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산소 미포함>과 생체 우주선 소설, 장르 분류 본문
[게임 제작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주 생존 게임과 생체 우주선 소설은 비슷한 부류입니다.]
여러 평론가들과 많은 독자들은 작가가 소설을 완전히 통제한다고 간주합니다. 소설은 작가를 반영합니다. 작가는 완전무결한 정신을 소설에 집어넣습니다. 소설은 완벽한 구성입니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고 완전무결한 작가 의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작가 의도를 추구해야 합니다. 작가 의도에서 독자는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게 좋은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문제들이 있습니다. 정말 작가가 소설을 완전히 통제하나요? 만약 어떤 소설이 태블릿 PC를 묘사한다면, 이게 소설 작가가 태블릿 PC 기술자라는 뜻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작가가 태블릿 PC를 조립하지 못한다고 해도, 작가는 소설 속에 태블릿 PC를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정말 작가가 완전무결한 의도를 소설 속에 집어넣나요? 만약 어떤 소설이 가난한 사람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게 작가가 <자본의 축적>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뜻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어쩌면 자본주의 만만세를 부르짖거나 세상이 이상하게 굴러간다고 한탄하기 위해 작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소설 속에 집어넣었는지 모릅니다. 작가들이 2008년 금융 대란을 분석하지 못한다고 해도, 작가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소설 속에 집어넣고 빈부 격차가 너무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정말 소설이 완벽한 구성인가요? 언제나 소설들이 완벽한 비율로서 기승전결을 제시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어떤 소설에서 발단은 너무 짧고, 어떤 소설은 결론으로 너무 성급하게 넘어갑니다. 심지어 소설에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습니다. 작가가 갈등들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끝내지 못할 때, 작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집어넣고 단번에 모든 것을 끝내기 원할 겁니다. 만약 잡지에서 연재 소설이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한다면, 편집부는 연재를 일찍 끝내기 원할 테고, 작가는 연재를 억지로 마무리지어야 할 겁니다. 소설은 결론을 향해 너무 성급하게 달릴 겁니다.
심지어 작가가 어떤 주제를 싫어함에도, 돈벌이를 위해 작가는 그 주제를 쓸지 모릅니다. 아니면 외부 영향 때문에, 작가는 뭔가를 소설 속에 집어넣는지 모릅니다. 할란 엘리슨이 영화 <터미네이터>에 영향을 미쳤나요? 제임스 카메론은 할란 엘리슨을 인정하기 원하지 않았으나, 법적인 문제 때문에, 제임스 카메론은 이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런 사례처럼, 작가는 소설을 혼자 쓰지 않습니다. 여러 특정한 상황들과 조건들 속에서 작가는 소설을 씁니다. 소설이 뭔가를 말한다고 해도, 독자는 그게 작가 의도라고 100% 확신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오직 작가 의도만 주구장창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프랜시스 코폴라는 창작에 완성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프랜시스 코폴라는 영화 감독이나, 소설 작가 역시 이 문구를 새겨들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퇴고를 거듭하나, 어느 순간에서 작가는 퇴고를 멈춥니다. 만약 작가가 오직 퇴고만 영원히 반복한다면, 작가는 소설을 출판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을 출판하기 위해 어느 순간에서 작가는 퇴고를 멈춰야 합니다. 이건 완성이 아닙니다. 작가는 그저 퇴고를 멈출 뿐입니다. 그래서 소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작가 의도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합니다. 만약 작가가 계속 퇴고한다면, 소설은 계속 바뀔지 모릅니다. 심지어 소설은 아주 크게 바뀔지 모릅니다.
소설이 아주 크게 바뀔지 모름에도, 독자가 소설이 작가 의도를 완벽하게 반영한다고 간주해야 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국가 정부를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파리 코뮌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생각을 바꿉니다. 파리 코뮌이 보여준 것처럼, 아무 조건 없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국가 정부를 장악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 정부는 지배 계급의 통치 수단입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국가 정부를 장악하기 전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국가 정부를 뜯어고쳐야 합니다. 피지배 계급이 국가 정부를 뜯어고친 이후, 피지배 계급은 국가 정부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수정합니다. 파리 코뮌은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미치고, 나중에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이것을 반영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로!"라고 외칩니다. 자본주의가 탄압했기 때문에, 비록 블라디미르 레닌이 <4월 테제>를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고 해도, 러시아 '소비에트'는 파리 '코뮌'을 계승합니다. 하지만 만약 파리 코뮌이 나타나기 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죽었다면, <공산당 선언>은 바뀌지 않았을 테고, <공산당 선언>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국가 정부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을 겁니다. 소설 역시 <공산당 선언>과 비슷합니다.
만약 작가가 퇴고를 거듭한다면, 소설은 계속 바뀔 겁니다. 심지어 초고와 최종 원고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을지 모릅니다. 가끔 작가들은 소설을 크게 고치거나 심지어 갈아엎습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고 작가가 뭔가를 주장한다고 느낄지 모르나, 만약 작가가 계속 퇴고할 수 있었다면, 작가는 다른 것을 이야기했을지 모릅니다. 파리 코뮌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고친 것처럼, 만약 작가가 계속 퇴고할 수 있다면, 작가 역시 소설을 고칠지 모릅니다. 초고와 최종 원고가 다른 것처럼, 소설은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니스트 헤밍웨이처럼, 어떤 작가들은 초고가 쓰레기라고 생각합니다.
초고와 최종 원고가 다르고, 소설이 일관적이지 않음에도, 독자가 소설이 작가 의도를 반영한다고 간주해야 하나요? 만약 소설이 작가 의도를 완벽하게 반영한다면, 왜 많은 작가들이 슬럼프에 빠지나요?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얼마나 작가들이 창작 과정을 힘들게 통과하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을 쥐어짭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는 자신을 쥐어짜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가 자신을 쥐어짠다고 해도, 작가는 오직 몇 줄만 쓸지 모릅니다. 하루 종일 작가가 머리를 쥐어뜯는다고 해도, 작가는 백지를 채우지 못할지 모릅니다. 작가는 소설에 자신을 쉽게 반영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백지를 마주보고 백지에 글자들을 채워야 합니다. 작가가 글자들을 채우는 동안, 작가는 자신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머리를 쥐어뜯어야 합니다. 이건 모든 창작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들에서 어떤 작가들은 소설들을 훨씬 쉽게 쓸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많은 작가들은 슬럼프에 빠지거나 머리를 쥐어뜯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소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언제, 어떻게, 왜 작가가 머리를 쥐어뜯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독자는 오직 소설만 읽을 뿐입니다. 소설은 결과이고, 소설은 창작 과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작가가 답사를 다녀왔거나, 작가가 누군가를 취재했거나, 작가가 뭔가를 공부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소설은 결과이고, 독자는 오직 결과만 읽습니다. 독자는 결과로서 소설을 읽고 창작 과정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로서 소설은 창작 과정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떤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작가가 머리를 쥐어뜯었고 고민했음에도, 독자는 그 장면을 쉽게 읽고 넘어갈지 모릅니다. 아무리 작가가 공을 들였다고 해도, 독자는 그것을 간단하게 넘어갈지 모릅니다. 아니면 독자가 뭔가를 중시한다고 해도, 작가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작가가 뭔가를 썼음에도, 독자는 거기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평론가들조차 그럴지 모릅니다. 만약 모더니즘 작가가 언어를 기상천외하게 이용한다면, 평론가들은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용감무쌍하게 해석할 겁니다. 어떤 평론가들은 헛다리를 짚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들은 후기 헨리 제임스가 너무 실험적이라고 비판합니다. 후기 헨리 제임스가 언어를 너무 이상하게 이용했기 때문에, 평론가들은 헨리 제임스가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실험에 도전했다고 비판합니다. 만약 작가가 소설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독자 역시 작가 의도를 따르지 못할 겁니다.
심지어 작가는 자신을 무엇을 쓰기 원하는지 파악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흔히 로맨스 만화들에는 여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 보조적인 남자 주인공(서브남)이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과 서브남 사이에서 여자 주인공은 갈등합니다. 여자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를 훨씬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로맨스 만화 속의 여자 주인공처럼,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쓰기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소설의 진화> 초반부에서 콜린 윌슨은 여러 작가들이 그들 자신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아무리 작가에게 여러 소재들이 있다고 해도, 작가는 소재와 주제를 연결하지 못하고 소재에서 소설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만약 작가가 자신이 무엇을 쓰기 원하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독자는 작가와 소설이 일치하거나 작가가 소설을 완벽하게 통제한다고 간주하지 못할 겁니다. 전반적으로 콜린 윌슨은 너무 주관적인 실존주의를 들이밀고, 남자 작가들에게 치중하고, 여자 작가들을 너무 무시하나, 이런 지적에는 뼈대가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쓰기 원하는지 파악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작가가 소설을 어느 정도 쓴 이후, 작가는 "이런, 젠장! 나는 이런 소설을 원하지 않았어!"라고 안타깝게 외칠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는 소설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쳐야 합니다. 작가는 소설 속의 세상을 창조하나, 작가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만약 21세기 초반 독자가 소설 <허랜드>를 읽고 작가에게 뭔가를 묻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작가 샬롯 퍼킨스 길먼이 고인이기 때문입니다. 1935년 8월에 75세 나이로서 샬롯 퍼킨스 길먼은 고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21세기 초반 독자가 <허랜드>를 읽고 뭔가를 묻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모든 창작물 해석은 이런 문제에 부딪힙니다. 인간들은 소설, 만화, 영화, 게임 같은 창작물들을 만드나, 인간은 필멸자입니다. 다른 많은 동물들처럼, 호모 사피엔스는 동물이고, 동물로서 호모 사피엔스는 필멸자입니다. 수마트라 호랑이가 필멸자인 것처럼, 인간은 필멸자입니다.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필멸자입니다. 뭐, 영화 <맨 프롬 어스>처럼, 어떤 인간들은 불멸자인지 모르나, 공식적으로 모든 인간은 필멸자입니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고, 다른 많은 동물들과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 역시 필멸자입니다. 만약 작가 의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 작가가 필멸자이기 때문에, 작가가 고인이 되는 순간, 독자는 독서를 멈춰야 할 겁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고 뭔가를 묻기 원한다고 해도, 고인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독자가 소설책을 버려야 하나요? 하지만 샬롯 길먼이 고인이라고 해도, 많은 독자들은 <허랜드>를 읽습니다. 작가 의도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사례들은 소설에서 작가 의도가 절대적이지 않다고 증명합니다. 작가와 소설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작가와 소설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작가를 믿기보다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소설이 작가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작가를 읽지 못합니다. 이건 독자가 작가 의도를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작가와 소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도,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소설 속에 집어넣을 테고, 독자는 이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독자'는 뭐라고 작가가 말하는지 파악합니다. 하지만 이상적인 독자 역시 작가와 소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인정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작가가 SF 소설을 쓴다고 해도, SF 작가와 SF 소설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만약 SF 소설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건 SF 작가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류 문명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띄운 적이 없기 때문에, SF 작가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타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SF 작가는 SF 소설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합니다. SF 작가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SF 작가는 소설 속의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SF 작가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러 평론가들, 독자들은 SF 작가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통제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건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집니다. 어떤 평론가들, 독자들은 SF 작가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만들고 그 자체로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존재한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또 다른 현실'이 될 수 있고, SF 독자는 현실로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SF 독자가 현실로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해석할 수 있나요? SF 설정이 또 다른 현실이 될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만약 SF 소설이 또 다른 현실이 된다면, 이건 너무 많은 논란들에 부딪힐 겁니다.
심지어 주류 문학조차 현실이 되지 못합니다. 단편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보세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옥희 엄마에게 좌심방, 좌심실이 있다고 서술하지 않으나, 독자는 옥희 엄마에게 좌심방, 좌심실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약 창조주로서 주요섭이 '또 다른 현실'을 만들었다면, 독자는 확신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그 자체로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또 다른 현실이라면, 현실로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옥희 엄마에게 좌심방, 좌심실이 있다고 서술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옥희 엄마에게 좌심방, 좌심실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할 겁니다. '또 다른 현실'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좌심방, 좌심실이 없는지 모릅니다.
옥희 엄마가 호흡하고, 심장이 쿵쾅거린다고 해도, 옥희 엄마에게는 오직 우심방, 우심실만 있는지 모릅니다. 자랑스러운 반공 독재 국가 헬조선처럼, 옥희 엄마에게는 오직 심장 오른쪽만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해석이 옳은가요? 그건 아닙니다. 또 다른 현실을 운운하는 평론가들, 독자들조차 여기에 (완전히/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문학 해석들이 다양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문학 해석들은 다양합니다. 어쩌면 정말 옥희 엄마에게는 좌심방, 좌심실이 없는지 모릅니다. 문학 해석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또 다른 현실 속에서 인간에게는 좌심방, 좌심실이 없다) 역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독자들은 이런 해석에 반박할 겁니다. 어떤 독자는 옥희 엄마에게 좌심방, 좌심실이 없다고 해석할 테고, 어떤 독자는 옥희 엄마에게 좌심방, 좌심실이 있다고 해석할 겁니다. 하지만 두 독자는 합의할 수 있습니다. 두 독자는 현실 속에서 주요섭이 호모 사피엔스를 참고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현실 속의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좌심방, 좌심실이 있습니다. 두 독자가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SF 독자 역시 현실을 참고해야 할 겁니다. 만약 SF 소설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가 있다고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면, SF 독자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가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나요?
하지만 SF 독자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가 있다고 해석하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SF 독자가 이것을 해석하고 추측할 수 있나요? 만약 SF 소설이 또 다른 현실이라면, SF 독자가 오직 SF 소설이 말하는 것만 따라가야 하지 않나요? SF 작가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또 다른 현실을 만들었기 때문에, SF 작가가 창조주가 되기 때문에, SF 독자가 오직 SF 작가만 따라가야 하지 않나요? 만약 작가 의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SF 소설이 또 다른 현실이라면, SF 작가(가 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이야기)가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를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기 때문에, SF 독자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가 있다고 확신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좌심방을 서술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가 옥희 엄마에게 좌심방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SF 독자는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를 확신하지 못할 겁니다. 이게 타당한 해석인가요? 아니, 작가는 창조주가 아닙니다. 문학은 또 다른 현실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일종의 세계라고 해도, 이건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에서 이건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SF 독자는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를 참고하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속에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SF 독자가 소설 속의 바이오 돔 순환을 완벽하게 추측하지 못한다고 해도, SF 독자는 소설 속의 바이오 돔과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 순환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어떤 평론가들은 SF 작가가 또 다른 현실을 만들고 또 다른 현실로서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존재한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다양한 독자들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다양하게 해석할 겁니다. 다양한 해석들은 충돌하고, 대립하고, 갈등할 겁니다. SF 소설이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가가 문학을 통제하기 원한다고 해도, 문학은 모든 삼라만상을 말하지 못합니다. 문학에는 빈틈이 있고, 인류 문명이 생체 우주선을 띄운 적이 없기 때문에, SF 소설에는 훨씬 많은 빈틈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SF 소설 속에는 세계 설정(world setting)이 있으나, SF 독자들이 세계 설정을 바라볼 때, SF 독자들은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만약 생체 우주선이 독립적인 현실이라면, 중세 문학에도 생체 우주선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중세 문학에는 또 다른 현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현실(중세) 속에서 작가가 소설을 쓰기 때문입니다. 생체 우주선은 생태학, 천문학, 우주 사업에 기반해야 합니다. 생태학, 천문학, 우주 사업은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중세 사회에는 생태학, 천문학, 우주 사업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생체 우주선이라는 세계 설정을 이야기하기 위한 서구 근대화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실 속에서 서구 근대화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중세 문학이 생체선(生體船)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건 서구 근대화보다 홍수 설화에 기반해야 합니다. 만약 방주에 생물 다양성이 있다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처럼, 방주는 생체선에 속하겠으나,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홍수 설화 방주는 완전히 다릅니다.
현실 속에서 작가가 소설을 쓰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SF 작가는 생체 우주선이 항해한다고 쓸 수 있으나, 중세 문학 작가는 오직 홍수 설화에만 기반해야 합니다. 이렇게 현실이 문학에 영향을 미침에도, 여러 평론가들, 많은 독자들은 작가가 현실을 배제하고 소설을 통제한다고 간주합니다. 그들은 오직 작가가 말하는 것, 소설이 말하는 것만 찾습니다. 이게 불가능함에도, 여러 평론가들, 많은 독자들은 완벽한 작가 의도, 현실로서 소설을 찾습니다. 하지만 소설은 현실이 아니고, 소설을 쓰고 해석하기 위해 작가와 독자는 현실에 기반해야 합니다. 작가와 독자는 현실을 절대 배제하지 못합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만화, 영화,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디오 게임 <산소 미포함>은 2D 측면 시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산소 미포함> 속의 세계가 3차원보다 2차원인가요? 창조주로서 게임 제작자들이 2D 측면 시점을 만들었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 속의 세계는 2차원이다."라고 이해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2D 측면 시점은 형식, 비디오 게임적인 연출입니다. 이건 형식, 연출, 매체 측면에 속합니다. 절대적인 창조주로서 게임 제작자들은 2D 측면 세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게임 플레이어는 현실을 참고하고 게임 속의 세계 역시 3차원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창작물 내용, 주제, 형식, 장르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내용, 주제, 형식, 장르를 만들고 해석하기 위해 인간은 현실을 참고합니다.
심지어 게임 플레이어는 생체 우주선 소설과 <산소 미포함>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생체 우주선에서 우주선 승무원들은 작은 사회를 이룩하고 작은 생태계를 관리합니다. <산소 미포함>에서도 외계 생존자들은 작은 사회를 이룩하고 작은 생태계를 관리합니다. 양쪽에는 모두 외계 생존, 작은 사회, 작은 생태계가 있습니다. 양쪽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생체 우주선 소설과 <산소 미포함>을 하나로 묶고 '장르'를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장르'는 나타납니다. 만약 그 자체로서 <산소 미포함>이 또 다른 현실이라면, 어떻게 게임 플레이어가 장르를 분류할 수 있나요?
생체 우주선 소설은 글자들입니다. <산소 미포함>은 2D 측면 시점입니다. 양쪽 현실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생체선 소설과 <산소 미포함>을 함께 묶지 못할 겁니다. 그 자체로서 여러 현실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이 현실과 저 현실을 묶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생체선 소설과 <산소 미포함>은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은 유일하고, 유일한 현실 속에서 SF 작가는 생체선 소설을 쓰고, 게임 제작자들은 우주 생존 게임을 만들고, 게임 플레이어는 소설을 읽고 게임을 플레이합니다. SF 작가가 <산소 미포함>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생체선 소설과 <산소 미포함>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만약 김초엽 작가가 이 게임을 알지 못한다면, 김초엽 작가 소설과 이 게임이 똑같은 장르가 되지 않나요?]
허버트 웰즈가 쓴 <타임 머신>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산소 미포함>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아니, 이뤄어어어어어얼수가!! 허버트 웰즈는 비디오 게임을 알지 못했고 <산소 미포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허버트 웰즈가 비디오 게임 <산소 미포함>을 알지 못했음에도, 작가 의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함에도, 그 자체로서 <타임 머신>이 또 다른 현실임에도, 어떻게 감히 사람들이 글자 매체 소설 <타임 머신>과 컴퓨터 비디오 게임 <산소 미포함>이 똑같은 SF 장르라고 분류할 수 있나요? 그 자체로서 <타임 머신>이 현실이기 때문에, 작가로서 허버트 웰즈가 절대적인 창조주이기 때문에, 이건 불경입니다! 김초엽 작가 역시 SF 작가입니다. 김초엽 작가가 <산소 미포함>을 아나요?
어쩌면 김초엽 작가는 <산소 미포함>을 아는지 모르고 <산소 미포함>이 SF 게임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김초엽 작가가 <산소 미포함>을 알지 못한다면, 소설 모음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비디오 게임 <산소 미포함>이 똑같이 SF 장르가 될 수 있나요? 절대적인 창조주로서 김초엽 작가느님께서 글자 매체 소설을 쓰셨음에도, 어떻게 비디오 게임과 소설이 똑같이 SF 장르가 되나요? 글자 매체는 비가시적입니다. 명칭처럼, 비디오 게임은 비디오 매체입니다. 어떻게 비가시적인 글자 매체와 비디오 매체가 똑같은 SF 장르가 되나요? '비'가시적인 글자 매체와 '비'디오 매체에게 모두 '비'가 앞글자이기 때문에? 이건 절대적인 창조주 작가 의도를 무시합니다.
하지만 김초엽 작가가 <산소 미포함>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SF 팬들은 소설 모음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비디오 게임 <산소 미포함>이 똑같이 SF 장르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작가 의도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설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가와 소설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발버둥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분명히 작가 의도는 아주 중요하나, 우리는 작가와 소설보다 현실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은 현실과 동등해지지 못합니다. 작가와 소설은 뒷전이고, 현실은 우선입니다.
예전에 듀나님이 영화 <설국 열차>와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평가했을 때, 듀나님은 예술과 현실을 자의적으로 결정한 적이 있습니다. 듀나님은 그 자체로서 예술이 현실이 된다고 말했고, 한편으로 듀나님은 예술과 현실이 별개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듀나님은 SF 세계 설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기 원했을 테고, 분명히 이런 발언은 옳으나, <아메리칸 스나이퍼>에도 세계 설정이 있습니다. 시리아 저격수 무스타파는 세계 설정에 속합니다. 비일상적인 설정 생체 우주선과 달리, 무스파타는 일상적인 설정이나, 그렇다고 해도 무스타파는 설정에 속합니다. 현실 속에서 미군 저격수 크리스 카일이 정말 시리아 저격수 무스타파와 싸웠나요?
영화 속에서 시리아 저격수 무스타파는 FPK/PSL 저격 소총을 이용합니다. 만약 현실 속에서 크리스 카일이 시리아 저격수와 싸웠다면, 시리아 저격수가 FPK/PSL 저격 소총을 이용했나요? 만약 시리아 저격수가 FPK/PSL 저격 소총을 이용했다면, 영화 속의 FPK/PSL 일련 번호와 현실 속의 FPK/PSL 일련 번호가 똑같나요? 무슨 병기창이 FPK/PSL 저격 소총을 만들었나요?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현실 속의 시리아 병기창을 재현하나요? 무스타파가 크리스 카일이 탄 차량을 노릴 때, 카메라 시점은 무스타파 뒷모습을 보여줍니다. 현실 속에도 카메라 시점이 있나요? 현실 속에 '시점'이 있나요?
생체 우주선 소설과 달리,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일상적인 영화라고 해도, 이렇게 <아메리칸 스나이퍼>에는 세계 설정이 있습니다. <설국 열차>처럼, <아메리칸 스나이퍼>에는 세계 설정이 있습니다. 영화 속의 FPK/PSL 일련 번호와 현실 속의 FPK/PSL 일련 번호가 똑같지 않은 것처럼,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왜 듀나님이 오직 SF 영화만 또 다른 세계라고 강조하나요? 듀나님이 SF 작가이기 때문에? 듀나님이 SF 우월론자인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SF 설정을 강조하기 위해 듀나님은 FPK/PSL 저격 소총 일련 번호 설정을 무시했으나, 이건 실수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듀나님은 예술과 현실을 자의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저격 소총 일련 번호를 자세히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어떤 관객들은 저격 소총에 일련 번호가 없다고 해석할지 모르나, 생체 우주선을 해석하기 위해 SF 독자가 현실 속의 생태계 순환을 참고하는 것처럼, 관객들은 현실을 참고하고 FPK/PSL 저격 소총에게 일련 번호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옥희 엄마의 좌심방, 바이오 돔 속의 분해자, 우주 개척 기지, FPK/PSL 일련 번호를 해석하기 위해 사람들은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창작물을 해석하기 위해 사람들은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만약 그 자체로서 <설국 열자>가 현실이라면, 관객들은 오직 <설국 열차>(를 감독한 봉준호)가 말하는 것만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하지만 예술(감독)은 뒷전이고, 현실은 우선입니다. 이건 불변입니다.
※ 게임 <산소 미포함> 스크린샷 출처: shead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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