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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사랑방 어머니>와 젤리 가오리와 서구 근대화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사랑방 어머니>와 젤리 가오리와 서구 근대화

OneTiger 2019. 12. 30. 20:24

[신비로운 젤리 가오리는 외계 생명체입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인 요소를 이야기하나요?]



"옥희 엄마는 사랑방 손님에게 고백했어야 했어. 옥희는 사랑방 손님을 좋아했고, 사랑방 손님 역시 옥희 엄마를 사모했어. 만약 옥희 엄마와 사랑방 손님이 결혼했다고 해도, 옥희는 반대하지 않았을 거야. 옥희는 결혼에 찬성했을 거야. 사랑방 손님 역시 자신이 옥희 엄마를 좋아한다고 내비쳤어. 나는 사랑방 손님이 자신의 본심을 내비쳤다고 생각해. 하지만 옥희 엄마는 고백하지 않았어. 옥희 엄마는 이게 불륜, 유혹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옥희 엄마는 자유분방한 연애가 잘못이라고 생각했어. 사회적인 시선이 과부, 엄마, 여자를 억압했기 때문이야. 사회가 연애를 억압했기 때문이야."


만약 이렇게 어떤 독자가 이야기한다면, 이게 소설 평론, 감상이 될 수 있나요? 네, 이건 소설 평론이 될 수 있습니다. 독자는 단편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읽고 옥희 엄마를 평가합니다. 독자는 옥희 엄마가 사랑방 손님에게 고백했어야 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옥희 엄마는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옥희 엄마가 사회적인 시선과 관념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과부, 엄마, 여자가 정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입했고, 옥희 엄마는 자유분방한 연애가 나쁜 것, 위험한 것, 불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자는 지배적인 관념이 자유분방한 연애를 억압한다고 비판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는 자유분방한 연애를 억압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연애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결혼을 꿈꾸지 못합니다. 연애하고 결혼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른바 스펙을 쌓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결혼보다 스펙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연인을 축복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연인이 어리석다고 저주할 겁니다. 동성애인들 역시 난관에 부딪혀야 합니다. 사람들은 동성 연인을 축복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연애, 사랑, 결혼이 아름답다고 말하나, 이런 사고 방식은 그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결혼식장들에는 예쁘고 아름답고 화기애애한 신부/신랑 사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진들은 이성애 결혼 사진들입니다. 결혼식장들이 동성애 결혼 사진들을 전시하나요? 동성 연인이 차별 금지법 같은 논란에 부딪힌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편들 겁니다. 이혼 역시 난관에 부딪혀야 합니다. 만약 여자가 이혼한다면, 수구 꼴통 아재들은 혀를 찰 겁니다. "어이구, 세상에. 이런 저출산 시대에서 왜 여자가 이혼해?" 수구 꼴통 아재들 사이에서 이런 사고 방식은 드물지 않습니다. 수구 꼴통들은 여자-결혼-출산-양육을 연결합니다. 인간으로서 여자는 연애하지 못하고 이혼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관념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옥희 엄마는 사회가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연인과 동성 연인과 이혼한 여자가 난관에 부딪힌다고 해도, 사람들은 사회 구조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남한 사회를 보세요. 남한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 잉여 노동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는 경제 공황을 일으킵니다.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수탈합니다.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킵니다. 자본주의는 문학이 인간의 본질을 떠들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남한 교육 과정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하나요?


경제학 교과서, 역사 교과서, 지리 교과서, 생물학 교과서, 지구 과학 교과서, 사회 교과서, 문학 교과서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아니, 학교 교과서들은 비판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을 착취하고, 경제 공황과 세계 대전과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문학을 옥죄고, 식민지를 수탈함에도, 경제학 교과서, 역사 교과서, 지리 교과서, 생물학 교과서, 지구 과학 교과서, 사회 교과서, 문학 교과서는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제도권 교육은 자본주의 노예 양산 과정입니다. 그래서 남한 시민들은 자본주의가 우월하다고 떠받듭니다. 자칭 진보 성향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홍콩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내 진보들은 진짜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중국이 후천적이고 파생적인 제국주의임에도, 오히려 국내 민주적인 진보들은 오직 파생적인 폭력만 비난하고, 진짜 제국주의를 열심히 숭배하고, 제국주의 앞잡이가 됩니다. 하지만 남한 진보들이 제국주의 앞잡이가 된다고 해도, 이건 남한 진보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떻게 지배적인 관념에서 개인이 쉽게 벗어날 수 있나요? 이른바 제도권 교육이 사람들을 세뇌함에도, 어떻게 사람들이 모순을 쉽게 깨달을 수 있나요? 어떤 시민들은 모순을 '우연히' 깨달으나,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홀로세 대멸종을 부추긴다고 해도, 피지배 계급은 모순을 당장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느리게 바뀝니다.


애석하게도 세상은 너무 느리게 바뀝니다. 세상이 너무 느리게 바뀐다고 해도, 이건 피지배 계급의 잘못이 아닙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진짜 문제이기 때문에, 옥희 엄마는 자유분방한 연애가 불온하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은 억압이 당연하다고 느낍니다. 개인보다 사회는 거대하고,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지배적인 관념은 인간을 세뇌합니다. 우리는 억압이 옳다고 배웁니다. 광신도가 사이비 교주를 떠받드는 것처럼, 사회 구성원들은 불평등하고 지배적인 관념을 떠받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옥희 엄마가 편견에 굴복했다고 비판할지 모르나, 옥희 엄마가 고백하지 못했다고 해도, 이건 옥희 엄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옥희 엄마는 개인입니다.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불평등한 사회 구조 때문에, 지배적인 관념 때문에, 자유분방한 연애는 쉽지 않습니다. 옥희 엄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읽고 어떻게 지배적인 관념이 자유분방한 연애를 가로막는지 비판합니다. 이건 소설 평론입니다. 만약 독자가 소설을 읽고, 등장인물 심리를 논의하고,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고, 사회 문제를 지적한다면, 이건 소설 평론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런 것이 평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 영화,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뭔가를 빠뜨렸습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옥희 엄마가 소설 등장인물이라고 말하지 않고 소설 형식과 매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종종 독자들이 소설들을 평가할 때, 독자들은 소설 형식들을 간과하고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현실 속의 인간이라고 간주합니다. 독자들은 오직 내용만 언급합니다. 하지만 어떤 초월적인 공간 속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게는 물리적인 실체가 있습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게 형식과 매체는 단편 소설입니다.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시각적인 동물임에도, 글자 매체 소설은 시각적이지 않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두 눈을 떴다." 이 문구는 이웃집 영희가 뭔가를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뭔가를 깨달을 때, 우리는 인간이 두 눈을 떴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시각적인 것을 중시합니다. 인간이 시각적인 것을 중시함에도, 글자 매체 소설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옥희가 "우리 엄마는 정말 천사 같지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독자는 옥희 엄마를 시각적으로 확인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에서 독자는 옥희 엄마를 그려야 합니다. 만약 독자가 만화를 본다면, 독자는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상황들에서 이런 비가시적인 한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독자는 일상 속의 사람들을 옥희 엄마에게 대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대입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글자 매체로서 소설에게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1인칭 화자 시점입니다. 옥희는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옥희 엄마와 사랑방 손님은 심리를 직접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두 연인(?) 사이에서 순진한 아이로서 옥희는 사건을 서술합니다. 순진한 화자 덕분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사회적인 터부, 불륜을 순진하게 서술할 수 있습니다. 소설 주제가 터부를 건드린다고 해도, 1인칭 화자가 순진하기 때문에,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불온한 느낌을 풍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는 귀엽고 깜찍한 느낌이 있습니다. 시점은 사건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영화라면, 이런 느낌은 줄어들 겁니다.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역시 귀엽고 깜찍한 느낌을 풍기고, 심지어 사람들은 옥희 성대 묘사를 즐깁니다. "아저씨, 우리 엄마랑 연애 좀 하지 않으려우? 고작 지배적인 관념 따위는 문제가 아니우." 이렇게 사람들은 성대 묘사를 어설프거나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시점은 옥희 심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옥희 외부에서 영화 시점은 옥희를 바라봅니다. 심리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가시적인 영화 시점은 추상적인 심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 소설 시점은 옥희 심리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글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소설 시점은 추상적인 심리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글자들은 비단 심리만 아니라 사상, 연대기, 이론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그림체를 중시하거나, 배우 연기를 중시하거나, 사건 개입을 중시한다면, 독자는 만화나 영화나 게임을 선택하겠으나, 만약 독자가 심리, 사상, 연대기, 이론을 중시한다면, 독자는 만화, 영화, 게임보다 소설을 선택할 겁니다. 이렇게 여러 형식들과 매체들에는 여러 장점들이 있습니다. 만약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게임이라면, 연애 게임들에 여러 선택지들이 있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연애 노선을 선택할 수 있을 겁니다.



비록 게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도 결말이 슬픈 이별이라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연애 노선을 선택하고 두 연인(?)의 데이트에 개입할 수 있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속의 사건에 개입할 수 있고, 게임에게 이건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게임은 일방향이 아닙니다. 심지어 <디어 에스더 Dear Esther> 같은 워킹 시뮬레이션 게임에서조차 게임 플레이어는 사건에 개입해야 합니다. 소설, 만화, 영화와 게임은 다릅니다. 소설, 만화, 영화는 일방향이나, 게임은 훨씬 쌍방향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소설, 만화,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사람들은 게임이 낯설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가 비단 소설 주제만 아니라 형식과 매체를 함께 언급한다면, 이건 훨씬 근본적인 평론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창작물에게 소설, 만화, 영화, 게임, 글자, 그림, 음악, 규칙 같은 형식들과 매체들이 있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형식과 매체를 간과하고 오직 내용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시각적인 영화 시점이 추상적인 심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추상적인 소설 시점이 시각적인 외모를 직접 묘사하지 못하는 것처럼, 형식과 매체는 내용과 주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다릅니다. 평론은 형식과 매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독자가 내용과 주제, 형식과 매체를 논의한다면, 이건 괜찮은 평론이 될 겁니다. 문학 강사는 이런 평론에 나쁜 점수를 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평론들은 비단 내용과 주제, 형식과 매체만 아니라 다른 뭔가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어떤 평론들은 '장르'를 분류해야 합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이른바 주류 문학에 속하고, 그래서 독자는 장르를 구태여 분류하지 않습니다. 주류는 지배적/보편적이고, 그래서 주류를 이야기하기 위해 독자는 장르를 분류하지 않습니다. 장르는 비주류, 비지배적입니다. 장르는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장르 소설을 이야기하기 위해 독자는 장르를 분류해야 합니다.


장르 소설들 중에는 SF, 사이언스 픽션이 있습니다. 제프리 랜디스가 쓴 <태양 아래 걷다>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낸시 크레스가 쓴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 역시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태양 아래 걷다>는 외계 위성 생존자를 이야기하고,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외계인 차별을 이야기합니다. 외계 위성 생존자, 외계인 차별은 비일상적입니다. 인간은 지구 생명체이고, 고향별 지구에서 벗어나기는 절대 쉽지 않습니다. 지구인들은 외계인들을 (공식적으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옥희 엄마 같은 사람들은 일상적이나, 외계 위성과 파란 외계인은 비일상적입니다. SF 소설은 비일상을 이야기합니다.



<태양 아래 걷다>는 1인칭 시점을 이용하고 어떻게 외계 위성에서 생존자가 고독을 느끼는지 표현합니다. 독자는 1인칭 시점(형식)과 고독한 외계 생존자(주제)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만화, 영화, 게임 역시 SF 매체가 됩니다. <서브노티카> 역시 외계 행성 생존자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태양 아래 걷다>와 달리, <서브노티카>는 풍성한 해양 생물 다양성을 묘사합니다. 해양 생물 다양성이 화려하기 때문에, 이 게임에서 고독보다 풍요로움은 훨씬 극적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어떻게 게임 그래픽, 그림체, 규칙이 화려한 외계 해양 생물 다양성을 표현하는지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와 게임 플레이어가 내용(고독, 풍요로움)과 형식(1인칭 시점, 게임 그림체)을 이야기하기 전에, 독자와 게임 플레이어는 장르를 분류해야 합니다. 왜 <태양 아래 걷다>가 외계 위성 생존자를 제시하나요? 외계 위성 생존자 없이, 소설은 고독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가 외계인 차별을 이야기하나요? 외계인 없이, 소설은 차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미 현실 속에서 동성 연인들은 외계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 <서브노티카>가 외계 해양 생태계를 보여주나요? 외계 해양 생태계 없이, 비디오 게임은 풍요로움을 예찬할 수 있습니다. 지구 바다는 풍성합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외계 위성 생존자, 외계인 차별, 외계 해양 생태계를 보여주나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달리, 왜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인 것을 묘사하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니, 잠깐.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에는 외계인이 있습니다. <서브노티카>에는 외계 동물이 있습니다. 반면, <태양 아래 걷다>에서 외계인, 외계 동물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태양 아래 걷다>에서 비인간 존재(외계 문명, 외계 자연)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태양 아래 걷다>와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와 <서브노티카>는 모두 사이언스 픽션이나, <태양 아래 걷다>는 다릅니다.


<태양 아래 걷다>에서 외계 생물 다양성, 외계 문명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음에도, <태양 아래 걷다>와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와 <서브노티카>가 모두 똑같은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코니 윌리스가 쓴 <클리어리 가에서 온 편지>는 어떤가요? 이 소설에서 주된 배경은 외계 행성이 아닙니다. 주된 배경이 외계 행성이 아님에도,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와 <서브노티카>와 <클리어리 가에서 온 편지>가 똑같이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아니,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주류 문학과 SF 소설이 다른가요?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가 주류 문학인가요, 아니면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만약 <멋진 신세계>가 사이언스 픽션이라면, 왜 주류 문학 평론가들이 <멋진 신세계>를 열심히 떠드나요? <멋진 신세계>와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와 <서브노티카>가 완전히 다른가요? 아니면 세 창작물들 사이에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나요? <서브노티카>에는 외계 해양 생태계가 있습니다. 외계 해양 생태계는 너무, 너무 비일상적입니다. 외계 해양 생태계가 너무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 우주 탐사물이 부담스럽거나 이상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주류 문학 평론가들은 SF 소설이 유치하다고 단정하고 SF 소설과 고전 세계 문학 사이에서 선을 긋습니다.


만약 어떤 SF 소설이 이른바 문학적인 향취를 풍긴다면, 주류 문학 평론가들은 "이 소설은 흔한 SF와 다르다."고 운운할 겁니다. 아, 흔한 SF? 흔한 SF가 무엇인가요? 유치한 우주 탐사물이 흔한 SF인가요?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은 많은 오해들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에 비일상적인 것, 외계 생물 다양성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가 내용과 주제와 형식과 매체를 언급하기 전에, 게임 플레이어는 왜 <서브노티카>가 이런 비일상적인 것을 묘사하는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SF 장르를 분류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SF 장르가 무엇인지 분류해야 합니다.



"이 소설은 얼마나 주인공이 고독한지 강조해. 배경 무대가 외계 위성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해. 가부장적인 사회 속의 동성애인처럼, 주인공은 너무 외로워. 주인공은 독백하고, 글자 매체는 추상적인 독백을 효과적으로 연출하지. 주인공은 지구인이나, 고향별에서 주인공은 단절되었어. 이건 고독을 극대화하지. 만약 외계 위성이 배경 무대가 아니었다면, 소설은 고독을 극대화하지 못했을 거야. 게다가 외계 위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과학 기술들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해. 이 소설은 진보가 무엇인지 강조해. 동시에 인간이 기계에 전적으로 매달리기 때문에, 외로움은 훨씬 짙어지지."


이건 전형적인 SF 평론입니다. 이 평론에는 내용과 형식과 장르가 있습니다. 이 평론은 소설 주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글자 매체가 고독한 외계 생존자를 효과적으로 연출하고, 왜 사이언스 픽션과 주류 문학이 다른지 설명합니다. 이런 내용, 형식, 장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요? SF 평론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요? 대답은 장르일 겁니다. 소설 주제가 무엇이든, 어떻게 형식이 주제를 연출하든, 'SF' 평론은 "왜 SF가 SF인가?"라고 물어야 할 겁니다. SF 평론에서 장르 분류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이건 SF 평론이 내용과 형식을 반드시 무시해야 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계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인간은 과학 기술들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건 진보를 강조할 겁니다.]



"종종 해양 생물학자들은 해양 생명체들이 외계 생명체 같다고 말하지. 해양 생명체들이 이질적이고 신비롭기 때문이야.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진짜 외계 해양 생명체를 이야기해. 외계 해양 생태계는 얼마나 지구 생물 다양성이 신비한지 강조할 수 있어. 주류 문학은 강조하지 못해. 주류 문학이 강조한다고 해도, 주류 문학에는 한계가 있어. 특히, 화려하고 신비로운 생명체는 시각적이야. 현란한 갯민숭달팽이가 시각을 자극하는 것처럼, 비디오 매체는 섬세한 그래픽을 이용하고 화려한 해양 생태계를 연출할 수 있어. 바다는 깊고 드넓어. 오픈 월드 형식은 깊고 드넓은 바다를 누빌 수 있지."


이런 SF 평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평론에서 내용과 형식은 중요하나, 만약 이런 평론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오직 해양 생태계, 섬세한 그래픽, 오픈 월드만 강조한다면, 이게 SF 평론이 될까요? 외계 생명체들 없이, 오픈 월드 게임은 섬세한 그래픽을 이용하고 화려한 해양 생태계를 얼마든지 연출합니다. 그래서 'SF' 평론은 왜 소설, 만화, 영화, 게임이 비일상적인 것을 말하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문제는 오직 사이언스 픽션만 비일상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사이언스 픽션에 여러 유형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드래곤과 흡혈귀처럼, 판타지와 공포는 비일상적인 것을 이야기합니다. 사실주의적인 우주복과 환상적인 젤리 가오리처럼, 비일상적인 것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습니다.



"환경 운동가들은 지구가 생체 우주선이라고 말해. 환경 운동가들은 '우리를 비롯해 생물 다양성은 지구라는 한 배를 탔다'고 표현하지. 이건 비유야. 만약 인간들을 비롯해 생물 다양성이 정말 배를 탄다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비유가 아니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정말 생체 우주선이야.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이 폐쇄 인공 생태계이기 때문에, 우주선 사람들은 내부 생태계를 정말 세심하게 관리해야 해. 하지만 생태계 순환은 비가시적이야. 이건 추상적이지.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인 생태계 순환을 깊게 묘사할 수 있어. SF 소설은 생체 우주선을 강조하고 지구를 사변할 수 있어."


이 평론은 사이언스 픽션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이용하고 비유(지구는 생체 우주선이다)를 설정으로 전환한다고 설명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작은 지구, 꼬마 지구가 되고, SF 독자는 생체 우주선으로서 지구 환경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생태학에 기반하고, 캐롤린 머천트가 지적한 것처럼, 생태학은 '서구 근대적인 학문'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서구 근대화에 상상력을 덧붙입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판타지, 공포와 다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드래곤, 흡혈귀와 다릅니다. 드래곤, 흡혈귀는 전설에 기반하나, 생체 우주선은 서구 근대화(생태학)에 기반합니다.



"사람들은 환경 오염이 지구를 죽인다고 말해. 만약 정말 지구에게 지성이 있고, 지구 지성이 산업 자본주의를 거부한다면? 만약 행성에게 지성이 있다면, 이건 정말 추상적일 거야. 행성에게 입이 없기 때문에,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행성은 텔레파시를 이용해야 해.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추상적인 텔레파시를 깊게 묘사할 수 있어.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은 행성 지성을 깊게 묘사하고 얼마나 산업 자본주의가 심각한 문제인지 강조할 수 있어. 기후 변화는 행성급 환경 오염이고, 산업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소설은 등장인물로서 행성을 제시해야 해. 사이언스 픽션은 산업 자본주의를 가장 거시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


이 평론에서 행성급 환경 오염(주제), 추상적인 글자 매체(형식), 어머니 지구(장르)는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어머니 지구는 비일상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어머니 지구가 SF 설정인가요? 캐롤린 머천트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전체론 철학이 유기체 지구를 상정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서구 근대화 이전에 전체론 철학은 유기체 지구가 산업 자본주의를 거부한다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서구 근대화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머니 지구가 산업 자본주의를 거부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완전한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과 이런 이야기 사이에는 아주 근본적이고 커다란 공통점이 있을 겁니다.



분명히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SF 설정입니다. 고대 사람들이 유기체 동물로서 자연을 상정했기 때문에,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달리, 어머니 지구는 SF 설정이 아닌지 모릅니다. 가이아 이론에서 '가이아'는 고대 여신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고대 신화에서 가이아는 산업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머니 지구가 산업 자본주의를 거부한다면, 이런 이야기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산업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어머니 지구 사이에는 아주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을 겁니다. 양쪽에게 서구 근대화(생태학, 자본주의, 기후 변화)는 똑같이 생산 조건입니다.


그래서 SF 평론은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비록 SF 평론이 사이언스 픽션을 완벽하게 규정하지 못한다고 해도, 만약 SF 평론이 서구 근대화를 주시한다면, 적어도 SF 평론은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을 겁니다. 서구 근대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SF 평론은 어떻게 서구 근대화가 나타났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산업 자본주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서구 근대화가 나타났나요? 만약 SF 평론이 이것을 묻지 않는다면, SF 평론은 서구 근대화를 이해하지 못할 테고, 만약 SF 평론이 서구 근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SF 평론은 사이언스 픽션을 헤아리지 못할 겁니다.



종종 SF 평론가느님들은 사이언스 픽션에 이렇게 저렇게 철학 용어들을 덧붙이시고 별별 있어보이는 소리들을 떠드십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있어보이는 소리들이 있어보이는 척한다고 해도, 이런 있어보이는 SF 평론가느님들은 어떻게 서구 근대화가 나타났는지 캐묻지 않으십니다. 이런 있어보이는 SF 평론가느님들이 정말 'SF'를 이야기하실 수 있을까요? 이런 SF 평론은 'SF' 평론이 아닐 겁니다. 만약 'SF' 평론이 서구 근대화를 간과한다면, 생태학 SF 덕후들은 덕질을 때려치우고 녹색 빨갱이 짓거리에 몰두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생태학 SF 장르는 문자 그대로 생태학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생태학에게 가장 심각한 화제는 기후 변화입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킵니다. 자본주의는 서구 근대화에 속합니다. 생태학 SF, 산업 자본주의, 서구 근대화, 기후 변화는 복잡하게 뒤얽힙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있어보이는 SF 평론가느님들이 서구 근대화를 간과하시고 고작 'SF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경이', '우주적이고 전복적인 상상력' 따위를 지껄여주신다면, 이건 정말 천재적인 꼴불견이 아닐 수 없을 겁니다. 있어보이는 SF 평론가느님들과 달리, 적어도 생태 사회주의는 서구 근대화를 간과하는 멍청한 짓거리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있어보이는 SF 평론보다 생태 사회주의는 훨씬 낫습니다.



다행히 SF 울타리에는 오직 있어보이는 SF 평론들만 있지 않습니다.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처럼, 초기 생태학 SF와 초기 생태 사회주의는 겹칩니다. 이런 전통(?) 덕분에, 생태학 SF 덕후들은 덕질을 때려치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덕후들은 볼셰비키 빨갱이들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모릅니다.)



※ 게임 <서브노티카> 스크린샷 출처: Llamma,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l=koreana&id=90452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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