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식물 아내>와 감각적인 연결 고리 본문
"그 여자는 생태 사회주의를 향해 두 눈을 뜬다." 이 문장은 여자가 두 눈을 뜬다고 서술합니다. 문장 속에서 여자는 두 눈을 뜹니다. 하지만 '두 눈을 뜬다'는 비유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여자는 정말 두 눈을 뜨기보다 생태 사회주의 사상을 터득하고 이해하고 배우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뭔가를 깨닫고 배울 때, 우리는 '두 눈을 뜬다'고 표현합니다. 이건 비유입니다. 깨닫고 배우는 것은 두 눈을 뜨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두 눈을 뜬다'고 표현하나요? 우리가 '깨닫고 배운다'라고 표현할 수 있음에도, 왜 우리가 '두 눈을 뜬다'고 표현하나요? 왜 비유 형식이 '깨닫고 배운다'를 '두 눈을 뜬다'에 연결하나요?
[바이오 돔은 지구 환경을 비유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왜 바이오 돔이 지구 환경을 비유하나요?]
패트리스 머피가 쓴 <식물 아내>에도 비유(식물과 아내)가 있습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는 식물 여자와 플랜테이션 농장, 외계 식생을 이야기합니다. 외계 행성에서 환금 작물들을 심기 위해 플랜테이션 농부는 외계 식생을 밀어내기 원합니다. 동시에 남자 농민은 식물 아내를 심습니다. 남자 농민이 식물 아내를 구입하고 심고 키우기 때문에, 식물 아내는 남자 농민에게 종속됩니다. 이런 바이오펑크 이야기에서 종속-해방 관계는 빠지지 못합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메리 셸리가 인조인간을 이용하고 종속-해방 관계를 이야기한 것처럼, <식물 아내> 역시 식물 여자를 이용하고 종속-해방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창조자에게서 인조인간이 벗어나기 원하는 것처럼, 남자 농민에게서 식물 아내 역시 벗어나기 원합니다. 결국 남자 농민에게서 식물 아내는 벗어납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비단 식물 아내만 아니라 환금 작물들과 외계 식생 역시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플랜테이션 남자 농민은 식물 아내와 환금 작물들과 외계 식생을 구속했으나, 이제 식물 아내와 환금 작물들과 외계 식생은 해방을 맞이합니다. <식물 아내>는 스페이스 오페라이고 바이오펑크이나, 많은 독자들은 이런 결말이 그저 스페이스 오페라와 바이오펑크에 불과하지 않다고 느낄 겁니다. 많은 독자들은 <식물 아내>가 가부장 문화를 비판한다고 느낄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식물이 수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자연 생태계 속에서 식물들은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입니다. 비록 식물들이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도, 식물들은 절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식물들은 가시를 찌르거나, 맹독을 합성하거나, 미끼를 놓거나, 포식자를 꼬시거나,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떻게 식물들이 살아남는지 사람들이 연구한다면, 사람들은 감탄사들을 멈추지 못할 겁니다. 잘못된 상식과 달리, 식물들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동물이기 때문에, 동물 관점에서 우리는 그저 식물들이 수동적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동적인 인간을 식물에 비유합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 역시 수동적인 여자, 순종하는 여자를 식물에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 남자(남편)가 플랜테이션 농민이기 때문에, 여자와 남자 관계는 훨씬 종속 관계에 가깝습니다. 농민(남편)이 식물(아내)을 심고, 키우고, 관리하고, 길들이는 것처럼, 남자는 여자를 길들입니다. 여자는 작물입니다. 작물은 가축과 비슷합니다. 플랜테이션 남자 농민에게 식물 아내는 길들여진 작물과 비슷합니다. <식물 아내>에서 '여자와 식물' 비유는 다소 부정적입니다. 이런 비유는 '어머니 자연' 비유와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자연의 여신, 어머니 섬 테 피티는 녹색 식물 여자입니다. 어머니 자연은 식물 여자입니다.
자연 생태계에서 녹색 식물은 생산자입니다. 녹색 식물(속의 광합성 요소)은 영양분을 생산합니다. 녹색 식물들이 생산자가 되기 때문에, 다른 소비자들과 포식자들과 분해자들 역시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판타지들과 사이언스 픽션들은 녹색 식물을 여자에 비유합니다. 여자, 어머니 역시 생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자, 어머니는 아기를 낳고 아기에게 젖을 먹입니다. 여자는 생명체를 낳고 생명체를 먹입니다. 여자의 젖가슴은 원초적인 영양분 생산자입니다. 아니, 어쩌면 젖가슴 이전에 자궁은 훨씬 원초적인 영양분 생산자인지 모릅니다. 여자가 젖으로 아기를 먹이기 전에 이미 여자는 자궁 속의 아기에게 영양분을 먹입니다.
이렇게 여자가 생산적이기 때문에, 판타지들과 사이언스 픽션들은 녹색 식물을 여자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자연의 여신 테 피티는 녹색 식물일 겁니다. 자연의 여신 테 피티와 달리, 단편 소설 <식물 아내>가 수동적인 여자를 움직이지 않는 식물, 작물(가축)에 비유하기 때문에, <식물 아내>에서 '여자와 식물' 비유는 다소 부정적입니다. 작물에는 야성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유가 반드시 부정적인가요? 플랜테이션 남자 농민이 외계 식생들을 없애기 원하기 때문에, 단편 소설 <식물 아내>는 여자를 식물에 단순하게 비유하지 않습니다. 야생에서 외계 식생들은 살아갑니다. 외계 식생들은 야성적입니다.
가부장 문화가 여자를 길들이는 것처럼, <식물 아내>는 플랜테이션 농업이 야생 삼림을 파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자는 식물과 비슷합니다. 여자와 식물은 플랜테이션 남자 농민에게 종속됩니다. 여자와 식물은 모두 피지배 계급입니다. <식물 아내>는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나, 외계 식생에게는 지성이 있는지 모릅니다. <식물 아내>는 외계 식생에게 지성이 있는지 모른다고 암시합니다. "바람은 살랑거리고, 나뭇잎들은 소곤거린다." 일반적인 주류 문학에서 이런 문장은 그저 의인화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외계 식생에게는 정말 지성이 있을지 모릅니다. 외계 나뭇잎들은 정말 소곤거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몰아내기 위해 외계 식생들은 비상 대책 회의를 펼치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플랜테이션 남자 농민은 군사 정부나 군사 조직에 속한 것 같습니다. 군복을 입은 남자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시찰합니다. 현실 속에서도 플랜테이션 농업은 그저 단일 재배 농업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은 군사 침략과 떨어지지 않습니다. 서구 침략자들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 아시아를 침략하고 플랜테이션 농업을 도입합니다. 플랜테이션 농업은 군사 침략, 경제 침략입니다. 식민지 침략 속에서 양민들은 끔찍하게 죽어갑니다. 이런 침략은 서구 자본주의 부흥으로 이어집니다.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서 식민지 양민들이 벗어나기 원하는 것처럼,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 식물 아내(와 외계 식생)는 플랜테이션 남자 농민를 몰아내기 원합니다. 결국 피지배 계급은 해방을 추구합니다. 플랜테이션 남자 농민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식물 아내는 해방을 느낍니다. 더 이상 단일 재배 농업, 환금 작물 농업은 외계 식생을 파괴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농장 작물들은 생물 다양성, 혼합 농업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에서 '여자와 식물' 비유는 다소 부정적인 것 같으나, 식물 아내는 해방을 추구하고 농장 작물들과 외계 식생 역시 가부장적인 플랜테이션 농업을 밀어냅니다.
어쩌면 식물 아내는 농장 작물들 및 외계 식생과 상호 작용하고 순환 체계를 조성할지 모릅니다. 식물 아내가 '식물'이기 때문에, 식물 아내는 자연 환경과 하나가 되고, 이런 합일은 정말 어머니 자연일지 모릅니다. 이렇게 <식물 아내>는 그저 스페이스 오페라와 바이오펑크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식물 아내>는 어떻게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여자와 자연을 억압하는지 비유합니다. 식물로서 여자가 농장 작물들 및 외계 식생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식물 아내>는 여자와 자연을 훨씬 강조할 수 있습니다. 비록 분량이 짧다고 해도, <식물 아내>에는 강렬한 상징들이 가득합니다. 여러 요소들은 강렬한 상징들입니다.
어쩌면 두꺼운 에코 페미니즘 서적보다 짤막한 <식물 아내>는 훨씬 깊이를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두꺼운 에코 페미니즘 서적보다 짤막한 <식물 아내>는 훨씬 강렬한지 모릅니다. 이 소설이 비유를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에코 페미니즘 서적은 여자가 정말 식물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반면, 스페이스 오페라와 바이오펑크로서 <식물 아내>는 여자가 정말 식물이고 야생 삼림과 관계를 맺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유를 설정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류 문학에서 나뭇잎들이 소곤거린다면, 이건 그저 의인화에 불과할 겁니다. 반면,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여자는 외계 나뭇잎들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스페이스 오페라가 비유를 설정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강렬하고 인상적입니다. 비단 스페이스 오페라만 아니라 (어머니 섬 테 피티처럼)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는 강렬하고 인상적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이 기이한 외계 식생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넘고 다른 것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식물 아내가 그저 바이오펑크에 불과하지 않은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 속의 기이한 외계 식생들에는 다른 의미들이 있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기이한 외계 식생들을 이용하고 무엇을 해석하든, 게임 플레이어는 기이한 외계 식생들이 뭔가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학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유와 상징보다 주제를 직접 말하기 원할 겁니다. "왜 우리가 여자와 식물을 비유해야 하는가? 왜 기이한 외계 식생들이 상징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주제를 직접 이야기해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사변 장르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사변 장르만 비유와 상징을 이용하나요? 비단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만 기이한 외계 식생들을 이용하나요? 비단 <식물 아내>만 여자를 식물에 대입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미 일상에서 우리는 수많은 비유들을 이용합니다. 사람들이 비유들을 싫어한다고 해도, 언어 활동에서 비유는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문장은 비유입니다. '인생의 의미'에서 관형격 조사 '의'는 인생이 의미를 소유한다고 가리킵니다. '인생의 의미'에서 체언 '인생'은 관형격 조사 '의'를 이용하고 사물 '의미'를 소유합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가요? 인생이 주체가 되고 의미를 소유할 수 있나요? 인생은 주체가 아닙니다. 주체는 우리입니다. 주체로서 우리는 인생을 삽니다. 게다가 인생은 의미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고생물학 덕후는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을 소유할 수 있으나, 인생은 의미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의미는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미가 사물이라고 간주하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라고 아무렇지 않게 묻습니다.
1) 그 여자에게는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이 있어.
2)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아름다운 영혼들이 있어.
1번 문장 구조와 2번 문장 구조는 똑같습니다. 두 문장 모두 소유를 가리킵니다. "그 여자에게는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이 있어." 이건 소유를 가리킵니다.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아름다운 영혼들이 있어." 이 문장 역시 소유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두 문장 구조가 똑같다고 해도, 스테고사우루스 모형과 아름다운 영혼은 다릅니다.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은 사물입니다. 반면, 아름다운 영혼은 사물이 아닙니다. 고생물학 덕후 이모는 어린 조카에게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을 빌려줄 수 있습니다. 어린 조카는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을 두 눈으로 직접 구경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이 아름다운 영혼들을 소유한다고 해도, 사회주의자들은 아름다운 영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름다운 영혼들을 보기 원한다고 해도, 사회주의자들은 영혼들을 꺼내지 못합니다. 영혼이 사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회주의자들이 아름다운 영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건넬 수 있다면, 이미 인류 문명은 밑바닥 계급을 위한 유토피아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혼은 사물이 아니고, 사회주의자는 영혼을 건네지 못합니다. 사회주의자가 영혼을 건네지 못함에도, 이모가 조카에게 공룡 모형을 건네는 것처럼, 우리는 영혼이 사물이라고 비유합니다. 1번 문장과 2번 문장은 한국어 문장이나, 비단 한국어만 아니라 다른 언어 활동들 역시 비유들을 동원합니다. 가령, 영어 문장 역시 "She has a stegosaurus statue.", "Socialists have beautiful souls."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왜 언어 활동에서 비유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야 하나요? 왜 우리가 비유를 동원하나요? 여기에는 여러 대답들이 있을 테고, '감각' 역시 대답이 될 겁니다. 우리 인간은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을 직접 만지고 구경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을 직접 소유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의미는 추상적입니다. 우리는 의미를 직접 만지지 못하고, 직접 구경하지 못하고, 직접 소유하지 못합니다. 의미보다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은 훨씬 감각적입니다.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이 사물이기 때문에, 사물로서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은 훨씬 감각적입니다. 우리가 감각적인 것을 직접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추상적인 것보다 감각적인 것을 선호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상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으로 전환하기 원하는지 모릅니다.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이 사물인 것처럼, 만약 의미가 사물이 된다면, 의미는 훨씬 감각적일 테고, 우리는 감각적인 것을 훨씬 쉽게 받아들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말하는지 모릅니다. 테 피티와 식물 아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연 환경이 풍요롭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연 환경은 추상적입니다. '자연'은 너무 드넓은 범주입니다. '자연'은 감각적이기보다 추상적입니다. 만약 과일 나무가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단다면, 풍성한 열매들은 훨씬 감각적일 겁니다. 우리 인간은 풍성한 열매들을 직접 구경할 수 있고, 직접 만질 수 있고, 직접 먹을 수 있습니다.
[의미와 영혼보다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은 훨씬 감각적입니다. 비유 형식은 영혼을 사물에 연결합니다.]
과일 나무는 식물입니다. 반면, 호모 사피엔스는 동물입니다. 우리 인간이 감정을 대입하기 원할 때, 식물보다 동물은 훨씬 낫습니다. 식물보다 동물이 훨씬 나은 것처럼, 동물보다 인간은 훨씬 낫습니다. 결국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 인간에게 감정을 쉽게 대입할 수 있습니다. 동물 권리 논의에서 동물 감각은 논쟁거리가 되나, 인간 감각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가부장 문화가 여자 감각을 억압하고 무시하고 외면한다고 해도, 적어도 동물 감각보다 인간 여자 감각은 훨씬 '인간적'입니다. 만약 과일 나무와 인간 여자가 합치고 어머니 자연이 된다면, 어머니 자연은 훨씬 감각적일 겁니다.
의미보다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이 훨씬 감각적인 것처럼, 자연 환경보다 과일 나무는 훨씬 감각적이고, 과일 나무보다 어머니 자연은 훨씬 감각적입니다. 여자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때문에, 과일 나무가 먹거리(열매)를 생산하는 것처럼, 여자는 먹거리(모유)를 생산합니다. 어머니 자연이 인간적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연 환경, 과일 나무보다 어머니 자연을 훨씬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지구는 아파요."라고 말하나, 지구는 얼굴을 찡그리지 못합니다. 반면, 테 피티는 얼굴을 찡그리고 마우이를 째려볼 수 있습니다. 식물 아내는 두 손을 휘두르고 플랜테이션 농부를 직접 몰아낼 수 있습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수탈합니다. 자연 환경은 피지배 계급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자연'이 너무 드넓은 범주이기 때문에, '자연'이 인간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연 환경과 피지배 계급을 쉽게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자연 환경이 피지배 계급이라고 해도, 이런 서술은 감각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여자가 매개체가 되고, 여자가 피지배 계급-여자-자연을 연결한다면, 사람들은 자연 환경이 피지배 계급이라고 감각적이고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서 여자가 피지배 계급이기 때문에, 여자가 환경 보호를 외칠 때, 여기에는 훨씬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많은 비유들은 여자와 자연을 연결하나, 종종 이런 비유들은 계급 문제를 빠뜨립니다.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수탈함에도, 계급 문제 없이, 여자와 자연이 이어져야 하나요? 여자와 자연 사이에서 오직 임신, 출산, 수유만 유사성이 되어야 하나요? 오히려 이런 비유들은 돌봄 노동 착취를 미화할지 모릅니다. 식물 아내가 두 손을 휘두르고 플랜테이션 농부를 직접 몰아낼 때, 여기에는 계급 문제가 있습니다. <식물 아내>는 자연 환경이 해방을 맞이한다고 감각적으로 서술합니다. 의미와 영혼처럼, '피지배 계급으로서 자연'은 추상적이나, 스테고사우루스 모형처럼, 식물 아내는 추상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으로 바꿉니다.
비유가 추상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에 연결하고, 추상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비유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자연 환경보다 엄마는 훨씬 친숙하고 감각적인 개념이고, 우리 인간은 테 피티와 식물 아내에게 훨씬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삼림에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고 해도, 우리 인간은 그것을 쉽게 파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삼림 생태학자는 이상 증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문적인 생태학 지식들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병든 삼림을 바라본다고 해도, 이런 사람들은 이상 증상을 쉽게 파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삼림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테 피티는 째려볼 수 있습니다. 테 피티는 훨씬 감각적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중요할 겁니다. 문제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배제한다면, 비유에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식물 아내가 비일상적인 상상력이기 때문에, SF 독자는 자연 환경을 감각적이고 인간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자들은 지구 환경이 생체 우주선이라고 비유합니다. 하지만 지구 환경은 너무 거시적입니다. 거시적인 것을 빨리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거시적인 것은 추상적입니다. 만약 하드 SF 소설이 생체 우주선을 이야기한다면, SF 독자는 왜 지구가 우주선인지 감각적으로 이해할 겁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태 사회주의는 유력한 대답이다. 그래서 여자는 생태 사회주의를 향해 두 눈을 뜬다." 이 문장에서 '두 눈을 뜬다'는 감각적입니다. 우리는 여자가 두 눈을 뜨는 장면을 직접 구경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사상은 추상적입니다. 우리가 생태 사회주의를 직접 만질 수 있나요? 여자는 실체입니다. 반면, 돌봄 노동 사회화가 실체인가요? 우리가 돌봄 노동 사회화를 직접 만질 수 있나요? 사상은 실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태 사회주의를 이해한다'보다 '생태 사회주의를 향해 두 눈을 뜬다'는 훨씬 감각적입니다. 이런 비유에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처럼, 어떤 비유들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해 사변 장르는 중요합니다. 이렇게 언어 활동에서 비유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 활동을 싫어합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비유들이 논리적인 사고 방식을 방해한다고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유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성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싫어할지 모르나, 우리가 비유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생체 우주선 항해가 인상적이라고 느낍니다. 물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히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SF 독자들이 오직 생체 우주선 항해만 주목하고 지구 자연 환경을 외면한다면, 비유는 그저 비유에 불과할 겁니다.
<식물 아내> '배후'에 자본주의 모노 컬쳐가 있는 것처럼, 하드 SF 소설 속의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배후'에는 지구 자연 환경이 있습니다. 지구 자연 환경은 심각한 위기, 기후 변화에 부딪혔습니다. 만약 우주선 속의 바이오 돔이 망가진다면, 이런 사고 '배후'에는 기후 변화가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가 획일화 농업을 강요하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식민지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킵니다. SF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을 읽고, 생체 우주선 '배후'를 바라보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