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장르, 또 다른 세계 혹은 배후 기준 본문
[외계 자연 환경은 섬세한 그림체가 되거나 단출한 픽셀 그래픽이 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당연한 이야기 하나. SF와 판타지 장르의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런 작품들을 제대로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그 세계를 존중하는 것이다. 단순히 비유와 상징으로 치환되지 않는 작품의 핵심을 먼저 찾는 것이 비평가들의 진짜 목표여야 할 것이다."
예전에 듀나님이 영화 <설국 열차>를 평가했을 때, 위와 같이 듀나님은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비판을 영화에 너무 노골적으로 대입했기 때문입니다. 듀나님은 이게 '어설픈 색깔론', '헛된 정치적 해석'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는 그 자체로서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 자체로서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관객이 SF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만약 관객이 현실을 SF 영화에 너무 무리하게 연결하고, 관객이 SF 영화가 그저 현실을 비유할 뿐이라고 간주한다면, 그 자체로서 세계는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SF 소설과 SF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자가 SF 소설을 읽고, 게임 플레이어가 SF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독자와 게임 플레이어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만약 독자와 게임 플레이어가 현실을 SF 소설과 SF 게임에 너무 무리하게 연결하고, 독자와 게임 플레이어가 SF 소설과 SF 게임이 그저 현실을 비유할 뿐이라고 간주한다면,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못한다면, 왜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만드나요? 만약 오직 현실만 중요하다면,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존재하기 위한 명분이 없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 이건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또 다른 세계는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이용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이용합니다. 현실에 뭔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그것이 정말 존재한다고 상상합니다. 현실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이상적인 모성 사회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현실에서 엄마 나방 괴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구는 어머니 행성인지 모르나, 아직 과학자들은 지구가 어머니 행성이라고 공식적으로 증명하지 못합니다. 생명의 요람 지구에게는 지성, 의식이 없습니다. 어머니 행성은 그저 비유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은 비유를 설정으로 전환하고 정말 어머니 행성으로서 지구에게 지성, 의식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실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엄마 나방 괴수, 이상적인 모성 사회, 어머니 행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이런 설정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재미있습니다.
독자와 관객과 게임 플레이어는 이것, 또 다른 세계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미 지구에서 엄청나게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이 번성함에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생태학을 연구함에도, 왜 독자가 하드 SF 소설을 펼치나요? 현실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구경하기 위해 독자는 하드 SF 소설을 펼칩니다. 하드 SF 소설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건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되고, 그래서 하드 SF 소설에게는 가치가 있습니다. 듀나님은 이것을 지적합니다. 듀나님은 원론적으로 옳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하드 SF 소설에게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사이언스 픽션에게만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있나요? 만약 현실에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이것이 상상력이 되고, 상상력이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를 만든다면, 오직 사이언스 픽션에게만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1월 12일 게시글(링크)이 이야기한 것처럼, 다른 창작물들에도 상상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창작물들에도 문학적인 장치들이 있습니다. 현실에는 문학적인 장치들이 없습니다. 문학적인 장치들은 상상력입니다. 상상력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를 만듭니다.
TB 작가가 그린 웹툰 <포 더 프린세스>는 로맨스 장르입니다. 로맨스 장르로서 <포 더 프린세스>에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포 더 프린세스>에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없나요? 17화에서 공주(이연화)가 왕자(서지후)에게 들이댈 때, 만화 시점은 노랗고 화사한 뽀샤시 효과를 연출합니다. 왜 만화 시점이 화사한 뽀샤시 효과를 연출하나요? 이연화와 서지후가 서로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연화와 서지후는 잠재적인 연인 관계이고, 그래서 이연화가 서지후에게 들이댈 때, 이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만화 시점은 뽀샤시 효과를 연출합니다.
문제는 뽀샤시 효과가 상상력이라는 사실입니다. 현실 속에서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가 잠재적인 연인 관계라고 해도, 이웃집 영희가 옆동네 철수에게 들이댈 때, 대기 상태는 노랗고 화사한 뽀샤시 효과를 연출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이웃집 영희가 두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고, 두 뺨을 붉히고, 옆동네 철수에게 고백한다고 해도, 대기 상태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겁니다. 현실에서 뾰샤시 효과는 존재하지 않으나, 만화 <포 더 프린세스>는 뽀샤시 효과를 이용합니다. 뽀샤시 효과는 상상력입니다. 만화 장치로서 뽀샤시 효과는 상상력입니다. <포 더 프린세스>는 상상력을 이용하고, 이건 또 다른 세계입니다.
듀나님은 만화 독자가 또 다른 세계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할 겁니다. "그래, <포 더 프린세스> 속의 대기는 현실 속의 대기와 달라. 만화 속의 대기에서 어떤 입자들은 인간의 애정 호르몬에 반응할 거야. 그래서 이연화가 서지후에게 들이댔을 때, 서지후는 애정을 느꼈고, 애정 호르몬은 대기 입자들을 자극했고, 대기는 노랗고 화사하게 바뀌었을 거야." 이렇게 만화 독자는 또 다른 세계, 뽀샤시 효과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과잉 해석입니다. 다른 만화 독자들은 이게 과잉 해석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듀나님 역시 이게 그저 과잉 해석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겁니다. 왜 듀나님이 <설국 열차>와 <포 더 프린세스>를 다르게 해석하나요?
듀나님이 <설국 열차>를 평가했을 때, 듀나님은 관객이 또 다른 세계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만화 독자가 대기 속의 뽀샤시 입자들을 존중한다면, 듀나님은 이게 과잉 해석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영화 <설국 열차>와 만화 <포 더 프린세스>가 모두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보여줌에도, 왜 듀나님이 <설국 열차>가 또 다른 세계라고 인정하고 <포 더 프린세스>가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고 부정하나요? 왜 듀나님이 <포 더 프린세스>를 차별하나요? 듀나님이 로맨스 만화 혐오자인가요? 듀나님이 SF 우월론자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듀나님은 어떻게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나타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게시글에서 둘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게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생체선(生體船)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만약 생체선과 뽀샤시 효과가 똑같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이라면, 왜 사람들이 뽀샤시 효과보다 생체선이 훨씬 허구적이라고 간주하나요? 생체선에게는 소설 내부적인 설정이 있습니다. 적어도 하드 SF 소설은 어떻게 미래 과학자들이 생체선을 설계하는지 설명할 겁니다. 반면, 뽀샤시 효과에게는 만화 내부적인 설정이 없습니다. <포 더 프린세스>는 어떻게 뽀샤시 효과가 나타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생체 우주선에게 소설 내부적인 설정이 있고, 뽀샤시 효과에게 만화 내부적인 설정이 없음에도, 왜 뽀샤시 효과보다 생체 우주선이 훨씬 허구적인가요? 뽀샤시 효과가 형식이고, 생체 우주선이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로서 뽀샤시 효과는 그저 반짝이는 그림에 불과합니다. 그 자체로서 뽀샤시 효과는 '상상력'이 되지 않습니다. 이연화가 만화 등장인물(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에, 만화 독자가 이연화와 가상의 사회 관계를 맺을 때, 뽀샤시 효과는 '상상력'이 됩니다. 그리고 이연화보다 생체 우주선은 훨씬 허구적입니다. 이연화는 남한 몽골로이드 성인 여자 범주에 속합니다.
현실에는 남한 몽골로이드 성인 여자들이 있습니다. 이연화 그 자체는 만화 등장인물이고, 그래서 이연화는 상상력이나, 남한 몽골로이드 성인 여자로서 이연화는 사실주의적입니다. 반면, 현실에는 생체 우주선이 없습니다. 소설 독자가 생체 우주선 속의 여자 개척 생태학자와 사회적인 관계를 맺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훨씬 허구적인 사회 관계가 됩니다. 여자 개척 생태학자는 형식보다 내용입니다. 여자 개척 생태학자가 내용이기 때문에, 하드 SF 소설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됩니다.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허구보다 내용을 요구하기 때문에, 뽀샤시 효과보다 생체 우주선은 훨씬 허구적입니다.
이건 허구로서 형식보다 허구로서 내용이 반드시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뽀샤시 효과 그 자체가 그저 반짝이는 그림에 불과하다고 해도, 허구로서 뽀샤시 효과가 이연화와 서지후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꽃송이를 피울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소설, 만화, 연극, 영화, 게임을 제대로 평가하기 원할 때, 우리는 형식과 내용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허구보다 내용을 요구하기 때문에, 뽀샤시 효과보다 생체 우주선은 훨씬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되고, 독자는 이연화/서지후보다 여자 개척 생태학자와 훨씬 허구적인 사회 관계를 맺습니다.
독자가 이연화/서지후보다 여자 개척 생태학자와 훨씬 허구적인 사회 관계를 맺기 때문에, 형식보다 내용이 일상적인 설정과 사이언스 픽션을 구분하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은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간주합니다. 생체 우주선과 여자 개척 생태학자는 내용으로서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체선과 여자 개척 생태학자가 내용으로서 비일상적인 상상력이라고 해도, 형식 없이, 생체선과 여자 개척 생태학자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하드 SF 작가가 여자 개척 생태학자를 표현할 때, 하드 SF 작가는 형식, 글자들을 동원해야 합니다. 하드 SF 소설은 '소설'입니다.
하드 SF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글자 매체로서 하드 SF 소설은 글자들을 나열합니다. 글자는 사회적인 기호, 지배적인 기호입니다. 독자가 글자를 배우고 해석하는 동안, 독자는 비단 글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념, 지배적인 관념을 함께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언어에는 물질성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시리아 독자가 중국어를 알지 못한다면, 시리아 독자는 중국 SF 소설을 읽지 못할 겁니다. 그 자체로서 SF 장르가 또 다른 세계라고 해도, 시리아 독자는 중국 SF 소설을 읽지 못합니다. 중국 SF 소설을 읽기 위해 시리아 독자는 중국어를 배워야 합니다. 중국어에는 물질성이 있습니다.
중국어에 물질성이 있기 때문에, 만약 시리아 독자가 중국어를 배운다면, 시리아 독자는 중국어 물질성을 함께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시리아 독자는 중국 문화 관념을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시리아 독자가 중국 문화 관념을 받아들이고, 시리아 독자가 중국 SF 소설을 읽음에도, 현실 속의 중국어 물질성(중국 문화 관념)이 SF 소설, 또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듀나님은 이게 가능하다고 말하고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건 너무… 어설프고 유치한 평론입니다. 듀나님은 형식을 무시하고 오직 내용만 말합니다. 이건 문학 강의 학생들이 저지르는 초보적인 실수입니다. 분명히 하드 SF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언어, 글자 없이, 하드 SF '소설'은 절대 존재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글자, 언어가 나타납니까?
듀나님은 하늘에서 갑자기 언어가 뚝 떨어진다고 간주합니다. 아, 그래요? 하늘에서 언어가 뚝 떨어지나요? 가부장 문화가 월경을 생리라고 표현함에도, 하늘에서 갑자기 언어가 뚝 떨어지나요? 가부장 문화가 임신 중절보다 낙태라고 표현함에도, 하늘에서 갑자기 언어가 뚝 떨어지나요? 갑자기 된장녀, 베이글녀, 슴가, 도끼 자국 같은 언어가 번쩍 나타납니까? "서정시는 여성적이고, 서사시는 남성적이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나타납니까? 하늘에서 이런 표현이 뚝 떨어지나요? '지리상의 발견'이 타당한 용어인가요? 하늘에서 이 용어가 뚝 떨어지나요? 만약 글자, 언어에 아무 가치가 없다면, 왜 SF 작가들이 특정한 글씨체들을 동원하거나 신조어들을 만드나요? 하드 SF 소설이 글자 매체임에도, 글자라는 어떤 특성들이 하드 SF 소설에 영향을 미치지 않나요?
[그림체로서 외계 해양 생태계는 존재합니다. 그림과 글자는 다르고, 이건 내용에 영향을 미칩니다.]
"다한야 해야중 존을들 자수소성 는리우." 이게 무슨 뜻인가요? 많은 남한 사람들은 이 문장을 빨리 해석하지 못할 겁니다. 이 문장은 "우리는 성 소수자들을 존중해야 한다."를 거꾸고 뒤집고 어절들을 불규칙적으로 분리합니다. 이 문장은 남한 표준 문법을 무시하고, 그래서 많은 남한 사람들은 이 문장을 빨리 해석하지 못할 겁니다.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글자는 표준 문법을 따라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표준 문법은 존재하고, 아무리 그 자체로서 SF 장르가 또 다른 세계라고 해도, SF 소설은 현실을 따라야 합니다. 현실에서 SF 소설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게다가 글자는 대상을 보편적으로 묘사합니다.
글자가 대상을 보편적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독자는 현실을 참고하고 글자를 해석합니다. 그래서 소설이 등장인물 외모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못한다고 해도, 소설이 등장인물 외모를 오직 보편적으로만 묘사하거나 심지어 등장인물 외모를 생략한다고 해도, 독자는 당황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현실 속의 인간들을 참고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현실 속에서 여자 개척 생태학자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오직 개척 생태학자 상상도들만 존재합니다. 독자는 진짜 여자 개척 생태학자들을 참고하지 못하고, 그래서 SF 소설을 읽기는 훨씬 까다롭습니다. 이렇게 현실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듀나님이 소설 <겨울 왕국: 또 다른 이야기>를 평가했을 때, 듀나님은 글자 매체가 판타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요? 글자 매체가 판타지 세계에 영향을 미치나요? 왜 듀나님이 말을 바꾸나요? 글자 매체가 판타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듀나님은 이것을 지적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체로서 판타지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로서 판타지 세계가 존재함에도, 듀나님은 이것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듀나님이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음에도, 듀나님은 또 다른 세계로서 <겨울 왕국: 또 다른 이야기>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전형적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현실에서 글자는 비롯하고, 글자는 소설을 만듭니다. 그래서 현실과 소설 사이에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듀나님은 이런 연결 고리를 끊기 원합니다. 그 자체로서 SF, 판타지가 또 다른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듀나님은 그 자체로서 영화 <설국 열차>가 또 다른 세계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듀나님이 소설 <겨울 왕국: 또 다른 이야기>를 평가했을 때, 듀나님은 글자 매체가 판타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습니다. 듀나님은 한 입으로 두 말합니다. 듀나님은 너무 전형적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이건 너무 어설프고 초보적인 평론입니다.
매체, 형식은 사이언스 픽션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 <아바타>는 블록버스터입니다. 블록버스터로서 영화 <아바타>는 엄청난 제작 비용을 투입하고 환상적인 외계 자연 환경을 보여줍니다. 블록버스터 영화 <아바타>와 달리, <어스텅>은 인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어스텅>이 인디 게임이기 때문에, <어스텅>은 단순한 픽셀 그래픽을 이용하고 외계 행성 균류 풍경을 단출하게 보여줍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외계 행성 균류 풍경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느낄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어스텅>보다 <아바타>는 외계 자연 환경을 훨씬 압도적으로 표현합니다. 블록버스터 영화/인디 게임 매체는 사이언스 픽션 속의 외계 자연 환경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어떻게 블록버스터 영화, 인디 게임이 존재하나요? 양쪽이 외계 자연 환경을 똑같이 묘사함에도, 왜 누군가가 엄청난 제작 비용을 퍼붓고, 왜 누군가가 단출한 픽셀 그래픽을 이용해야 하나요? 21세기 초반 인류 문명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굶주리고, 병들고, 성 폭행을 당합니다. 인류 문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들고 성 폭행을 당함에도, 어떻게 블록버스터 영화가 엄청난 비용을 투입하나요? 세계화 자본주의가 여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나요? 블록버스터 영화 <아바타>와 인디 게임 <어스텅>이 너무 다른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들고 성 폭행을 당하는 것처럼, 현실은 사이언스 픽션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듀나님은 이것을 간과하고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영화 <설국 열차>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설국 열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가 디스토피아라고 간주할지 모르나, <설국 열차>는 디스토피아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가깝습니다. 비디오 게임 <새틀라이트 레인>처럼, 디스토피아는 인류 문명이 멸망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디스토피아는 인류 문명이 부정적으로 발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관객들은 <설국 열차>가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할 겁니다. 네, 좋습니다. 이 게시글은 <설국 열차>가 디스토피아라고 (임시적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인류 문화에서 오직 영화 <설국 열차>만 유일무이한 사이언스 픽션,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영화 <설국 열차>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사이언스 픽션,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는 존재해왔습니다. 영화 <설국 열차>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사이언스 픽션,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는 장르 공식, 장르 전형(典型)을 만들어왔습니다. 쥘 베른이 소설 <20세기 파리>를 쓴 것처럼,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부정적인 미래를 그렸을 때, 미래 인류 문명이 무너지거나 발전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사회 구조 비판이 있었습니다. 토마소 캄파넬라와 마가렛 캐번디시는 유토피아를 썼으나, 소설 <태양의 도시>와 소설 <불타는 세계>처럼,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나타나기 전에도,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가 인류 사회를 묘사했을 때, 사회 구조 비판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에서도 이건 장르 공식, 장르 전형, 유구한 흐름입니다. 특히, 서구 근대화 이후, 사회 구조가 대대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장르 공식, 장르 전형, 유구한 흐름으로서 사회 구조 비판은 정착했습니다. 사회 구조 비판은 얄팍하거나, 1차원적이거나, 안락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에서 사회 구조 비판은 중요한 흐름입니다. 그래서 관객이 사이언스 픽션, 포스트 아포칼립스, 디스토피아로서 <설국 열차>를 바라볼 때, 관객은 사회 구조 비판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설국 열차>에는 개별적인 정체성이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장르 전형에서 <설국 열차>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건 건축 구조와 비슷합니다. 건축 구조에 토대(기초 공사)와 상부 구조가 있는 것처럼, 장르 전형은 토대가 되고, <설국 열차>는 상부 구조가 됩니다. 토대에서 상부 구조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우나, 토대 없이, 상부 구조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상부 구조보다 토대는 우선합니다. 인간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랑스러운 독재 국가 헬조선에서 수많은 시민들은 개인입니다. 개인으로서 남한 시민들에게는 개별적인 정체성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헬조선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많은 남한 시민들은 자유주의 인간성, 가부장적인 인간성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자칭' 페미니스트들조차 가부장적인 인간성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토대(기초 공사)는 중요합니다.
자본주의 헬조선 사회에서 '자칭' 페미니스트가 가부장적인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사회 관계 앙상블 속에서 인간성이 나타나는 것처럼, 장르는 토대(기초 공사), 사회 관계 앙상블입니다. <설국 열차>는 상부 구조, 인간성입니다. 인간성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토대로서 사회 관계 앙상블을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설국 열차>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토대로서 장르 전형을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토대, 장르 전형이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듀나님은 신자유주의 비판이 어설픈 색깔론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관객은 <설국 열차>가 신자유주의 비판이라고 말합니다. 해석들은 다양합니다.
해석들은 다양하고, 듀나님과 어떤 관객은 모두 타당합니다. 여러 문학 평론가들이 누누히 말하는 것처럼, 대조적인 해석들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국 열차>가 상부 구조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설국 열차>를 해석하기 위해 SF 평론가는 어떻게 장르 전형이 나타나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는 어떻게 (생태학 SF) 장르가 나타나는지 너무 지겹게 떠듭니다. 이게 너무 지겹다고 해도, 이 블로그는 떠들어야 합니다. 듀나님처럼, SF 칼럼니스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SF 장르를 너무 협소하고 얄팍하고 1차원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너무 애석합니다.
"접점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공감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것이 있다고 해서 허구의 세계가 모두 현실 세계의 반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도대체 왜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가? 이미 현실 세계를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들인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보는 것 이외엔 관심이 없는가?" 이렇게 듀나님은 묻습니다. 아, 그래요? 만약 이미 우리가 뭔가를 인식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는가?"에 아무 의미가 없을까요? 생물학 만화 <김명호의 생물학 공방>은 "어떻게 생명체 내부 구조를 표현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이미 사진이 존재함에도, 왜 <생물학 공방>이 그림을 중시하나요?
해부학 사진과 해부학 그림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나요? 해부학 사진과 해부학 그림을 대조해 보세요. 해부학 사진은 생생하나, 사진은 뭔가를 특정하게 강조하지 못합니다. 비록 사진이 뭔가를 강조한다고 해도, 사진보다 그림은 뭔가를 훨씬 특정하게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물학 공방>은 그림을 중시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는가?"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아는 것을 다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것을 안다고 해도,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는가'입니다. 생체 우주선 소설은 거시적인 지구 자연 환경을 훨씬 감각적으로 전환합니다. 이런 전환 때문에, 생체 우주선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상징, 기호, 비유가 나타나는가?" 문화 예술 평론가에게 이건 기초적인 물음입니다. 이웃집 영희가 옆동네 철수에게 고백할 때, 이웃집 영희는 두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고, 두 뺨을 붉히고, 나지막하게 말합니다. "철수야, 네 영혼은 고귀한 보석이야. 나는 그 보석을 사랑해." 어머,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이웃집 영희가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나요? 전지전능한 신이 고귀한 보석으로서 영혼을 만들었고 옆동네 철수에게 보석을 집어넣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비유입니다. 영혼과 고귀한 보석은 상징입니다. 이웃집 영희는 자신이 옆동네 철수를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건 이상합니다.
왜 이웃집 영희가 직접 말하지 않나요? "나는 고귀한 보석을 사랑해."와 "나는 네가 좋아~♥"는 똑같은 의미입니다. 왜 이웃집 영희가 고귀한 보석을 말하나요? 양쪽 문장에서 의미가 똑같다고 해도, 과장, 비유로서 기호, 상징이 애정을 훨씬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과장, 비유로서 기호, 상징은 애정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애정을 만지지 못하나, 우리는 보석을 만질 수 있습니다. 애정은 추상적이나, 보석은 감각적입니다. "나는 고귀한 보석을 사랑해." 이 문장은 추상(애정)을 감각(보석)으로 전환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추상적인 것보다 감각적인 것을 선호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유기체 동물입니다.
유기체 동물로서 우리에게는 육체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유, 전환을 선호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듀나님은 이것을 무시하고 주관적인 의견을 말합니다. 문화 예술 평론가가 다양한 해석들을 존중해야 함에도, 듀나님은 다양한 해석들을 개무시하고 오직 자신만 옳다고 강요합니다. 적어도 <설국 열차> 평론은 다양한 해석들을 개무시하고 장르 전형을 간과합니다. 그래서 아주 결정적인 지적은 이겁니다. 'SF'가 무엇인가요? "SF 장르의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렇게 듀나님은 따옴표를 이용했고 강조했습니다. 만약 이 서술이 옳다면,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합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이 고정적이고 선천적이고 단일한 실체인가요?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가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박홍규 교수는 <에코토피아 뉴스>가 단순한 공상 과학 소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소설 <뒤돌아보며>가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alt.SF는 이 소설이 무늬만 SF라고 말합니다. 어떤 독자는 소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가 소설 <허랜드>를 오마쥬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소설 <허랜드>가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비디오 게임 <어스텅>과 <제노블룸>이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고장원님은 <어스텅>과 <제노블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는 사이언티픽 로망스에서 설정과 비유 역할을 논쟁했습니다. 이런 여러 사례들은 SF 장르가 고정적이고 선천적이고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고 증명합니다.
[바이오 돔 그림은 생태학 SF 범주에 속합니다. 어떻게 '현실 속에서' 생태학 SF 범주가 나타납니까?]
사이언스 픽션은 유동적인 논의 과정에 가깝습니다. SF 장르가 고정적이고 선천적이고 단일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SF 평론가는 SF 그 자체보다 SF를 결정하기 위한 '배후'와 배후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을 주시해야 합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배후'와 '기준'을 주시하지 않는다면, SF 평론가는 하늘에서 갑자기 SF 장르가 뚝 떨어졌다고 간주할 겁니다. 듀나님은 하늘에서 갑자기 SF 장르가 뚝 떨어졌다고 간주합니다. 이건 장르 물신주의입니다. 빌어처먹을 가부장 문화는 허공에서 갑자기 부유하고 자유로운 자본주의가 번쩍 나타났다고 주장합니다. 빌어처먹을 가부장 문화 헛소리처럼, 듀나님은 하늘에서 SF 장르가 뚝 떨어졌다고 간주합니다.
우리가 상품 가격 그 자체보다 상품 가격 '배후'에서 빌어처먹을 자본주의 생산 관계가 작동한다고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SF 평론가는 SF 그 자체보다 SF '배후'에서 어떤 생산 조건들이 SF 장르를 만드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듀나님은 이것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듀나님은 그 자체로서 어쩌구 운운합니다. 이건 지배 계급 명분입니다. 지배 계급은 그 자체로서 여자가 조신하고, 그 자체로서 흑인이 열등하고, 그 자체로서 인디언이 야만적이고, 그 자체로서 문학이 나타난다고 지껄여댑니다. 지배 계급은 조신한 여자 '배후'에서 무엇(빌어처먹을 가부장 제도)이 작동하는지 절대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여자는 그저 조신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체로서 여자가 조신하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신한 여자 '배후'에서 가부장 제도가 지배적인 관념을 형성하고 세뇌한다고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듀나님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듀나님이 이것을 거부함에도, 듀나님은 한 입으로 두말하고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볼까요? 만약 어떤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에서 외계 파충류 괴물 수컷이 인간 여자를 벌거벗기고 신나게 열심히 강간하고 강간하고 강간하고 다시 강간한다면, 만약 소설이 강간 장면들을 즐겁게 늘어놓는다면, 듀나님이 그 자체로서 이런 세계를 존중할까요?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남자 배우가 외계 파충류 괴물 수컷으로 분장하고 여자 배우를 정말 강간한다면, 듀나님이 그 자체로서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를 존중할까요?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를 강간함에도,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 스페이스 오페라가 중요한가요? 그 자체로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또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여자 배우의 젖가슴에 피멍이 들고 보지 구멍이 찢어질 때까지,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를 강간한다고 해도, 듀나님이 또 다른 세계, 스페이스 오페라를 존중할까요? "어떻게 외계 괴물 수컷이 인간 여자를 강간하기 원하지?" 이렇게 듀나님이 물을까요?
아니, 듀나님은 현실 속의 가부장 문화와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을 연결할 겁니다. 그 자체로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사라지고, 외계 파충류 괴물은 (추악한) 반영, 거울이 됩니다. 듀나님은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를 생산하기 위한 조건(강간 범죄)을 비판할 겁니다. 이런 비판은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빌어처먹을 가부장 제도가 지배적인 관념을 형성하고, 가부장 제도/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듀나님이 '배후'를 비판함에도, 듀나님은 한 입으로 두 말하고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듀나님은 실수했을 겁니다. 듀나님은 장르 물신주의를 믿지 않을 겁니다. 비록 <설국 열차> 평론이 장르 물신주의에 빠졌다고 해도, 듀나님과 <설국 열차> 평론은 일치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듀나님이 그저 실수했을 뿐이라고 해도, 분명히 <설국 열차> 평론은 장르 물신주의에 빠졌습니다. <설국 열차> 평론이 SF 장르를 너무 1차원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어떤 SF 팬들은 생태학 SF 장르, 생체 우주선 소설, 외계 생태계 만화, 거대 괴수 영화, 테라포밍 게임을 너무 1차원적으로 바라볼지 모릅니다. 생태학 SF 덕후에게 이건 참을 수 없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