대조적입니다. <운수 좋은 날>이 가부장 편견을 드러내기 때문에, 독자는 감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독자는 가부장 편견을 비판하고, 동시에 독자는 이 단편 소설이 감동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독자가 감동하나요? 이게 잘못이 아닌가요?



어떻게 독자가 소설을 해석해야 하나요? 만약 소설이 뭔가를 말한다면, 독자가 오직 이것만 따라가야 하나요? 많은 독자들은 이게 올바른 독서라고 믿습니다. 소설이 뭔가를 말하기 때문에, 독자는 오직 이것만 따라가야 합니다. 소설은 뭔가를 설명하고, 독자는 그것을 용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이게 올바른 독서라면, SF 독자들은 황당무계한 현실 도피자들이 될 겁니다. SF 소설은 비(非)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는 장거리 우주선에서 생체 로봇들이 나타나고 사라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장거리 우주선과 생체 로봇들은 비현실입니다. 소설 <화재 감시원>은 시간 여행 장치를 이야기합니다.


시간 여행 장치는 비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장거리 우주선에 탑승하지 못하고 생체 로봇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시간 여행 장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시간 여행 장치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소설 <빈티>는 생체 우주선과 외계인들을 이야기합니다. 현실에서 생체 우주선과 외계인들은 비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생체 우주선에 탑승하지 못합니다. 생체 우주선이 징그러울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승객들은 생체 우주선을 거부할지 모르나, 다행히(?) 현실에서 아무도 생체 우주선에 탑승하지 못합니다. 생체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체 우주선은 그저 SF 설정에 불과합니다.



[현실에서 이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비현실입니다. SF 팬들이 황당무계한 현실 도피자들인가요?]



소설 <뉴욕 2140>은 침수된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기후 변화는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지고, 바다는 도시를 덮칩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범죄자입니다. 이미 17세기 대항해 시대(를 빙자하는 대학살 시대)는 수많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학살했고, 이건 지구에 지질학적인 충격을 미쳤습니다. 대항해 시대 동안, 서구 백인 남자들은 막대한 자원들을 수탈했고, 그래서 서구 문명은 자본주의를 만들었습니다. 18세기 이후, 자본주의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온실 가스를 뿜었고 지구 기온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역시 지질학적인 충격을 미쳤습니다. 17세기 대항해 시대,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인류세 시발점이 됩니다. 인류세는 인류 전체가 환경 오염 범죄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류세 시발점은 대항해 시대와 산업 자본주의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 범죄자입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원한다면, 인류 문명은 자본주의를 없애야 할 겁니다.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는 기후 변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환경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자유 시장 경제가 전염병 사태로 이어질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경고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전염병 경고가 현실이 된 것처럼, 해수면 상승은 도시를 덮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 침수된 도시는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뉴욕은 침수된 도시가 아닙니다. 비단 뉴욕만 아니라 다른 거대 도시들 역시 침수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2140년 뉴욕은 침수된 도시일지 모르나, 아직 2020년 시점에서 뉴욕을 비롯해 다른 거대 도시들은 침수되지 않았습니다. <뉴욕 2140>은 비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스톤 이터들을 이야기합니다. 스톤 이터들은 살아있는 바위 인간들입니다. 아니, 세상에! 살아있는 바위 인간들? 어떻게 인간이 바위가 되고, 바위 인간이 살아있을 수 있나요?


침수된 거대 도시는 현실에 어느 정도 기반합니다. <뉴욕 2140>은 비현실을 이야기하나, 적어도 <뉴욕 2140>은 기후 변화에 어느 정도 기반합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바위 인간들, 스톤 이터들은 너무 황당무계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너무 황당무계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이 황당무계하기 때문에, 독자는 감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다섯 번째 계절>이 황당무계한 공상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노라 제미신은 허풍쟁이 사기꾼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섯 번째 계절>은 감동적인 소설입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스톤 이터는 황당무계하나, 왜 <다섯 번째 계절>이 감동적인가요?



SF 독자들이 현실 도피자들인가요? SF 독자들이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SF 독자들은 보편적인 윤리를 찾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편견과 차별을 비판합니다. 아무리 스톤 이터들이 황당무계한 설정이라고 해도, <다섯 번째 계절>은 편견과 차별을 비판하고, 독자들은 평등이 보편적인 윤리라고 인식합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바위 인간들이 돌아다닌다고 해도, 아무리 이게 황당무계하다고 해도, 이 황당무계한 세상에서도 편견과 차별은 부정적인 것입니다. 심지어 황당무계한 세상에서조차 편견과 차별이 부당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평등이 보편적인 윤리라고 훨씬 깊게 인식합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문학이 보편적인 윤리를 설파하기 때문에 특정한 상황에서 문학이 자유롭다고 설명합니다. 아무리 부르키나파소 흑인 여자가 소설을 쓴다고 해도, 중국 남자 독자는 이 소설을 읽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 부르키나파소 흑인 여자와 중국 남자 독자 사이에는 여러 차이들이 있으나, 문학이 보편적인 윤리를 호소하기 때문에, 특정한 상황에서 문학은 벗어나고 보편성을 얻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고전 문학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고전 문학이 시대를 초월하는 것처럼, SF 소설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스톤 이터들이 황당무계하다고 해도, <다섯 번째 계절>은 황당무계한 시대를 초월합니다.



비단 문학만 아니라 다른 매체들 역시 보편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서브노티카>는 외계 해양 환경을 보여줍니다.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외계 해양 환경이 풍요롭고 웅장하다고 감탄합니다. 하지만 외계 해양 환경은 비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우주 생물학자들은 외계 생물 다양성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아직 우주 생물학자들은 외계 해양 생명체들을 찾지 못했습니다. <서브노티카>는 황당무계합니다. 현실에서 우주 생물학자들이 외계 해양 생명체들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서브노티카>는 황당무계합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들은 외계 해양 풍경에 감탄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외계 행성 4546B는 특정한 장소입니다. 하지만 고전 문학이 시대를 초월하는 것처럼, <서브노티카>는 특정한 배경 무대(외계 행성 4546B)를 초월합니다. 고전 문학이 보편성을 얻는 것처럼, <서브노티카>는 보편성을 얻습니다. 여기에서 보편성은 생물 다양성입니다. 생물 다양성에서 인류는 진화했고, 여전히 인류는 생물 다양성에 의지합니다. 자유 무역 경제가 생태계들을 교란하고, 생태계 교란이 전염병 사태로 이어지는 것처럼, 생물 다양성이 망가질 때, 인류 역시 살아가지 못합니다. 외계 행성 4546B에는 자유 무역 경제가 없으나, 특정한 상황(외계 행성)에서 <서브노티카>는 벗어나고 자유 무역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은 외계 행성 4546B를 방문하지 못하나, 외계 행성 4546B에서 <서브노티카>는 벗어나고 생물 다양성이 풍요롭다고 설파할 수 있습니다. 이건 보편성입니다. 아무리 외계 행성 바다가 황당무계하다고 해도, 심지어 이 황당무계한 외계 바다에서조차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은 긍정적입니다. 심지어 황당무계한 외계 바다에서조차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이 긍정적이기 때문에,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은 보편성이 됩니다. 비록 게임 플레이어들이 외계 행성 4546B를 방문하지 못한다고 해도, <서브노티카>가 보편성을 획득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들은 감탄사들을 내지를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과 게임 <서브노티카>가 스톤 이터들과 4546B 해양 생태계를 초월하고 보편성을 얻는 것처럼,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은 특정한 상황을 초월하고 보편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김첨지가 아내를 두들겨팬다고 해도, <운수 좋은 날>은 이 상황을 초월하고 보편성을 설파합니다. 식민지 피지배 사람들은 서럽고 서럽습니다. <운수 좋은 날>이 서럽고 서러운 피지배 사람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건 보편적인 윤리가 되고, 독자는 감동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4546B 해양 생태계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믿지 않는 것처럼, 독자는 가정 폭력이 옳다고 믿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비현실을 초월하고 보편적인 생물 다양성을 찬양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감탄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4546B 해양 생태계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으나, <서브노티카>가 특정한 상황을 초월하고 보편성을 얻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감동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가정 폭력이 옳다고 믿지 않으나, <운수 좋은 날>이 특정한 상황을 초월하고 보편성을 얻기 때문에, 독자는 감동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독자가 <다섯 번째 계절>을 읽고 감동한다고 해도, 이건 독자가 스톤 이터들을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서브노티카>를 플레이하고 감동한다고 해도, 이건 게임 플레이어가 4546B 해양 생태계를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4546B 해양 생태계는 보색 효과와 비슷합니다.


녹색 바탕에서 빨간색이 두드러지는 것처럼, 4546B 해양 생태계가 너무 특정한 배경 무대이기 때문에, 보편성(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은 훨씬 두드러집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4546B 해양 생태계를 바라보고 보편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운수 좋은 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독자가 <운수 좋은 날>을 읽고 감동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가 4546B 해양 생태계를 믿지 않는 것처럼, 이건 독자가 가정 폭력에 찬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보편성은 전부가 아닙니다. 아무리 <서브노티카>가 4546B 생태계를 초월한다고 해도, 이 보편성은 현실에 기반합니다. 현실 없이, 보편성은 사라집니다.



중세 사람들은 풍요롭고 웅장한 자연 환경에 감탄했을 겁니다. 21세기 초반 게임 플레이어가 4546B 해양 생태계를 바라보고 풍요롭고 웅장한 자연 환경에 감탄하는 것처럼, 중세 사람들은 풍요롭고 웅장한 자연 환경에 감탄했을 겁니다. 하지만 중세 사람들은 첨단 잠수정이 외계 해양 생태계를 연구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중세 문명이 잠수정을 건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서브노티카>가 보편성을 얻는다고 해도, 중세 사람들이 외계 해양 잠수정을 상상하지 못한 것처럼, 현실에서 보편성은 비롯합니다. 4546B 해양 생태계가 비현실인 것처럼, 현실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특정한 상황(4546B 해양 생태계)을 바라보고 보편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게임 플레이어가 살아가기 때문에, 4546B 해양 생태계에서 보편성은 두드러집니다.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4546B 해양 생태계를 바라보고 보편성을 느끼는 것처럼, 현실과 보편성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운수 좋은 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에서, 오직 현실에서만 독자는 이 단편 소설을 읽습니다. 그리고 현실은 너무 심각한 가부장 제도입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모성 사회(공유 사회)였다면,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독자는 <운수 좋은 날>을 읽고, 보편성을 느끼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색 효과는 두 색깔을 요구합니다. 녹색 없이, 오직 빨간색만 보색 효과를 연출하지 못합니다. 보색 효과에서 녹색과 빨간색이 떨어지지 못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보편성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현실 때문에, 보편성은 두드러집니다. 그리고 현실은 너무 심각한 가부장 제도입니다.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가 나타나는 것처럼, 행성급 환경 오염이 나타나는 것처럼, 현실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심각한 가부장 제도입니다.



※ 게임 <서브노티카> 스크린샷 출처:

Reverend_O_Malley,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852326734

Frostglow Ambience & ASMR,

https://www.youtube.com/watch?v=a2ZMVvtSw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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