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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생체 우주선이 여왕인가, 아니면 시녀인가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생체 우주선이 여왕인가, 아니면 시녀인가

OneTiger 2020. 2. 1. 20:51

[그 자체로서 바이오 돔 기지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바이오 돔 기지가 존재하기 시작했나요?]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이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은 너무 어리석습니다. 이런 믿음이 너무 어리석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을 저도 모르게 믿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 이 순간'이 종착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류 역사는 종착역에 다다랐습니다. 더 이상 인류 역사는 바뀌지 않습니다.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연장선, 확장 판본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미래가 바뀐다고 해도, 인류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기 때문에,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미래가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연장선에 불과하기 때문에, 미래와 '지금 이 순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의 종착역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인류 역사의 종착역에서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기준이 됩니다. 특히, 여기에서 '지금 이 순간'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가리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장 좋은 기준이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본질이 됩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자유주의 인간입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적인 재산 소유 권리를 강조하고,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뒷받침합니다.

 

 

자유주의는 인간 본질입니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 인간입니다. 다른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인간들은 낡은 것들입니다. 인류 역사가 종착역(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다다랐기 때문에, 자유주의 인간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은 틀린 것이고 낡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성을 파악할 때, 우리는 "어떻게 인간성이 나타나는가?"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유주의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본질(자유주의)만 말해야 합니다. 이미 모든 인간이 자유주의 인간이고, 다른 인간이 존재하지 못함에도, 왜 우리가 "어떻게 인간성이 나타나는가?"라고 물어야 하나요?

 

만약 우리가 "어떻게 인간성이 나타나는가?"라고 묻는다고 해도, 우리는 오직 자유주의 인간만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고정해야 합니다. 이런 고정 관념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나타나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나타나는지보다 왜 자유주의가 인간 본질인지 물어야 합니다. 유명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은 말합니다. "왜 인류 사회에게 개인적인 소유, 사적 소유가 필요한가? 인간 본성 특질과 사적 소유가 근본적으로 맞닿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적 소유가 인간 본질과 맞닿았기 때문에, 알프레드 마샬은 다른 인간보다 오직 자유주의 인간만 인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명한 경제학자 존 베이츠 클라크 역시 비슷하게 설명합니다. "자연 법칙은 사회 소득 분배를 통치한다. 만약 자연 법칙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노동과 자본과 토지는 이것들이 스스로 창출한 만큼 부를 가져다줄 것이다." 노동, 자본, 토지는 자본주의 경제학 설정입니다. 그래서 자연 법칙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연 법칙입니다. 인간은 자연 법칙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연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자유주의는 개인 재산 소유를 아주 강조하고, 그래서 자유주의 철학은 자본주의 경제를 뒷받침합니다.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자연 법칙입니다.

 

자유주의가 자연 법칙이고, 인간이 자연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인간은 자유주의입니다. 인간 본질은 자유주의입니다. 다른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인간이 자유주의라고 규정합니다. 너무 위대하고 훌륭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과 존 베이츠 클라크는 인간 본질이 반드시 자유주의라고 설명합니다. 자본주의가 자연 법칙이기 때문에, 사적 소유/자유주의 역시 인간 본질입니다. 아아, 이건 너무 심오합니다. 알프레드 마샬과 존 베이츠 클라크는 너무 천재입니다. 하지만 왜 다른 무엇보다 사적 소유가 인간 본질이고, 왜 다른 무엇보다 자본주의 설정이 자연 법칙인가요?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인류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류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고, 이미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나타났음에도, 왜 우리가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의심해야 하나요? 이미 인류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미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오오, 믿슙니다~!!!"를 외치고 사적 소유와 자본주의를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 본질과 자연 법칙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체로서 사적 소유는 인간 본질입니다. 그 자체로서 여자가 가정적인 것처럼, 그 자체로서 인간은 자유주의입니다. 수많은 가정적인 여자들을 보세요.

 

이미 현실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가정적인 여자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인류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기 때문에, 우리는 수많은 가정적인 여자들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가정적인 여자 '배후'에 다른 뭔가가 존재한다고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연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가정적인 여자는 자연 법칙입니다. 가정적인 여자는 본질입니다. 여자는 반드시 가정적이어야 합니다. 여자는 곱게 치장해야 하고, 여자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고, 여자는 수줍어해야 하고, 여자는 다정다감해야 합니다. 남자가 거칠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라고 해도, 여자는 남자를 반드시 품어줘야 합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왜 이게 자연 법칙인지 물을 겁니다. 엘리노어 마르크스라는 여자는 가정적인 여자가 자연 법칙이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미친 여자 아닙니까? 대가리에 총알이라도 맞았나요? 이미 인류 역사가 종착역에 다다랐고, 인류 역사 종착역에서 우리가 수많은 가정적인 여자들을 확인할 수 있음에도, 미친 계집년들은 왜 가정적인 여자가 자연 법칙인지 묻습니다. 여자의 육체를 보세요. 여자의 육체에서 젖가슴은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왜 여자에게 젖가슴이 있나요? 여자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여자에게 젖가슴을 부여했고, 이건 신성한 자연 법칙입니다.

 

여자는 아기를 낳고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합니다. 여자는 아기를 돌봐야 합니다. 이건 자연 법칙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다정다감해야 하고, 여자는 가정적이어야 합니다. 여자가 가정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여자에게 다정함이 본질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여자는 분석, 관찰, 논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대표적인 철학자들, 과학자들이 남자들인가요? 여자가 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남자' 과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여자가 분석, 관찰, 논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증명했습니다. 아, 뭐, 사회 구조가 여자 무급 노동을 착취한다고 해도, 이게 무슨 상관인가요?

 

 

사회 구조가 여자 무급 노동을 착취한다고 해도,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보세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자들이고, 여자들은 육아와 가사 노동을 맡습니다. 하루 종일 여자가 가사 노동에 매달린다고 해도, 여자들은 댓가를 받지 않습니다. 가정적인 여자는 자연 법칙이고, 여자에게 육아는 본질이고, 그래서 여자는 가사 노동을 반드시 맡아야 합니다. 사실 가사 노동은 노동이 아닙니다. 여자에게 가사는 본질, 자연 법칙입니다. 이건 의무에 가깝습니다. 여자는 가정적입니다. 여자에게 모내기 같은 이른바 외부 노동, 재화 생산 노동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자가 가정적이기 때문에, 여자에게 외부 노동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남자보다 여자는 작은 댓가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남자가 10을 받는다면, 여자는 6을 받아야 할 겁니다. 아니, 여자가 가정적이기 때문에, 여자에게 외부 노동, 재화 생산 노동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만약 공장 사장이 여자 노동자를 고용한다면, 여자 노동자는 공장 사장에게 감사해야 할 겁니다. 공장 사장이 손해를 감수하고 여자 노동자를 고용하기 때문에, 아무리 공장 사장이 남자 노동자에게 10을 주고 여자 노동자에게 6을 준다고 해도, 여자 노동자는 공장 사장이 은혜롭다고 굽신굽신 허리를 숙여야 마땅합니다.

 

 

여자가 본질적으로 가정적이고 조신하고 다정한 것처럼,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입니다. 인간 본질은 사적 소유입니다. 우리는 자연 법칙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광신적인 빨갱이 새끼들은 이것을 의심하고 사적 소유를 없애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인가요? 소비에트 연방을 보세요. 소비에트 연방은 폭싹 망했습니다. 광신적인 빨갱이 새끼들이 사적 소유를 의심했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폭싹 망했습니다. 아, 뭐라고요? 네, 물론 19세기부터 이미 지배 계급은 사회주의 진영을 철저하게 짓밟았고, 학살했고, 고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상관인가요?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20세기는 제국주의 확장 시대였습니다. 20세기 초반에는 1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20세기 중반에는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20세기 후반에는 베트남 침략이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지역은 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베트남을 비롯해 제3세계를 침략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전쟁들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사회주의 진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급박하게 저항해야 했습니다. 연이은 전쟁들 동안, 사회주의 진영은 고유한 미덕들을 잃었고 그저 악으로 깡으로 저항했을 뿐입니다. 이건 20세기 사회주의의 진정한 실체입니다. 연이은 제국주의 전쟁들, 악과 깡, 너무 처절한 저항들.

 

 

하지만 이게 무슨 상관인가요? 20세기 동안, 20세기 초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자본주의 지역이 제국주의 침략들을 연이어 저질렀다고 해도, 이게 무슨 상관인가요? 제국주의 침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자 노동 착취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제국주의 전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자 무급 노동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여자들은 가정적입니다. 이건 본질, 자연 법칙입니다. 제국주의 침략과 상관없이, 빨갱이 새끼들은 미친 새끼들입니다. 제국주의 침략과 상관없이, 인간 본질(특히, 남자 본질)은 자유주의입니다. 이건 자연 법칙이고, 우리는 자연 법칙을 절대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나타나는가?"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물음이 금기인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자본주의가 나타나는가?"와 "어떻게 가정적인 여자가 나타나는가?"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적인 여자 '배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여자는 가정적입니다. 자본주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는 자연 법칙입니다. 이게 본질이기 때문에, 여자는 반드시 가정적이어야 하고, 사람들은 자연 환경을 공유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불변입니다. 이건 초월적입니다. 가정적인 여자가 불변이기 때문에, 가정적인 여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가정적인 여자가 절대 법칙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가정적인 여자를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자들은 곱게 치장하고, 조신하게 행동하고, 육아와 가사 노동을 의무적으로 담당하고, 비정규직들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여자들은 어떻게 그들이 훨씬 예뻐질 수 있는지 고민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표적인 철학자들, 과학자들은 여자들보다 남자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표적인 재벌들은 여자들보다 남자들입니다. 가정적인 여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자유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주의는 절대 법칙입니다. 이건 인간(남자) 본질입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유주의는 존재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오직 자유주의 관점에서만 우리는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자유주의 관점 이외에 다른 것들은 틀린 것, 낡은 것입니다. 오직 자유주의 관점만 옳습니다. 자유주의 관점은 "어떻게 뭔가가 나타나는가?"라고 묻지 않습니다. 너무 위대하고 훌륭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과 존 베이츠 클라크가 어떻게 본질이 나타나는지 묻지 않는 것처럼, 자유주의 관점은 "어떻게 뭔가가 나타나는가?"라고 묻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가정적인 여자는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뭔가가 나타나는지 묻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다른 많은 것들에도 본질이 있습니다. 인류 문화에는 본질이 있습니다. 문화 예술에는 본질이 있습니다. 문학에는 본질이 있습니다. 장르 문학에는 본질이 있습니다. SF 장르에는 본질이 있습니다. SF 장르에서 본질이 무엇인가요? 또 다른 세계는 본질입니다. SF 장르는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합니다. SF 장르에게 이건 본질입니다. 하지만 왜 SF 장르가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나요? 어떻게 SF 장르가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했나요? 원형적인 SF 장르가 나타났을 때, 이미 SF 장르가 또 다른 세계를 상상했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SF 장르는 유럽 출신입니다. 메리 셸리와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가 보여주는 것처럼, SF 장르는 유럽 출신입니다. 본격적인 SF 장르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유럽에서 토마소 캄파넬라는 <태양의 도시>를 썼고, 마가렛 캐번디시는 <불타는 세계>를 썼습니다. 사회 구조가 너무 불평등했기 때문에, 사회 구조를 비판하기 위해 토마소 캄파넬라는 <태양의 도시>를 썼습니다. 남자들이 여자 과학자를 차별했기 때문에, 마가렛 캐번디시는 <불타는 세계>를 썼습니다. <태양의 도시>와 <불타는 세계>처럼, 또 다른 세계에는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감성이 있습니다. 이게 SF 장르에 영향을 미쳤나요? 그래서 SF 장르가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나요?

 

 

아니, 잠깐. 왜 우리가 이것을 묻나요? 왜 우리가 어떻게 SF 장르가 나타나는지 묻나요? 우리는 이것을 묻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본질만 파악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정적인 여자가 나타납니까? 우리는 묻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적인 여자는 자연 법칙입니다. 이미 본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본질만 바라봐야 합니다. 가정적인 여자가 본질, 자연 법칙이기 때문에, 우리는 레이첼 카슨이 미친 씨발년이라고 비난해야 합니다. 어떻게 고작 계집년 따위가 감히 생태학, 자연 과학에 손을 대나요? 남자 지식인들이 마가렛 캐번디시를 몰아낸 것처럼, 우리는 레이첼 카슨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 여자가 가정적인 것처럼, 그 자체로서 SF 장르는 또 다른 세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가정적인 여자가 나타나는지 묻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SF 장르가 나타나는지 묻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본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이것만 추구해야 합니다. <설국 열차> 평론에서 듀나님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는 존재합니다. 이건 본질입니다. "현실에서 생체 우주선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왜 하드 SF 소설이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하나요?" 이렇게 우리는 묻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은 존재합니다.

 

 

너무 위대하고 훌륭한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과 존 베이츠 클라크가 어떻게 본질이 나타나는지 묻지 않는 것처럼, 위대하고 훌륭한 듀나님은 묻지 않습니다. 본질 '배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작품의 핵심을 먼저 찾는 것이 비평가들의 진짜 목표'여야 합니다. 문학 평론가는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문학 평론을 장악한다고 해도, 문학 평론가는 문학 평론 '배후'보다 문학 본질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문학 평론이 당파성보다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간주해야 합니다. 본질은 중요하고, 고작 배후 따위는 절대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설 <오벨리스크의 문>은 15,800원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15,800원은 너무 버거운 비용일 겁니다. 폭력적인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굶주리고 굶주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15,800원은 너무 버거운 비용일 겁니다.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학에 어떤 본질이 있기 때문에, 문학 평론가는 본질을 논의해야 합니다. 문학 평론가는 "어떻게 SF 장르가 또 다른 세계를 이야기하는가? 이유가 무엇인가? 어떻게 SF 장르가 나타나는가?"라고 절대 묻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위대하고 훌륭한 알프레드 마샬과 존 베이츠 클라크와 듀나님이 지적한 것처럼, 문학 평론가에게 본질은 가장 중요합니다.

 

 

남자 지식인들이 여자 과학자 마가렛 캐번디시를 몰아내는 것처럼, 너무 위대하고 훌륭한 듀나님은 여자 과학자 마가렛 캐번디시를 몰아냅니다. 배후보다 본질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위대하고 훌륭한 알프레드 마샬과 존 베이츠 클라크와 듀나님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배후'를 묻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류 역사 종착역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어리석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떠받듭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 고정 관념을 경계해야 할 겁니다. SF 평론가는 "어떻게 SF 장르가 나타나는가?"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우리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를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허구, 창작물에는 자치 성향이 있습니다. 코뮨 도시가 자치 성향을 추구하는 것처럼, SF, 허구, 창작물에는 자치 성향이 있습니다. SF 장르에서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은 존재합니다.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생체 우주선이 지구 자연 환경을 반영하는가?" 이렇게 SF 독자들이 묻는다고 해도, 분명히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SF 평론가가 "아하,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은 존재해. 이건 전부야. 이건 모든 것이야. 이건 장땡이야."라고 말해야 하나요? 이게 장땡인가요?

 

 

1)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위해 생체 우주선은 항해한다.

 

2) 왜걔 향서윽 타랑보민하기 위향 샹차 우주상은 황해안다.

 

 

1번 문장과 2번 문장은 모두 똑같은 내용을 서술합니다. 1번 문장과 2번 문장은 모두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하기 위해 생체 우주선은 항해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독자가 2번 문장을 읽는 순간, 독자는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입을 딱 벌리거나, 피식 웃거나, 혀를 찰지 모릅니다. 심지어 독자는 2번을 해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가 1번과 2번을 비교하지 못한다면, 독자는 2번을 절대 해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독자가 2번을 해석하지 못함에도, 1번과 2번에서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이 존재할 수 있나요? 분명히 허구에는 자치 성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자치 성향만 전부인가요? 이게 장땡인가요?

 

허구에 자치 성향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소설이 뭔가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소설과 현실 사이에서 평론가는 연결 고리를 찾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남자 자지가 정복하기 위해 여자 보지는 존재한다. 남자는 자지로 여자 보지를 쑤시고 여자를 정복한다."라고 서술한다고 해도, 독자는 가부장적인 편견을 운운해서는 안 됩니다. 허구에게 자치 성향이 있기 때문에, 소설 속의 세계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가 되고, 또 다른 세계에는 가부장적인 편견이 존재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또 다른 세계에서 남자 자지가 정복하기 위해 여자 보지는 존재합니다. 평론가는 "그래요, 믿슙니다~!!!"를 외쳐야 합니다.

 

 

비디오 게임 <서든 어택 2> 예고편에서 여자 주연 등장인물 미야는 아주 짧은 상의와 하의를 입습니다. 24살 처자 미야는 이른바 신사적인 복장을 입습니다. 하지만 미야가 아주 짧은 반바지를 입고 둔부를 율동적으로 흔든다고 해도, 미야는 캐릭터, 가상의 인물입니다. 그 자체로서 미야는 또 다른 세계가 되고, 그래서 평론가는 가부장적인 편견을 운운해서는 안 됩니다. 평론가는 또 다른 세계를 존중해야 합니다. 허구에 자치 성향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세계로서 <서든 어택 2> 예고편에는 가부장적인 편견이 없을지 모릅니다. 오직 현실에만 가부장적인 편견이 있습니다. 평론가는 이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평론가가 그 자체로서 둔부를 율동적으로 흔드는 미야를 존중해야 하는 것처럼,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에서 백인 남자처럼 너구리 외계인이 떠든다고 해도, SF 평론가는 너구리 외계인이 백인 남자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건 너무 쉬운 해석입니다. '무엇에 대한 비판, 무엇에 대한 상징.' 이런 것들은 보기보다 지겹습니다. 이런 해석은 어느 정도 타당하나,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허구에는 자치 성향이 있습니다. 만약 평론가들이 어떤 SF 소설을 읽는다면, 현실과 SF 소설 사이에서 그들은 접점을 찾을 겁니다. 그리고 평론가들은 SF 속의 구체적인 요소를 그들이 아는 현실에 대한 비유로 읽을 겁니다.

 

평론가들이 비유를 들이대는 순간, 비유와 상징은 SF 소설을 구속합니다. 접점은 중요합니다. 만약 접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감 그 자체는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접점이 존재한다고 해도, 모든 허구가 현실을 반영하나요? 만약 이게 중요하다면, 왜 독자가 SF 소설을 읽나요? 이미 현실에 모든 것이 존재함에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보는 것 이외에 관심이 없나요? 당연한 이야기 하나. SF 장르에서 '그 자체로서' 세계는 존재합니다. 평론가는, 특히, 자신을 SF 칼럼니스트라고 자청하는 작자께서는 스페이스 오페라 너구리 외계인에게 백인 남자를 절대 대입해서는 안 될 겁니다. 너구리 외계인에게 어설픈 정치적 올바름을 들이대지 마세요. 허구에 자치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SF 독자가 '샹차 우주상'을 읽고 피식 웃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이 존재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SF 독자는 특정한 형식(남한 표준어)을 이용하고 생체 우주선을 읽습니다. SF 독자는 특정한 형식을 반드시 이용해야 합니다. 형식과 내용은 함께 존재합니다. 허구에 자치성이 있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독자는 허구를 읽고, 현실에서 허구는 비롯합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는 하드 SF 소설을 펼치고,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허구에는 자치성이 있고, 허구는 뭔가를 넘어서고 그 이상이 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서 허구는 비롯하고, 현실 속에서 독자는 허구를 읽습니다. '샹차 우주상'처럼, 현실에서 또 다른 세계, 자치 성향은 비롯합니다.

 

 

한 번 물어볼까요? SF 소설 외부에서 글자가 존재하나요, 아니면 SF 소설 내부에서 글자가 존재하나요? 만약 SF 소설 내부에서 글자가 존재하고, SF 소설이 2545년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한다면, 독자가 SF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가 미래 글자를 읽나요? 만약 SF 소설 내부에서 글자가 존재한다면, 독자가 소설 <오벨리스크의 문>을 읽는 동안, 독자가 21세기 초반 미국 영어보다 가상의 제국 언어를 읽나요? 글자 없이, 노라 제미신은 오로진 에쑨을 절대 쓰지 못하고, 킴 스탠리 로빈슨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절대 쓰지 못합니다. 글자 없이, SF 작가는 SF 소설을 절대 쓰지 못합니다. SF 소설에게 글자는 필수적입니다. 현실과 SF 소설 사이에는 오직 단순한 접점, 공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글자 없이, SF 소설은 절대 나타나지 못합니다. 어떻게 글자가 나타납니까? 하늘에서 글자가 뚝 떨어지나요? 모든 사람이 글자를 공평하게 배우나요? "어린이 여러분, 노동자는 나쁜 단어입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근로자라는 단어를 말하세요." 이렇게 학교 선생님이 가르친다고 해도, 이게 공평한가요? 월경이 그 날이 되고 생리가 됨에도, 모든 사람이 글자를 공평하게 배우나요? 자랑스러운 독재 국가 헬조선에서 여고생, 여대생은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왜 남고생, 남대생이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하고, 왜 여고생, 여대생이 너무 엄청난 인기를 끄나요?



왜 '킴 스탠리 로빈슨 남사님'이 존재하지 않고, 왜 오직 '어슐라 르 귄 여사님'만 존재하나요? 왜 여자가 선생님보다 여사님이 되나요? 왜 어슐라 르 귄이 선생님보다 여사님이 되어야 하나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언어, 글자를 이용합니다. 그리고 언어, 글자는 SF 소설을 만듭니다. 현실, 언어, SF 사이에는 이런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평론가가 이것을 끊을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만약 언어가 절대 평등하지 않다면, SF 작가가 절대 평등하지 않은 언어로 SF 소설을 쓰고, SF 독자가 절대 평등하지 않은 언어로 SF 소설을 읽음에도, 여기에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만약 언어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왜 소설 <어둠의 왼손>에서 남자 대명사가 문제가 되었나요? 그 자체로서 겨울 행성이 존재함에도, 왜 독자들이 남자 대명사를 비판했나요? 만약 언어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왜 소설 <사소한 정의>가 여자 대명사들을 늘어놓고, 심지어 욕설조차 자지(좆)보다 젖가슴인가요? "아놔, 씨발, 수구 꼴통 정치인들은 너무 좆 같아."와 "아놔, 씨발, 수구 꼴통 정치인들은 너무 젖탱이 같아."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나요? 이건 훨씬 심각한 문제를 유발합니다. 독자가 2545년 언어를 절대 읽지 못함에도, 어떻게 하드 SF 소설에서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이 존재하나요?



독자가 2545년 언어를 절대 읽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2545년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독자는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세계에 완전히 빠지지 못할지 모릅니다. 독자는 2545년 생체 우주선이 어느 정도 상징, 비유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가 2545년 생체 우주선이 어느 정도 상징, 비유라고 느낀다면, 듀나님(이 쓴 <설국 열차> 평론)은 독자를 나무랄 겁니다. 비유, 상징이 '소설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변 소설 선언문>에서 반다나 싱은 비유, 상징이 중요하다고 말했으나,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아, 그렇습니다. 반다나 싱은 틀렸습니다.


비유, 상징이 SF 소설을 구속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비유, 상징보다 '소설의 핵심'입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에게 진짜 목표가 소설의 핵심을 찾는 것이라면, '소설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아니, 도대체 그 빌어처먹을 '소설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소설의 핵심'이 모든 소설을 관통하나요? 누가 소설의 핵심을 결정하나요? 위대하고 훌륭한 알프레드 마샬? 위대하고 훌륭한 존 베이츠 클라크? 위대하고 훌륭한 듀나님? 만약 보수 우파 지식인이 문학 평론과 자유를 운운한다면, 문학 평론가가 이것을 넙죽 받아들여야 하나요? 문학 평론가가 본질, 윤리, 도덕, 자유, 핵심을 떠들어야 하나요?



SF 장르에게 '서구 근대화+비일상적인 상상력'은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우주 항해, 외계 열대 밀림, 기이한 거대 호랑이는 '서구 근대화+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영화 <아바타>는 경이로운 외계 자연 환경을 보여줍니다. 많은 관객들은 판도라 열대 밀림이 경이롭다고 말할 겁니다. 왜 판도라 위성, 외계 열대 밀림이 경이가 되나요? 그 자체로서 외계 자연 환경이 경이로운가요, 아니면 외계 자연 환경을 표현하기 위한 비싼 시각 효과가 경이로운가요? 만약 그 자체로서 외계 자연 환경이 경이롭다면, 비록 6살짜리 아이가 외계 자연 환경을 그린다고 해도, 외계 자연 환경이 경이가 되나요? 비록 단출한 픽셀 그래픽이 외계 자연 환경을 그린다고 해도, 이게 경이가 되나요?


SF 소설은 경이로운 문학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 사이언스 픽션이 경이로운가요? 소설 독자에게 사이언스 픽션이 경이로운가요, 아니면 소설 등장인물에게 사이언스 픽션이 경이로운가요? 만약 중세 스코틀랜드 사람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소설을 읽는다면, 중세 스코틀랜드 사람이 "우왕, 하드 SF 소설은 경이로워!"라고 느낄 수 있을까요? 잠깐, 중세 사람이 하드 SF 소설을 읽을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비록 중세 사람이 시간 여행 장치에 탑승하고 21세기에 나타난다고 해도, 중세 사람은 하드 SF 소설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중세 스코틀랜드 사람은 생체 우주선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왜 21세기 초반 스코틀랜드 독자가 알 수 있나요?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생체 우주선이 지구 자연 환경을 반영하는가? 그 자체로서 허구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허구가 뭔가를 반영하는가? 그 자체로서 허구가 여왕인가, 아니면 허구가 여왕을 모시기 위한 시녀인가?" 이런 물음에서 SF 독자들은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이 존재하고, 그 자체로서 허구가 존재하고, 그 자체로서 허구가 여왕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장땡이 아닙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SF 독자들은 생체 우주선을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인류 역사에서 어떤 과정과 흐름과 사건 이후, SF 독자들은 생체 우주선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히 어떤 과정과 흐름과 사건 이후, 소설 독자들은 자신들이 SF 독자라고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과정과 흐름과 사건 이전에, 문학 작가들은 생체 우주선을 쓰지 못했으나, 어떤 과정과 흐름과 사건 이후, 문학 작가들은 생체 우주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무슨 과정과 흐름과 사건인가요? SF 평론가는 물을 수 있습니다. 이 게시글, 그리고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에서 이런 물음은 '핵심'입니다. 그 자체로서 생체 우주선이 여왕이라고 해도, 고대 인류에게 봉건 제도 여왕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어떤 과정과 흐름과 사건 이후, 생체 우주선은 나타났습니다.

 

 

※ 그림 <Bio Dome> 출처: Lei Jin,

https://www.artstation.com/artwork/Elb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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