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잔망스러운 소녀 역시 상상력이다 본문
뒷담화 호박씨부터 신문 속의 정치 기사까지, 일상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누군가를 평가합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좋다거나 누군가가 나쁘다거나 누군가가 멋지다거나 누군가가 탐욕스럽다고 평가하기 원합니다. 우리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이런 대화 없이, 우리는 살아가지 못할 겁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다른 사회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의식해야 합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특별한 문화를 만듭니다. 여기에서 소설 역시 벗어나지 않습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과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습니다. 독서 모임에서 독자들은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을 평가합니다. 가끔 이런 독서 모임들은 뒷담화 호박씨와 비슷합니다. 독자들은 등장인물들을 이용하고 열심히 호박씨를 깝니다. 등장인물들이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이러쿵 저러쿵 독자들은 호박씨를 깝니다. 사실 어떤 관점에서 등장인물들은 정말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등장인물은 진짜가 아니나,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에게 다른 등장인물들은 진짜일 겁니다.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정말 사회적인 관계들을 맺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뒷담화 호박씨와 소설 평론은 다릅니다.
등장인물들을 보여주기 위해 소설은 여러 방법들을 이용합니다. 소설은 오직 특정한 등장인물들만 주로 보여주거나, 갑자기 어떤 등장인물을 감추거나, 오직 특정한 시점으로만 다른 등장인물들을 바라봅니다. 이런 방법들 때문에, 독자는 그 자체로서 등장인물을 만나지 못합니다. 언제나 독자는 이런 방법들을 이용하고 등장인물들을 만나야 합니다. 심지어 독자가 소설책 첫머리를 읽기 전까지, 등장인물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소설에 나오기 전까지 등장인물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소설이 등장인물의 일대기를 다룬다고 해도, 소설은 어떤 부분들을 빠뜨릴 테고, 독자는 그 부분들을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스티븐 디달러스의 인생을 그립니다. 하지만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스티븐의 어린 시절을 그린다고 해도, 독자는 스티븐의 어린 시절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스티븐의 아침 메뉴를 줄줄이 읊지 못합니다. 어느 날, 꼬마 스티븐은 딱딱하고 시큼한 빵과 감자와 버터 밀크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걸 알지 못합니다. 소설이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중년 스티븐과 장년 스티븐과 노년 스티븐을 알지 못합니다. 소설이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자가 소설을 모두 읽는 순간, 더 이상 스티븐 디덜러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슨 국가에서 장년 스티븐이 살아갈지 독자는 알지 못합니다. 만약 분명히 스티븐이 계속 살아간다면, 어딘가에서 장년 스티븐은 머물 겁니다. 아니면 장년 스티븐은 떠돌이 생활을 버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독자는 알지 못합니다. 오직 소설 속에서만 스티븐 디달러스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장년 스티븐이 떠돌이 생활을 유지할 거라고 추측할 수 있고, 분명히 이런 추측에는 근거가 있으나, 독자는 100% 확신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아무리 독자가 스티븐을 만나고 싶다고 해도, 독자는 스티븐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소설은 특정한 방법들을 이용하고 등장인물들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진짜 등장인물과 소설이 보여주는 등장인물은 크게 다를지 모릅니다. 소설은 등장인물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이후, 소설 작가들은 어떻게 소설이 등장인물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현실 속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소설 역시 등장인물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소설이 등장인물을 완벽하게 파악한다면, 많은 작가들은 소설이 너무 전지적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작가가 소설 설정을 만든다고 해도, 작가는 신이 아닙니다. 작가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뒷담화 호박씨와 소설 읽기는 다릅니다. 사람들이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가 몰래 사귀는 것 같다고 수군거리는 동안, 사람들은 문학적인 장치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는 문학적인 장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소설이 등장인물들을 보여주는 동안, 등장인물을 보여주기 위해 독자는 소설이 무슨 방법을 이용하는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황순원이 쓴 <소나기>에서 주연 등장인물은 소년과 소녀입니다. 하지만 단편 소설 <소나기>는 오직 소년의 시점만 강조합니다. <소나기>는 소녀의 시점을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후반부에서 <소나기>는 소녀를 감춥니다. <소나기>는 이런 방법으로 첫사랑의 애틋함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독자는 소년과 소녀가 풋풋하게 연애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독자는 단편 소설이 무슨 시점으로 소년과 소녀를 비추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오직 풋풋한 연애만 강조한다면, 이건 뒷담화 호박씨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소설은 허구입니다. 허구를 이야기하는 것과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릅니다. 독자가 소설을 평가할 때, 만약 독자가 문학적인 장치들을 빼먹는다면, 독자는 현실처럼 허구를 이야기할 겁니다. 하지만 단편 소설 <소나기>에서 문학적인 장치들 없이 소년과 소녀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단편 소설 속에 문학적인 장치들이 있기 때문에, 소년과 소녀는 등장인물이 됩니다. 소년과 소녀는 상상력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사람들은 뭔가 거창한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상상력이라는 단어는 아주 비일상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기이한 외계 행성 식물을 묘사할 때, 이건 상상력이 됩니다. 분명히 기이한 외계 식물은 상상력입니다. 현실 속에서 아직 과학자들은 외계 식물은 고사하고 외계 미생물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이한 외계 식물은 상상력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기이한 외계 식물에게 어마어마한 설정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외계 식물은 지구 진화 역사와 인류 진화 역사를 통째로 뒤집을지 모릅니다.
이건 정말 '상상력'입니다. 독자가 제임스 팁트리 소설을 읽은 이후, 독자는 지구 진화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심지어 독자는 이 우주에 외계 생명체가 아예 없기를 바랄지 모릅니다. 제임스 팁트리 소설보다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의 외계 식생은 훨씬 친숙하나, 스페이스 오페라 설정 역시 상상력입니다. 이런 기이한 외계 식물과 달리, 소년과 소녀는 훨씬 일상적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소년과 소녀가 상상력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물론 분명히 소년과 소녀보다 기이한 외계 식물은 훨씬 비일상적입니다. 아무리 소녀가 잔망스럽다고 해도, 소녀는 기이한 외계 식물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이런 장면과 잔망스러운 소녀는 다릅니다. 하지만 형식/내용적으로 양쪽 모두 상상력에 속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소녀와 기이한 외계 식물은 똑같이 소설, 게임, 창작물 속의 구성 요소입니다. 소설과 게임은 허구이고, 허구와 문학적인 장치 없이, 소녀와 외계 식물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가 기이한 외계 식물을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처럼, 독자는 잔망스러운 소녀를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는 문학적인 장치들이 외계 식물을 보여준다고 말해야 하고 동시에 문학적인 장치들이 잔망스러운 소녀를 보여준다고 말해야 합니다. 잔망스러운 소녀보다 기이한 외계 식물이 훨씬 비일상적이라고 해도, 독자는 양쪽 모두 소설 구성 요소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소설 작가가 일상적인 소녀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 제작자들이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처럼, 소설 작가는 문학적인 장치들(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소설에는 현실이 있고 상상력이 있습니다. 현실과 상상력이 무슨 관계를 맺는지, 현실과 상상력 중에서 무엇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 어떻게 상상력이 현실을 반영하는지, 평론가들은 계속 논의합니다. 소설 평론에서 상상력, 허구는 가장 중요한 소재인지 모릅니다. 평론가들이 열심히 상상력, 허구를 논의하는 동안, 철학자들은 왜 이런 상상력 따위가 중요한지 물을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상상력, 허구보다 훨씬 중요한 주제들이 있습니다.
철학자들에게 상상력, 허구는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닐 겁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 상상력과 허구는 철학 담론의 꼭대기로 올라간 적이 없습니다. 이른바 문화 담론이 본격적으로 나타났을 때, 상상력과 허구는 커다란 주목을 받았으나, 여전히 철학자들에게 상상력과 허구는 핵심 주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평론가들에게 상상력 없는 소설 평론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상상력은 오직 SF 소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분명히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발휘했으나, 제임스 팁트리는 상상력을 독점하지 못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잔망스러운 소녀에게도 상상력이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상상력을 빌미로서 SF 소설들을 비난합니다. 사람들은 SF 소설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고 황당무계하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결국 잔망스러운 소녀 역시 상상력이기 때문에, 상상력은 SF 소설들을 비난하기 위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물론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일상적인 상상력과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다르다고 반박할 겁니다. 잔망스러운 소녀와 기이한 외계 식생이 똑같이 상상력이라고 해도, 기이한 외계 식생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이기 때문에, 결국 잔망스러운 소녀보다 기이한 외계 식생은 훨씬 황당무계합니다. 하지만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려 가요 <정석가>가 옥으로 연꽃을 만들고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처럼, 문학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동원하고 주제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기이한 외계 식생은 생명 진화 역사와 미지와의 조우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잔망스러운 소녀 같은 일상적인 상상력은 생명 진화 역사와 미지와의 조우를 강조하지 못합니다. 솔직히 일상적인 대화에서부터 세계 고전 문학까지, 비일상적인 상상력 없이, 우리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사변 장르는 이런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훨씬 확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