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위대한 신, 판>과 가부장적인 현실 본문
[사이버펑크 거대 도시는 현란하고 놀랍습니다. 현실에서 현란한 사이버펑크 거대 도시는 비롯합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핵심을 파악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게 좋은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는 소설 핵심을 파악합니다. 여기에서 소설 핵심은 작가 의도입니다. 독자가 소설 핵심을 파악할 때, 이게 좋은 독서가 되고, 소설 핵심이 작가 의도이기 때문에, 독자는 작가 의도를 추구해야 합니다. 독자는 뭐라고 작가가 말하기 원하는지 파악하고 이것을 따라야 합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다른 문학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외수 작가는 <단풍>이라는 시(詩)를 썼습니다. <단풍>은 아무리 가을 단풍들이 예쁘다고 해도 우리가 미련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단풍들이 예쁘다고 해도, 가을은 지나갈 테고, 우리는 단풍들을 잃을 겁니다. 아무리 예쁜 단풍들이 화냥기를 드러낸다고 해도, 우리는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단풍>은 예쁜 단풍들이 사라질 거라고 이야기하고 깊은 아쉬움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단풍>이 화냥년을 비유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단풍>이 가부장적인 편견이라고 비판합니다. <단풍>이 예쁜 단풍들을 화냥년에 비유하기 때문에, 이 시는 가부장 시선을 포함합니다. 이외수 작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외수 작가는 자신이 <단풍>에 가부장 시선을 집어넣지 않았다고 반박합니다.
이외수는 화냥년이 핵심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작가 의도는 예쁜 단풍들과 사라지는 가을과 아쉬움입니다. 화냥년과 가부장 시선은 작가 의도가 아닙니다. 이외수는 작가 의도(예쁜 단풍들과 계절 변화와 아쉬움)을 직접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작가 의도를 따라야 하나요? 만약 문학 핵심이 작가 의도이고, 독자가 문학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면, 이외수가 작가 의도를 직접 설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작가 의도를 따라야 하나요? 사람들이 화냥년 비유를 비판해서는 안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화냥년 비유와 가부장 시선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만약 문학에서 작가 의도가 핵심이라면, 어떻게 사람들이 이외수 작가 의도를 추구하기보다 화냥년 비유와 가부장 시선을 비판할 수 있나요? 작가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보다 현실은 거대하고, 작가는 현실에 종속됩니다. 현실에서 작가는 문학을 만듭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작가는 문학을 만들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문학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시간과 공간보다 현실에서 작가는 문학을 만듭니다. 아무리 작가가 원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작가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작가는 문학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작가가 문학을 만들기 때문에, 현실은 문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현실에서 문학은 자유롭지 못하고 독립하지 못합니다. 문학은 현실에 종속됩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문학이 현실에 종속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문학은 또 다른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문학에게는 자치성(自治性), 독립성이 있습니다. 현실에서 전지적인 시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인간은 글자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학에서 전지적인 시점은 사건을 전개하고, 문학 등장인물들은 글자들입니다. 이 상황에서 독자는 문학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존중합니다. 문학이 또 다른 현실이기 때문에, 전지적인 시점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 베넷은 그저 글자들에 불과하나, 소설 속의 세계에서 피츠윌리엄 다아시는 엘리자베스 베넷이 글자들보다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독자는 이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전지적인 시점은 존재할 수 있고, 글자들로서 외프라지 코제트 포슐르방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그 자체로서 <레 미제라블> 속의 세계가 또 다른 현실이라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만약 <레 미제라블>이 현실 속의 19세기 프랑스 역사와 다르다면, 독자가 <레 미제라블>을 무시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소설 속의 세계가 또 다른 현실이기 때문에, 소설 속의 세계와 현실 속의 19세기 역사는 다를 수 있습니다.
소설 <레 미제라블>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 독립성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레 미제라블>은 독립하고, 소설 속의 세계와 현실 속의 19세기 프랑스 역사는 다를 수 있습니다. 만약 문학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 독립성이 없다면, 아무도 문학을 쓰지 못할 겁니다. 문학이 모든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어떻게 엘리자베스 베넷과 코제트가 살아가는지 묘사할 수 있으나, 문학은 엘리자베스와 코제트의 모든 인생을 담지 못합니다. 만약 <레 미제라블>이 코제트의 모든 인생을 담는다면, <레 미제라블>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방대해질 테고, <레 미제라블>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작가가 등장인물의 모든 인생을 소설에 반영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실험적인 소설 작가는 이것을 시도할 수 있고, 로렌스 스턴은 이것을 정말 시도했으나, <트리스트럼 샌디>는 미완성입니다.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가 모든 인생을 담지 못하는 것처럼, 문학은 모든 현실을 담지 못합니다. 아무리 문학이 부분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을 왜곡한다고 해도, 독자는 이것이 창작과 표현의 자유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독자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독자는 문학을 읽지 못할 겁니다. 특히, 만약 문학이 사이언스 픽션이라면, 독자는 문학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훨씬 인정해야 합니다.
김초엽 작가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우주 개척을 이야기합니다. 현실에서 이런 우주 개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지구 인류는 슬렌포니아 항성계로 이주한 적이 없습니다. 현실에서 워프 항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워프 항법은 불가능합니다. 현실에서 이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비(非)현실입니다. 워프 항법은 비현실입니다. SF 단편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불가능, 비현실 설정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자체로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속의 세계에게 자치성, 독립성이 있다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이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독자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소설은 설명문이 아닙니다. 아래 동영상을 보세요. 아래 동영상은 아랍 퀴네페 레시피를 '설명'합니다. 아래 동영상은 아랍 요리 레시피를 담았습니다. 시청자는 이 동영상을 보고, 요리 방법을 배우고, 고소한 피스타치오 퀴네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반면, SF 소설 <빛의 속도>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독자가 이 소설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워프 항법을 연구하지 못합니다.
[요리 동영상은 피스타치오 퀴네페를 '설명'합니다. 반면, SF 소설은 워프 항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랍 요리 동영상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다릅니다. 시청자는 아랍 요리 동영상을 보고 견과류 퀴네페를 만들 수 있으나, 아무리 독자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워프 항법을 연구하지 못합니다. 소설이 설명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랍 요리 동영상은 견과류 퀴네페 레시피를 '설명'하나, SF 소설 <빛의 속도>는 워프 항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설명문이 아니고, SF 소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은 설명하기보다 '반영'합니다. 소설은 과학 기술이 워프 항법을 연구한다고 반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설을 비롯해 문학들이 지식을 설명하지 않는다고 조롱합니다. 소설이 지식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에게 아무 가치가 없나요? 정치 경제학 서적 <자본의 축적>은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한다고 설명합니다. 고생물학 서적 <공룡 대백과>는 공룡 종류들을 설명합니다. 실용적인 <자본의 축적>과 <공룡 대백과>는 설명하나, SF 소설 <빛의 속도>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빛의 속도>가 비실용적인가요? '비실용적인' 소설에게 아무 가치가 없나요? 하지만 <자본의 축적>과 <공룡 대백과>는 등장인물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빛의 속도>는 등장인물(캐릭터)을 제시합니다.
아랍 요리 동영상은 등장인물을 제시하지 않으나, 소설은 등장인물을 제시합니다. 독자는 등장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자본의 축적>은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하지 못하고, 그래서 독자는 실용적인 설명들보다 문학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사회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이건 중요한 특성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사회 관계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비판할지 모르나, 문학에게는 사회 관계를 비롯해 여러 장점들이 있고, 그래서 문학은 소중합니다. 물론 독자는 논픽션을 읽고, 논픽션 저자에게 공감하고, 저자와 사회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독자는 <자본의 축적>을 읽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사회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는 실존 인물입니다. 반면, 소설 등장인물은 허구적이고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실존 인물)보다 주관적인 등장인물에게 훨씬 쉽게 이입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의 또 다른 세계에서 등장인물은 존재하고, 독자는 등장인물과 함께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갑니다.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다른 SF 매체들에게도 자치성과 독립성이 있습니다. 사이버펑크 만화는 인조인간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타임슬립 애니메이션은 대체 역사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는 우주 구축함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진화 시뮬레이터는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인조인간, 대체 역사, 우주 구축함, 새로운 생물종들은 비현실 설정이나, 이것들에게는 자치성과 독립성이 있습니다. 만약 영화 관객이 이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관객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보는 동안, 관객은 어떻게 우주함이 광선포를 뿅뿅~ 쏘는지 납득하지 못할 겁니다.
그 자체로서 인조인간, 대체 역사, 우주 구축함, 새로운 생물종들은 현실입니다. 이것들은 또 다른 현실입니다. 현실에서 관객은 우주 구축함과 뿅뿅 광선포가 또 다른 현실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20세기 후반 관객은 영화 속의 우주 구축함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6세기 초반 사람들은 영화 관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영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알지 못했고, 우주 구축함을 알지 못했고, 뿅뿅 광선포를 알지 못했습니다. 16세기 초반 사람들은 인간이 정교한 기계에 탑승하고 우주로 날아간다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16세기 초반 사람들은 사이버펑크 도시와 인조인간과 무인 드론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서구 근대화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과학 혁명은 발달했고, 기계 공학은 수많은 자동화 기계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이버펑크 만화 작가는 무인 드론을 상상할 수 있고 만화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기계 공학이 발달했기 때문에, 만화 작가는 무인 드론을 사이버펑크 만화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전에, 16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서 기계 공학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고, 16세기 구닥다리 기계 공학은 자동화 기계들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16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서 기계 공학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 초반 사람들은 무인 드론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16세기 초반 사람들은 영화를 알지 못했으나, 그들 역시 문학들을 썼습니다. 하지만 16세기 초반 문학들은 SF 소설들이 아닙니다. 아무리 16세기 초반 문학들이 SF 장르에 속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너무 원형적인 SF 소설들입니다. 그 자체로서 사이버펑크 도시와 무인 드론은 또 다른 현실이나,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서 특정한 생산 조건(서구 근대화)이 나타났기 때문에, 사이버펑크 도시와 무인 드론은 나타납니다. 현실에서 상상은 비롯합니다. 현실에서 상상이 비롯하기 때문에, 상상은 현실에 종속됩니다.
"상상보다 현실은 놀랍다." 흔히 사람들은 이 문구를 떠들고 상상을 비하합니다. 이건 너무 부당한 비난입니다. 현실에서 상상이 비롯하기 때문에, 당연히 상상보다 현실은 놀랍습니다. 아무리 사이버펑크 도시가 현란하다고 해도, 비디오 게임 <클라우드펑크>에서 자본주의가 수많은 빈민들을 압살하는 것처럼, 옥타비우스 버틀러 씨가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무슨 소용인가?"라고 반문하는 것처럼, 현실에서 사이버펑크는 비롯합니다. <클라우드펑크>에서 자본주의는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키나, 16세기 초반 사람들은 시장 경제가 야생 자연을 멸종시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생산 조건(서구 근대화)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SF 작가는 궤도 승강기를 상상합니다. 현실에서 SF 작가는 사이버펑크 거대 도시를 상상합니다. 현실에서 시간 여행 능력과 워프 항법과 장거리 탐사 우주선과 무인 드론과 새로운 자연 생태계는 비롯합니다. 현실에서 새로운 자연 생태계가 비롯하는 것처럼, SF 장르는 현실에 종속됩니다. 심지어 워프 항법조차 현실에 종속되기 때문에, 현실에서 주류 문학 역시 벗어나지 못합니다. 워프 항법 설정보다 주류 문학은 훨씬 작은 크기입니다. 주류 문학보다 워프 항법 설정은 훨씬 거대합니다. 심지어 현실에서 훨씬 거대한 규모(워프 항법 설정)조차 자유롭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훨씬 작은 크기(주류 문학)는 훨씬 자유롭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은 현실에 종속됩니다. 이외수 작가와 시 <단풍>은 현실에 종속됩니다. 현실에서 이외수와 <단풍>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이외수가 원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이외수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독자가 <단풍>을 해석하기 전에, 독자는 현실을 파악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지배적인 영역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현실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지배적인 문제는 다른 무엇보다 돈 문제입니다. 다들 돈, 돈, 돈, 돈, 돈, 돈을 떠듭니다. 다들 돈이 중요하다고 떠들고, 떠들고, 떠들고, 떠듭니다.
진보적인 미셸 오바마는 돈 문제를 떠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미셸 오바마를 외면했습니다. 미셸 오바마는 위대한 국가를 낭만적으로 떠들었습니다. 반면, 수구 꼴통 도널드 트럼프는 돈 문제를 떠들었습니다. 돈 문제가 시급했기 때문에, 민중들은 도널드 트럼프를 선택했습니다. 물론 수구 꼴통은 경제를 절대 해결하지 못합니다. 미국 상황을 보세요. 미국 상황이 혼란스러운 것처럼, 민중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외치는 것처럼, 돈 문제는 가장 시급합니다. 그래서 다들 돈, 돈, 돈, 돈, 돈, 돈을 떠듭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가장 두드러지고 지배적입니다. 가장 지배적인 자본주의는 절대 평화롭지 않습니다. 경제 역사학자들은 언제 자본주의가 나타났는지 합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경제 역사학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18세기 이후 서구 문명에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왜 18세기 이후 서구 문명에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나요? 서구 문명이 식민지들을 수탈했고 막대한 부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식민지 수탈에서 자본주의는 비롯했습니다. 심지어 식민지 수탈을 강화하기 위해 서구 자본주의는 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이건 2차 세계 대전에 파장을 미쳤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악랄하고 폭력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이고,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은 제국주의 전쟁입니다. 얄팍한 진보들은 이른바 악의 평범성을 자랑스럽게 떠벌이나, 이건 한심한 망상입니다. 진짜 문제는 자본주의와 식민지 수탈입니다.
[20세기와 달리, 16세기 사람들은 자유 시장 경제가 야생 자연을 멸종시킨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들을 짓밟았기 때문에, 아직 식민지들은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에 대처하지 못합니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제3세계 전염병 사태를 책임져야 하나, 제국주의 국가들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여러 전문가들은 포스트 코로나, 코로나 사태 이후를 떠드나, 포스트 코로나 논의가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나요? 만약 전문가들이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포스트 코로나 논의에게 무슨 가치가 있나요? 코로나 19 소식들이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기 때문에, 포스트 코로나 논의를 비롯해 여러 코로나 사태 소식들은 그저 지배 계급 관념에 충성충성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너무 악랄한 독재입니다.
자본주의는 비단 악랄한 독재일 뿐만 아니라 환경 오염 범죄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하다고 난리법석이나, 코로나 19 사태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생태학자들은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행성급 환경 오염은 신문 1면 기사가 되지 못합니다. 19세기 산업 자본주의가 지구 기후를 크게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에, 19세기 산업 자본주의는 인류세 시발점입니다. '하필 소비에트 연방이 사라진' 이후, 신자유주의는 엄청난 화석 연료들을 태웠고 지구 온난화를 부채질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환경 오염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 범죄를 은폐하고 사람들을 세뇌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비단 환경 오염 범죄자일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인 착취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합니다. 아무리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힘들게 돌본다고 해도, 할머니는 노동자가 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고생하는 할머니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가사 노동은 아무것도 아니고, 자본주의가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자본주의가 가부장 제도이고,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지배적이기 때문에, 현실은 가부장적입니다. 문학 작가는 현실에 종속됩니다. 사이버펑크 도시가 현실(추악한 자유 시장 경제)에 종속되는 것처럼, 문학 작가는 현실에 종속됩니다. 이외수와 <단풍>은 현실에 종속됩니다.
현실은 가부장적입니다. 추악한 자유 시장 경제에서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가 비롯하는 것처럼, 이외수와 <단풍>은 가부장적인 현실에 종속됩니다. 그래서 독자는 가부장 편견을 의심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비단 <단풍>만 아니라 다른 문학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서 매켄은 <위대한 신, 판>을 썼습니다. <위대한 신, 판>은 코스믹 호러, 우주적인 공포입니다. 우주적인 공포는 작가 의도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어떤 서평에서 듀나님은 이 소설에 페미니즘 시각을 적용했습니다. 이게 잘못인가요? 이 해석이 과잉 해석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사이버펑크 도시가 현실에 종속되는 것처럼, 우주적인 공포 소설 <위대한 신, 판>은 현실에 종속됩니다. 현실(19세기 후반 서구 사회)은 가부장적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듀나님이 페미니즘 해석을 우주적인 공포 소설에 적용한다고 해도, 이건 과잉 해석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주적인 공포가 작가 의도라고 해도, 19세기 가부장적인 서구 사회에서 <위대한 신, 판>이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페미니즘 해석은 오류가 아닙니다. 그래서 로잔 라비노위츠(Rosanne Rabinowitz)는 중편 소설 <헬렌의 이야기 Helen’s story>를 썼을 겁니다. 평론은 문학의 산파가 아닙니다. 평론은 문학의 산파가 되기보다 문학 생산 조건을 분석합니다. <헬렌의 이야기>는 생산 조건(가부장적인 현실)을 비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