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어둠의 왼손>과 그림의 화성 켈프 본문
[아무리 게센 행성이 현실이라고 해도, 만약 독자가 영어를 읽지 못한다면, 게센은 그림의 떡일 겁니다.]
위 문구들은 소설 <어둠의 왼손> 도입부입니다. 이 소설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이건 소설 속에서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소설은 겨울 행성 게센을 묘사합니다. 게센 사람들은 양성입니다. 그들은 성별을 바꿉니다. 현실에서 이런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게센 행성에 방문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게센 행성에 방문하지 못하기 때문에, 게센 행성은 비(非)현실입니다. 이건 소설 작가 어슐라 르 귄이 게센 행성을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슐라 르 귄은 게센 행성과 양성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소설 서문에서 어슐라 르 귄은 자신이 게센 행성을 믿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어슐라 르 귄은 소설 독자들이 비(非)현실을 믿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소설 도입부에서 화자는 보고서 형식을 동원합니다. 화자 겐리 아이는 문서 번호와 출처와 연도를 밝힙니다. 하지만 이건 진짜 보고서가 아닙니다. 소설은 허구이나, 허구에 설득력을 불어넣기 위해 종종 소설 작가들은 보고서 형식을 빌립니다. <어둠의 왼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고서 형식은 게센 행성이 정말 존재한다고 연출합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허구적인 연출에 불과합니다. <어둠의 왼손>은 우주 인류학 보고서보다 SF 소설입니다.
아무리 어슐라 르 귄이 훨씬 구체적이고 정밀한 보고서 형식을 동원한다고 해도, 게센 행성은 정말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설 독자들은 게센 행성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성별을 바꿀 수 있지? 어떻게 남자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지? 어슐라 르 귄은 허풍쟁이 아줌마야!" 이렇게 소설 독자들은 불만을 터뜨리지 않습니다. <어둠의 왼손>이 게센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SF 소설들이 비(非)현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SF 장르가 황당무계한 공상이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SF 작가들, 독자들, 평론가들은 현실에서 게센 행성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비단 게센 행성 사람들만 아니라 다른 많고 많은 SF 설정들 역시 비현실입니다. SF 장르에서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가장 커다란 특성이고, 만약 현실에서 뭔가가 존재한다면, 더 이상 이건 SF 설정이 아닐 겁니다. 사람들은 수마트라 호랑이와 장수 거북을 SF 설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미 현실에서 수마트라 호랑이와 장수 거북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기 때문에, 수마트라 호랑이는 희귀 야생 동물이나,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서 수마트라 호랑이는 존재합니다. 열대 밀림 호랑이는 SF 설정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수마트라 호랑이가 개척 우주선에 탑승한다면?
SF 소설은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외계 행성을 향해 떠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외계 행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은 유사 지구 생태계를 조성하기 원하고, 장거리 개척 우주선은 수많은 지구 생명체들을 보관합니다. 장거리 개척 우주선은 홍수 설화 방주와 비슷합니다. 수많은 지구 생명체들은 냉동 수면에 빠지고, 개척 우주선이 외계 행성에 도착한 이후, 개척 과학자들은 지구 생명체들을 깨우고 외계 행성에 풀어놓습니다. 불모지 외계 행성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은 유사 지구 생태계를 조성하고 제2의 지구를 만듭니다. 이건 비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인류 문명은 장거리 개척 우주선을 건조한 적이 없습니다.
현실에서 인류 문명은 성공적인 냉동 수면 기술을 완성하지 않았고 제2의 지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제2의 지구에서 수마트라 호랑이는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방주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비현실이고, 이 비현실은 SF 설정입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이 하드 SF 범주에 속한다고 분류할 겁니다. 아무리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냉동 수면 기술보다 내부 바이오 돔을 이용한다고 해도, 이 소설은 하드 SF 범주에 속합니다. 물론 독자들은 어떻게 우주선 바이오 돔에서 수마트라 호랑이가 살아가는지 의심할 겁니다. 수마트라 호랑이는 알파 프레테터입니다. 최고 포식자에게는 넓은 영역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우주선 바이오 돔이 넓다고 해도, 바이오 돔 생태계가 수마트라 호랑이를 포함할 수 있나요? 만약 우주선 바이오 돔이 넓다면, 여기에서 장수 거북이 헤엄칠 수 있나요? 장거리 개척 우주선에서 바이오 돔이 드넓은 해양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나요? 만약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바이오 돔, 생태 구역을 장착한다면, 개척 우주선은 작은 지구, 꼬마 생물권(生物圈)이 될 겁니다. 환경 전문가들이 지구를 생체 우주선이라고 비유하는 것처럼, 개척 우주선은 꼬마 생물권이 될 겁니다. 만약 우주선 사람들이 바이오 돔을 함부로 관리한다면, 생태계는 무너질 테고, 개척 우주선은 '개척'하지 못할 겁니다.
왜 장거리 개척 우주선이 바이오 돔을 장착하나요? 외계 행성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유사 지구 생태계를 조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주선 사람들이 바이오 돔을 함부로 관리한다면, 바이오 돔 생태계는 무너질 테고, 아무리 장거리 우주선이 외계 행성에 무사히 도착한다고 해도, 개척 과학자들은 유사 지구 생태계를 조성하지 못할 겁니다. 더 이상 개척 우주선은 개척 우주선이 아닙니다. 꼬마 생물권이 망가졌기 때문에, 행성 생물권 역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고 생물권을 새롭게 고민할 수 있습니다. 개척 우주선이 꼬마 생물권인 것처럼, 인류 문명에게 지구는 장대한 생체 우주선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장 지배적인 경제 영역은 자본주의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라는 용어처럼, 자본주의는 세계를 장악합니다. 자본주의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윤 창출입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이윤 창출만 선호합니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유 무역이 수많은 생태계들을 교란하고 파괴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환경 전문가들은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움직인다고 경고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위험한 전염병 역시 빠르게 퍼질지 모릅니다. 세계화는 세계적인 전염병이 됩니다. 코로나 19 사태처럼, 결국 세계화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전염병이 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생물권을 파괴하고, 세계화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전염병이 됩니다.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을 읽고 지구 생물권을 새롭게 고민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우주선 바이오 돔을 읽고 코로나 19 사태를 고민하는 것처럼, 소설은 뭔가를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우주선 바이오 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은 비유입니다. 이건 지구 생물권, 생체 우주선 지구를 비유합니다. 하드 SF 독자들은 현실에서 우주선 바이오 돔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주선 바이오 돔은 황당무계한 공상이 아닙니다. 비단 우주선 바이오 돔만 아니라 다른 많은 SF 설정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삭막한 환경 아포칼립스 역시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이 비유인 것처럼, 환경 아포칼립스와 스팀펑크 차량은 비유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독자들은 우주선 바이오 돔에서 장수 거북이 헤엄칠 수 있는지 의심합니다. 독자들은 우주선 바이오 돔이 해양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는지 의심합니다. 하드 SF 소설은 과학 지식들을 고증하고 바이오 돔과 해양 생태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독자들은 우주선 바이오 돔이 그저 비유에 불과하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하드 SF 소설이 우주선 바이오 돔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우주선 바이오 돔은 또 다른 현실이 됩니다. 소설 독자들은 우주선 바이오 돔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간주합니다. 동시에 소설 독자들은 우주선 바이오 돔이 우주선 지구를 비유한다고 간주합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은 비유가 되고, 동시에 우주선 바이오 돔은 또 다른 현실이 됩니다. SF 설정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양쪽은 대립하나, 동전의 양면처럼, 양쪽은 함께 존재합니다. 하드 SF 소설이 우주선 바이오 돔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적어도 SF 설정은 또 다른 현실을 향해 수렴합니다. 게센 행성 역시 또 다른 현실을 향해 수렴합니다. 어슐라 르 귄은 게센 행성을 믿지 않으나, 어슐라 르 귄은 게센 행성 설정들을 구상합니다. 그 자체로서 게센 행성은 또 다른 세계입니다. 소설 <어둠의 왼손> 속에서 그 자체로서 게센 행성은 또 다른 세계가 됩니다. 현실 없이, 또 다른 현실은 존재합니다.
게센 행성이 (또 다른) 현실이 되기 때문에, 현실 없이, 현실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다른 현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 문명과 세계화 자본주의에서 우리가 살아가지 않는 것처럼, 현실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게센 행성은 현실이고, 게센 행성은 다른 현실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게센 행성이 다른 현실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어떤 작가들은 소설이 비유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우리가 뭔가를 주장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직접 주장할 수 있다. 왜 뭔가를 비유하기 위해 우리가 소설을 쓰는가? 소설에게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현실이 있다. 소설은 비유가 아니다."
이 주장은 타당합니다. 분명히 게센 행성은 또 다른 현실입니다. 현실은 비유가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현실은 존재합니다. 그 자체로서 게센 행성은 존재하고, 그 자체로서 우주선 바이오 돔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독자는 소설을 읽습니다. 본문 위의 문구들을 보세요. 본문 위의 문구들은 영어입니다. 미국 독자들에게 위 문구들은 낯설지 않습니다. 반면, 남한 독자가 영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위 문구들은 너무 낯설 겁니다. 남한 독자가 영어를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한 독자는 위 문구들을 읽지 못합니다. 남한 독자는 소설을 읽지 못하고 게센 행성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게센 행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한 독자가 게센 겨울 행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게센 겨울 행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영어 소설 속에서 그 자체로서 게센 행성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해도, 남한 독자가 영어 소설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남한 독자는 현실(게센 행성)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우주선 바이오 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드 SF 소설이 영어라면, 아무리 영어 소설 속에서 그 자체로서 우주선 바이오 돔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해도, 남한 독자가 영어 소설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남한 독자는 현실(우주선 바이오 돔)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 상황에서 남한 독자에게 우주선 바이오 돔은 '그림의 떡'입니다.
미술 갤러리에서 관람객은 그림을 감상합니다. 그림은 찹쌀떡을 묘사합니다. 미술 관람객은 그림을 보고 찹쌀떡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미술 관람객이 찹쌀떡을 인식한다고 해도, 아무리 그림이 찹쌀떡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그림은 그저 그림에 불과합니다. 미술 관람객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찹쌀떡을 먹지 못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엘더 스크롤 IV: 오블리비언>에서 게임 주인공은 그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마법 때문에, 게임 주인공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그림 속의 세계는 현실이 됩니다. 찹쌀떡 그림은 마법을 부리지 못하고, 미술 관람객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미술 관람객은 찹쌀떡을 인식할 수 있으나, 현실에서 미술 관람객은 찹쌀떡을 인식합니다. 다른 영역(현실과 그림)에서 미술 관람객과 찹쌀떡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찹쌀떡 그림은 그림의 떡입니다. 영어 소설과 남한 독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우주선 바이오 돔을 구체적으로 고증한다고 해도, 아무리 우주선 바이오 돔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해도, 남한 독자가 영어 소설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남한 독자는 우주선 바이오 돔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다른 영역(현실과 영어 소설)에서 남한 독자와 우주선 바이오 돔은 존재합니다. 게센 행성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건 그림의 떡입니다.
김초엽은 SF 작가입니다. 공지영은 SF 작가가 아닙니다. 출판 관계자들은 공지영이 SF 작가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국내 SF 독자들은 김초엽 작가를 논의하나, 공지영 작가는 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둠의 왼손>은 SF 소설입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어둠의 왼손>은 똑같이 SF 소설입니다. 하지만 만약 <어둠의 왼손>이 영어라면, 남한 독자가 영어 소설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남한 독자는 어슐라 르 귄과 김초엽 작가보다 김초엽 작가와 공지영 작가가 비슷한 범주(남한 소설 작가)에 속한다고 분류할 겁니다. 이 상황에서 언어의 장벽은 장르를 뛰어넘습니다. 언어의 장벽은 너무 높습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우주선 바이오 돔을 훌륭하게 묘사한다고 해도, 만약 이 소설이 영어라면, 남한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지 못할 겁니다. 남한 독자들은 이 소설을 논의하지 못할 겁니다. 남한 독자들에게 영어 소설 속의 우주선 바이오 돔은 그림의 떡입니다. 언어의 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에, 남한 독자들은 우주선 바이오 돔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비단 소설 독자만 아니라 게임 플레이어 역시 언어의 장벽에 부딪힙니다. 보드 게임 <테라포밍 마스>에서 개척 기업들은 화성을 테라포밍합니다. 화성에서 바다는 풍요로운 켈프 숲을 키웁니다. 게임 속에서 그 자체로서 화성 켈프 숲은 현실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카드 그림을 보고 화성 켈프 숲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게임 설명서가 영어이고, 게임 플레이어가 영어를 알지 못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켈프 숲 카드가 무슨 효과를 발휘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문자 그대로 화성 켈프 숲 그림은 그림의 떡, 아니, 그림의 켈프 숲입니다. 현실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화성을 테라포밍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에서 화성 켈프 숲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SF 속에서만 화성 켈프 숲은 현실이 됩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켈프 숲 카드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성 켈프 숲은 현실이 되지 못합니다. 게임에서도 언어의 장벽은 높습니다.
적어도 게임 플레이어는 화성 켈프 그림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테라포밍 마스>가 많은 그림들을 제시하기 때문에, 비록 게임 플레이어가 언어의 장벽에 부딪힌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그림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림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습니다. 이건 그림이 모든 문화적인 경계선을 뛰어넘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그림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습니다. 비디오 게임 <왕의 새 The King's Bird>는 지문과 대사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왕의 새>는 오직 그림들만 보여주고 음악들과 소리들만 들려줍니다. 언어에 상관없이, 게임 플레이어는 <왕의 새>를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FAR: Lone Sails>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어에 상관없이, 게임 플레이어는 멸망한 세상에서 거대하고 육중한 스팀펑크 차량이 굴러간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왕의 새>는 싱그럽고 웅장하고 풍요로운 삼림을 자랑하고, 웅장한 삼림에서 조류 소녀(bird girl)는 활공하나, <FAR: Lone Sails>에서 인류 문명은 멸망했습니다. 심지어 바다조차 사라졌습니다. 어쩌면 산업 문명은 바다를 고갈시켰는지 모릅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천연 자원들을 무분별하게 채취하기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천연 자원 고갈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본주의가 미쳐돌아간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언어를 읽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이건 그림의 떡, 아니, 그림의 화성 켈프일 겁니다.]
언어에 상관없이, 게임 플레이어는 메마른 바다와 스팀펑크 차량을 구경할 수 있고, 게임 플레이어는 자본주의가 천연 자원을 고갈시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림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해석합니다. 하지만 가시적인 비현실은 추상적인 비현실을 포함합니다. 만약 <FAR: Lone Sails>가 환경 아포칼립스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원한다면, <FAR: Lone Sails>는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만약 이 '설명'이 영어이고, 남한 독자가 영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남한 독자는 설명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 상황에서 환경 아포칼립스가 독립적인 현실이 될 수 있나요?
<어둠의 왼손>은 훨씬 그렇습니다. <FAR: Lone Sails>와 달리, <어둠의 왼손>은 글자들입니다. 소설은 종이 위의 글자들이고, SF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우주선 바이오 돔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이건 종이 위의 글자들입니다. 만약 글자들이 영어이고, 남한 독자가 영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우주선 바이오 돔을 인식하기 위해 남한 독자는 영어를 배워야 합니다. 어디에서 남한 독자가 영어를 배우나요? 대답은 '현실'입니다. 현실에서 남한 독자는 영어를 배웁니다. 다른 무엇보다 현실에서 남한 독자는 영어를 배웁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남한 독자는 영어를 배웁니다.
아무리 다른 차원에서 독자가 영어를 배우기 원한다고 해도, 아무리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독자가 영어를 배우기 원한다고 해도, 오직 현실에서만 남한 독자는 영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우주선 바이오 돔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해도, 우주선 바이오 돔보다 현실(언어)은 우선합니다. 현실에서 이미 영어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슐라 르 귄은 이것을 이용하고 <어둠의 왼손>을 씁니다. 게센 사람들보다 현실(언어)이 우선하기 때문에, 남자 대명사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게센 사람들은 성별을 바꾸나, 어슐라 르 귄은 남자 대명사를 사용했고,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이것을 비판했습니다.
게센 행성 사람들보다 현실(언어)이 우선하기 때문에,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이것을 비판했습니다. 아무리 SF 설정이 또 다른 현실이라고 해도, 현실에서 독자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는 현실을 SF 설정, 또 다른 현실에 대입합니다. 이 상황에서 또 다른 현실은 현실이 되지 못합니다. 현실이 SF 설정에 개입하기 때문에, 또 다른 현실은 현실이 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상상은 또 다른 현실이 되나, 현실 없이, 또 다른 현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현실에서 또 다른 현실(상상)은 비롯합니다. 21세기 초반 SF 독자들은 우주선 바이오 돔에서 장수 거북이 헤엄칠 수 있는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반면, 조선 집현전 학자들은 논의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집현전 학자들이 박식하다고 해도, 그들은 우주선 바이오 돔에서 장수 거북이 헤엄치는지 논의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상상은 비롯하지 못했습니다. "상상보다 현실은 훨씬 놀랍다." 흔히 사람들은 이 문구를 자랑스럽게 떠들고 상상을 조롱합니다. 이건 너무 부당한 비난입니다. 현실에서 상상이 비롯하기 때문에, 집현전 학자들이 우주선 바이오 돔에서 장수 거북이 헤엄치는지 논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상상보다 현실은 훨씬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