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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홈월드> 설명서와 문학성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홈월드> 설명서와 문학성

OneTiger 2020. 2. 4. 19:51

[문자 그대로 쿠샨 모선은 엄마 배입니다. 엄마는 여자이고, 함선 지성 카란 스젯은 여자입니다.]



비디오 게임 <홈월드> 설명서와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글자 매체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양쪽이 똑같이 글자 매체이기 때문에, 양쪽은 동일한 위상입니다. 양쪽에게는 동일한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주 함대 게임 설명서를 읽습니다. 사람들은 희곡을 읽습니다. 게임 설명서와 희곡은 똑같이 글자 매체이고, 양쪽이 동일한 위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게임 설명서와 희곡을 읽습니다. 글자 매체는 읽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게임 설명서와 희곡이 똑같이 글자 매체라고 해도, 문학 평론가들은 양쪽이 동일하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설명서와 희곡은 다릅니다.


설명서에게는 확실한 목표가 있습니다. <홈월드> 설명서는 비디오 게임 인터페이스를 설명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홈월드> 설명서는 다른 것들을 희생하지 못합니다. 설명서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운율을 살리기 위해 설명서 작성자는 미사여구들을 집어넣거나, 만연체를 구사하거나, 모호한 단어들을 늘어놓지 못합니다. "함선을 선택한 이후, [M]키를 누른다. 이 동작은 이동 디스크를 불러온다. 가고자 하는 곳에 마우스 포인터를 가져가고 명령을 내리기 위해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누른다." 이렇게 비디오 게임 <홈월드>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함선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런 문장들은 단어를 활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들에서 단어는 간단한 소비 행위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문장들을 읽고, 단어들을 간단하게 이해하고, 게임 인터페이스를 익힐 수 있습니다. 만약 설명서가 미사여구들을 집어넣거나, 만연체를 구사하거나, 모호한 단어들을 늘어놓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화를 내고 설명서가 엉터리라고 느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 여러분! 지원 프리게이트를 움직이기 위해 여러분은 마우스를 좌클릭해야 합니다! 오오, 좌클릭! 좌클릭이여!! 게임 플레이어 여러분, 여러분이 마우스를 좌클릭할 때, 여러분이 무엇을 진정으로 느낍니까? 진정으로?"


만약 <홈월드> 설명서가 이런 문장들을 늘어놓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화를 내고 설명서를 집어던질 겁니다. 어떤 게임 설명서들은 이런 문장들을 의도적으로 늘어놓을지 모릅니다. 첨단 SF 분위기를 살리거나 고풍스러운 중세 판타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어떤 게임 설명서들은 기계적인 말투를 늘어놓거나 고급스러운 구어체를 사용할지 모릅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이런 서술을 문학성이라고 부릅니다. 게임 설명서는 문학성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문학성'이 게임 인터페이스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문학성을 즐기기보다 설명서를 집어던질 겁니다.



"아아, 11시 방향, 멀지 않은 상단, 붉은 성운이 신비롭게 빛나는 상황에서 아군 콜벳은 불타오르는 중입니다. 아군 콜벳은 연료를 거의 소모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 여러분, 지원 프리게이트를 선택하고 [Z]키를 누르십시오. 아직 [Z]키에서 손가락을 떼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아군 콜벳을 좌클릭한다면, 지원 프리게이트는 망가진 콜벳을 수리하고 연료를 채울 겁니다. 좌클릭! 자애로운 엄마가 굶주린 남자에게 젖꼭지를 물리는 것처럼, 지원 프리게이트는 굶주린 콜벳에게 연료를 채웁니다!! 게임 플레이어 여러분, 이것은 좌클릭입니다!!!" 이런 서술은 문학적입니다. 이런 서술은 비유입니다.


이 서술은 붉은 성운, 좌클릭, 모성, 돌봄, 가난을 연결합니다. 주된 사건은 우주 함대 전투이나, 이 서술은 우주 함대 전투에 붉은 성운, 좌클릭, 모성, 돌봄, 가난을 연결합니다. 이 서술은 느낌표들을 과도하게 집어넣고 뭔가를 호소합니다. 지원 프리게이트는 가난 사상, 공산주의, 모성, 돌봄 노동이 됩니다. 우주 함대 지원 프리게이트와 가난 사상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음에도, 이 서술은 유사성을 찾고 두 가지를 연결합니다. 그래서 이 서술은 문학적입니다. <홈월드> 설명서는 우주 함대를 다른 뭔가에 연결하고, 비유하고, 문학성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연결 고리, 비유는 문학성이 됩니다.



쿠샨 함대에서 쿠샨 모선(mothership)에는 생체 지성이 있습니다. 카란 스젯은 쿠샨 모선 지성입니다. 카란 스젯이 여자이기 때문에, 쿠샨 모선은 정말 母船인지 모릅니다. 쿠샨 모선은 우아한 곡선을 자랑합니다. 여자의 육체에서 젖가슴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여자 역시 곡선을 선보입니다. 임산부 역시 곡선을 선보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품는 것처럼, 쿠샨 모선은 전투기들과 콜벳들을 품습니다. 만약 <홈월드> 설명서가 이것들을 서술한다면, 문학 평론가들은 이 서술이 문학적이라고 평가할 겁니다. 우주선과 엄마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음에도, 이 서술이 연결 고리를 찾고 비유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런 연결 고리, 비유가 성 차별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이 <홈월드> 설명서를 읽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들은 떠나지 못합니다. 아무리 <홈월드>가 장대한 우주 서사시를 펼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들은 스페이스 오페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그 자체로서 스페이스 오페라가 또 다른 세계라고 인정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또 다른 세계, 스페이스 오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모니터를 바라보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좌클릭합니다.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현실은 가부장 제도입니다. 자본주의가 가장 지배적인 사회 구조이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현실은 가부장 제도입니다. 가부장 제도 속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여자들을 돌봄 노동들에 '억지로' 밀어넣습니다.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착취 대상이 되고, 이건 온갖 끔찍한 성 폭력들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만약 <홈월드> 설명서가 카란 스젯과 쿠샨 모선과 엄마를 연결한다면,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게 성 차별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지원 프리게이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홈월드> 설명서가 카란 스젯과 쿠샨 모선과 엄마를 연결한다고 해도, 이런 서술은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해야 한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런 서술은 그저 비유할 뿐입니다. 이건 성 차별이 반드시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게임 설명서가 지원 프리게이트와 마우스 좌클릭과 엄마 젖꼭지를 연결한다고 해도, 이건 모성적인 좌파가 반드시 옳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홈월드> 설명서는 샬롯 퍼킨스 길먼 소설이 되지 않을 겁니다. 비유는 설명이 아닙니다. 문학성은 설명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게임 설명서가 문학성을 추구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이것을 반기지 않을 겁니다.



게임 설명서는 게임 인터페이스를 설명해야 합니다. 게임 설명서는 비유, 문학성을 추구하기보다 설명해야 합니다. 반면,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미사여구들을 집어넣거나, 만연체를 구사하거나, 모호한 단어들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알쏭달쏭한 장면들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만약 희곡이 문학성을 추구한다면, 게임 설명서와 달리, 문학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이것을 환영할 겁니다. 많은 문학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희곡이 문학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곡에게 문학성이 있기 때문에, 게임 설명서와 달리, 희곡은 뭔가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만약 희곡이 모호한 문장들을 연이어 늘어놓는다면, 관객들은 희곡이 무엇을 말하기 원하는지 헛갈릴 겁니다. 시와 소설 같은 다른 문학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어떤 소설 작가들은 단어들을 너무 괴상하게 활용합니다. 우주 함대 게임 설명서는 단어들을 괴상하게 활용하지 못합니다. 우주 함대 게임 설명서는 단어들을 괴상하게 활용해서는 안 됩니다. 반면, 소설은 모호한 단어들과 문장들을 늘어놓을 수 있고, 문학 평론가들은 뭐라고 소설이 말하는지 (용감무쌍하게) 해석할 겁니다. 이런 해석들은 다양합니다. 어떤 것들은 과잉 해석이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해석들은 다양합니다.



물론 소설이 단어들을 너무 괴상하게 활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은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문학으로서 SF 소설 역시 뭔가를 비유하고 연결할 수 있습니다. 만약 SF 소설이 문학성을 살린다면, 문학 평론가들은 SF 소설을 호평할 겁니다. 종종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이 소설은 SF 장르에 속하나, 다른 SF 소설들과 달리, 이 SF 소설은 문학적인 향기를 풍긴다."고 운운할지 모릅니다. 많은 문학 평론가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문학성을 선보이지 못한다고 가정하고 장르 소설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문학성이 오직 주류 문학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대단한 착각입니다.


하지만 이게 대단한 착각이라고 해도, 분명히 게임 설명서보다 SF 소설은 문학성을 선보일 수 있습니다. 정세랑 작가가 쓴 소설 모음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 <리셋>과 <7교시>는 환경 아포칼립스에 속합니다. <리셋>이 환경 아포칼립스를 묘사한다고 해도, 정세랑 작가는 <리셋>이 미래학 논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독자들 역시 이 소설이 미래학 논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리셋>이 미래 환경 오염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정세랑 작가와 독자들은 이게 그저 미래 사건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독자들은 현재를 (소설 속의) 미래에 대입할 겁니다.



정세랑 작가가 <리셋>을 미래 사건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이건 오류입니다. 아직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과학자들이 기후 변화를 너무 걱정하고 경고하기 때문에, 분명히 미래는 환경 아포칼립스에 가깝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과학자들은 미래 환경 오염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합니다. 과학자들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정세랑 작가를 비롯해 SF 작가들 역시 예언자가 아닙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미래 환경 오염을 이야기하나, 이건 설명이 아닙니다. 이게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정세랑 작가와 독자들에게 이건 구체적인 사건이 되지 못합니다. 1871년 파리 코뮌은 구체적인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1871년 파리 코뮌과 달리, 미래 환경 아포칼립스는 구체적인 사건이 되지 못합니다. 미래 환경 아포칼립스가 구체적인 사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정세랑 작가가 소설을 쓰는 동안,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동안, 미래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정세랑 작가와 독자들은 다른 뭔가를 참고해야 합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정세랑 작가와 소설 독자들은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기후 변화가 너무 심각한 위기, 지질학적인 단위에서 행성급 환경 오염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기후 변화를 참고하고 미래 환경 아포칼립스를 읽습니다. 소설 속의 미래 환경 오염과 현실 속의 기후 변화는 이어집니다. 이건 연결입니다.



<홈월드> 설명서가 지원 프리게이트와 망가진 콜벳과 가난 사상과 모성과 좌클릭을 연결하고 문학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리셋>은 미래 환경 오염과 현실 속의 기후 변화를 연결합니다. 이건 문학성입니다. <홈월드> 설명서에서 이런 비유는 다소 어색하나, <리셋> 같은 SF 소설들에서 문학성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왜 문학성이 중요한 요소가 되나요? 환경 오염을 비판하기 위해 우리가 SF 소설을 반드시 읽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환경 오염을 비판하기 위해 정세랑 작가보다 캐롤린 머천트와 존 벨라미 포스터는 훨씬 나을 겁니다. 두 지식인은 비유하지 않습니다. 두 지식인은 설명합니다.


정세랑 작가는 비유하나, 캐롤린 머천트와 존 벨라미 포스터는 설명합니다. 비유보다 설명은 낫습니다. 만약 비유보다 설명이 낫다면, 왜 문학성이 중요한가요? 유력한 대답들 중에서 하나는 강조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유기체 동물입니다. 다른 많은 동물들처럼, 인간은 먹어야 합니다. 동물로서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동물로서 인간에게 먹는 것은 아주 원초적인 화제입니다. 반면, 지원 프리게이트와 콜벳은 우주선, 기계입니다. 유기체, 동물과 우주선, 기계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우주선, 기계가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동물과 기계 사이에는 너무 너무 커다란 간격이 있습니다.



만약 지원 프리게이트와 망가진 콜벳이 자애로운 엄마와 굶주린 남자가 된다면, 우주선/기계가 인간/동물로 전환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감정을 훨씬 쉽게 이입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인간/동물보다 우주선/기계를 훨씬 친숙하게 느낀다고 해도, 개인적인 감정과 상관없이, 게임 플레이어는 우주선보다 인간 엄마에게 훨씬 가깝습니다. 게임 플레이어와 엄마는 똑같이 인간/동물입니다. 기계가 인간이 되기 때문에, 부족한 연료는 굶주림이 되고, 상황은 훨씬 급박해집니다. 연결 고리, 비유, 문학성은 급박한 상황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 역시 기후 변화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리셋>과 <7교시>를 읽은 이후, 독자들이 현실 속의 기후 변화를 바라볼 때마다, 독자들은 너무 처참한 미래 멸종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아직 생물 다양성이 완전히 멸종하지 않았다고 해도, 독자들은 처참한 미래 멸종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리셋>과 <7교시>는 기후 변화가 너무 심각하다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정세랑 작가가 이것을 의도했나요? 만약 정세랑 작가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리셋>과 <7교시>는 환경 아포칼립스 범주에 속합니다. 그리고 환경 아포칼립스는 현실 속의 환경 오염을 경고합니다. 환경 아포칼립스에는 이런 장르 공식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환경 아포칼립스에 속합니다. 환경 아포칼립스에는 장르 공식, 전형이 있습니다.]



만약 정세랑 작가가 현실 속의 환경 오염을 경고하기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환경 아포칼립스에게 장르 공식, 전형(典型)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장르 공식, 전형을 <리셋>과 <7교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리셋>과 <7교시>가 비유, 연결 고리, 반영이라고 해도, 캐롤린 머천트와 존 벨라미 포스터가 중요한 것처럼, <리셋>과 <7교시>는 중요합니다. 만약 비유가 중요하지 않다면, 왜 캐롤린 머천트가 조각 <La Nature se dévoilant>를 비판했나요? 사소한 일상부터 세계 고전 문학까지, 이미 비유는 여러 인류 문화들에 깊게 스몄습니다. 비유, 연결 고리에서 우리는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문제는 해석들이 다양하다는 사실입니다. 비유가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비유는 오직 한 가지만 연결하지 않습니다. <홈월드> 설명서가 연료와 모유를 연결한다고 해도,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이게 성 차별이라고 해석할지 모르고,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이게 소설 <분노의 포도>를 오마쥬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소설 <분노의 포도>는 수유 장면을 묘사하나, 어떤 독자는 이게 성 차별이라고 해석할지 모르고, 어떤 독자는 노동자 계급이 모성, 돌봄을 추구해야 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리셋>과 <7교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리셋>과 <7교시>는 오직 기후 변화만 반드시 가리키지 않습니다.



<리셋>과 <7교시>에는 환경 아포칼립스 공식 이외에 다른 여러 측면들이 있습니다. 독자들은 여러 측면들에 다양하게 가치들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이 여러 측면들에 다양하게 가치들을 부여한다고 해도, 소설이 설명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막지 못합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논리적인 평론을 확립하기 원하나, 아무리 문학 평론가들이 노력한다고 해도, 문학 평론가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나요? 심지어 문학 평론가들조차 무엇이 논리적인 평론인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구조주의 평론보다 수용 미학이 반드시 나은가요? 스탠리 피쉬가 논리적인 평론가인가요?


심지어 다양한 해석들은 과잉 해석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문학 평론가들이 과잉 해석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나요? 글쎄요, 이건 불가능할 겁니다. 다행히 문학 평론가들이 과잉 해석을 완벽하게 막지 못한다고 해도, 이건 비극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과잉 해석은 똑같은 과잉 해석들이 아니고, 모든 연결은 똑같은 연결들이 아닙니다. 쿠샨 모선과 카란 스젯, 지원 프리게이트와 자애로운 엄마는 성 차별이라는 과잉 해석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들이 이런 과잉 해석을 완벽하게 막지 못한다면, 이건 너무 심각한 문제가 될 겁니다. 어떻게 문학 평론가들이 이런 과잉 해석을 막을 수 있나요?



문학 평론가들이 막기 원한다고 해도, '문학 평론' 그 자체는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중산층 가족 관념을 세뇌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돌봄 노동 착취에서 가부장 문화는 비롯합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들이 과잉 해석, 중산층 가족 관념을 막기 원한다면, '문학 평론'은 문학을 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해야 할 겁니다.



※ 스크린샷 <Comparison of Kharak and Banana Ship> 출처: Lime,

https://www.neogaf.com/threads/homeworld-remastered-ot-all-of-this-has-happened-before-and-will-happen-again.998627/page-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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