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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저 반짝이는 별들>과 황금 열쇠 해석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저 반짝이는 별들>과 황금 열쇠 해석

OneTiger 2020. 2. 3. 19:56

소설 <이중 도시> 인터뷰에서 차이나 미에빌은 이른바 '황금 열쇠'를 비판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소설을 해석하기 위한 황금 열쇠를 상정합니다. 소설 <이중 도시>는 두 도시가 서로 적대한다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독자는 이 소설이 이슬람 문명과 서구 문명을 비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도시가 적대하는 것처럼, 이슬람 문명과 서구 문명이 적대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소설을 해석하기 위한 여러 방법들 중에서 하나이나, 이른바 황금 열쇠는 너무 1차원적인 시각을 향해 이어질지 모릅니다. 소설 속에서 두 도시는 이슬람 문명, 서구 문명보다 훨씬 풍성한 설정을 보여줍니다.


만약 독자가 이슬람 문명, 서구 문명에 집착한다면, 독자는 두 도시 설정을 오직 이슬람 문명, 서구 문명에만 연결할 테고, 독자는 다른 것들을 놓칠 겁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이게 소설을 해석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인정하나, 차이나 미에빌은 이게 너무 간단하다고 비판합니다. 만약 작가가 어떤 것을 말하기 원한다면, 비유 없이, 작가는 그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훨씬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단순하고 쉬운 비유를 찾기보다 뭐라고 소설이 이야기하는지 해석해야 할 겁니다. 비단 차이나 미에빌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 평론가들은 황금 열쇠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황금 열쇠를 버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변 소설 선언문>에서 반다나 싱은 칼 융을 언급합니다. 반다나 싱은 언어 활동에서 상징과 비유가 근본적이라고 지적합니다. 만약 언어 활동에서 상징과 비유가 근본적이라면, 황금 열쇠를 버리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독자가 황금 열쇠를 쉽게 버릴 수 있다고 해도, 독자는 상징과 비유를 (저도 모르게) 읽을지 모릅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우화와 비유를 구분한 것처럼, 황금 열쇠와 비유는 다를 겁니다. 황금 열쇠는 해석을 제한하나, 오히려 비유와 상징은 풍성한 함의를 보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어디부터 어디까지, 해석이 황금 열쇠에 해당하나요?


영화 <설국 열차> 평론에서 듀나님은 신자유주의 비판이 황금 열쇠라고 지적했습니다. 신자유주의 비판은 영화 해석을 너무 제한합니다. 하지만 듀나님은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에서 로켓 라쿤이 전형적인 백인 남자를 비유한다고 해석합니다. 이게 황금 열쇠인가요, 아니면 비유와 상징인가요? 만약 로켓 라쿤이 전형적인 백인 남자라면, 다른 외계인들 역시 스테레오 타입 등장인물들이 될 테고, 스페이스 오페라는 사라질 겁니다. 더 이상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는 우주 모험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여러 외계인들은 그저 미국 인종 시장에 불과합니다. 이런 해석이 정말 황금 열쇠가 아닌가요?



듀나님은 황금 열쇠 잣대를 제멋대로 적용합니다. <설국 열차>에서 듀나님은 황금 열쇠를 비판했으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에서 듀나님은 황금 열쇠를 적용했습니다. 어쩌면 듀나님은 실수했는지 모르나,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비유와 상징에서 해석은 완전히 독립적이지 않은지 모릅니다. 칼 융 이론이 틀리거나 완전히 옳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언어 활동에서 비유와 상징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그래서 독자가 소설을 비롯해 창작물들을 해석하는 동안, 독자는 비유와 상징을 느낄지 모릅니다. 독자는 황금 열쇠를 경계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독자는 비유와 상징을 완전히 지우지 못할 겁니다.


<사변 소설 선언문>에서 반다나 싱이 강조한 것처럼, 특히, SF/판타지 같은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에서 비유와 상징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사변 장르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게임 <패스파인더>에서 드루이드와 검치 호랑이 동료는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현실 속에서 드루이드와 검치 호랑이 동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는 고대~중세 신화에 (서구) 근대 가치관을 밀어넣고 안락하고 친숙하고 환상적인 세계를 제시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서구 근대화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합치거나 전형적인 신화에 근대 과학/가치관을 덧붙입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복제 공룡 사파리는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패스파인더>에서 검치 호랑이 동료가 생태적인 상상력인 것처럼,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복제 공룡 사파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검치 호랑이 동료에게는 근대 과학이 없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드루이드는 어떻게 신생대 생태계가 나타나는지 연구하지 않습니다. 드루이드는 자연 신성 주문을 외웁니다. 반면, 복제 공룡 사파리에서 엘리 새틀러는 생명 진화 역사를 고찰합니다. 엘리 새틀러는 '고식물학자'이고, 진화 이론 없이, 고식물학자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검치 호랑이 동료와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다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양쪽 모두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검치 호랑이 동료와 복제 공룡 사파리를 직접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체로서 검치 호랑이 동료와 복제 공룡 사파리를 직접 받아들이기보다 양쪽을 다른 뭔가에 연결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 자체로서 복제 공룡 사파리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우리는 이것을 다른 뭔가에 연결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른바 주류 문학을 해석하는 동안, 우리는 주류 문학을 다른 뭔가에 연결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주류 문학과 현실 사이에서 틈새는 크지 않습니다. 소설 <상록수> 등장인물 채영신과 현실 사이에서 간격은 가깝습니다.



소설 <상록수>와 달리, 소설 <쥬라기 공원>과 현실 사이에서 간격은 별로 가깝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패스파인더>와 현실 사이에서 간격은 훨씬 멀어집니다. 적어도 현실 속에서 우리는 유전 공학을 구경할 수 있으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자연 신성 주문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테크노 스릴러 <쥬라기 공원>보다 <패스파인더>는 훨씬 비일상적입니다. <쥬라기 공원>은 현실 속에서 비일상을 제시하나, <패스파인더>는 비일상적인 세계를 통째로 내놓습니다. 단편 소설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 역시 비일상적인 세계입니다. <쥬라기 공원>보다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훨씬 비일상적입니다.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가 훨씬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이 단편 소설은 비유와 상징으로 훨씬 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단편 소설은 구체적인 설정을 밝히지 않습니다. 어떤 독자는 성 소수자 차별을 연결할지 모르고, 어떤 독자는 마녀 사냥을 연결할지 모르고, 어떤 독자는 빨갱이 탄압을 연결할지 모릅니다.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그저 외계인을 강조할 뿐이나, 현실에서 우주 생물학자들이 외계인을 아직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외계인은 이방인이 되고 빨갱이 탄압을 가리킬지 모릅니다. 물론 만약 독자가 이 단편 소설을 빨갱이 탄압이라고 단정한다면, 빨갱이 탄압은 황금 열쇠가 될 겁니다.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빨갱이 탄압을 가리킬 수 있으나, 이 단편 소설에는 오직 빨갱이 탄압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독자가 이것을 해석한다고 해도, 독자는 다른 것들을 함께 파악해야 할 겁니다. 문학 형식들 역시 중요합니다. 이 단편 소설이 무슨 소설 시점을 이용하나요? 이 단편 소설이 공간적인 배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나요, 아니면 대충 넘어가나요? 이 단편 소설이 만연체를 구사하나요, 아니면 문장을 간결하게 가다듬나요? 이 단편 소설이 수식어들을 너무 많이 생략하지 않나요? 문단들이 짧은가요, 아니면 적당한 길이인가요? 어떻게 이것들이 독서 호흡에 영향을 미치나요?


만약 독자가 이것들을 파악한다면, 독자는 소설을 훨씬 풍성하게 바라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독자에게 빨갱이 탄압은 가장 중요한 해석일지 모릅니다. 근대 사회에서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는 아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킵니다. 어쩌면 근대 사회에서 다른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가장 격렬한 논쟁 소재인지 모릅니다. 21세기 초반 남한 사회를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남한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격렬한 논쟁 소재라고 말하나, 페미니즘보다 공산주의는 훨씬 심각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 대통령은 자신이 페미니즘 대통령이라고 공식적으로 떠벌일 수 있습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아닙니다.



만약 공식 석상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자신을 공산주의 대통령이라고 말한다면, 해외/국내는 발칵 뒤집힐 겁니다. 국내에서 페미니즘은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는 것 같으나, 솔직히 국내 페미니즘은 안락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페미니즘을 공식적으로 떠벌이는 것처럼, 국내 페미니즘은 지배 계급을 별로 위협하지 않습니다. 그 동안 성 해방 운동이 너무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에,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조차 성 해방을 배척했기 때문에, 성 해방 운동은 힘을 별로 키우지 못했고, 너무 애석하게도 성 해방 운동은 지배 계급을 쉽게 위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페미니즘보다 공산주의는 훨씬 논란거리입니다.


공산주의가 훨씬 논란거리이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가장 심각한 논란이기 때문에, 독자는 외계인-이방인-빨갱이를 연결할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는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를 읽습니다. 현실에서 뭔가가 가장 심각한 논란을 일으킴에도, 여기에서 독자가 쉽게 자유로울 수 있나요? 신종 바이러스가 너무 대대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만약 이런 상황에서 독자가 알베르 카뮈가 쓴 <페스트>를 읽는다면, 독자는 신종 바이러스와 <페스트>를 저도 모르게 연결할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가 메리 셸리가 쓴 <최후의 인간>을 읽는다면, 독자는 신종 바이러스와 <최후의 인간>을 훨씬 긴밀하게 연결할지 모릅니다.



"아니, 왜 독자가 비유와 상징을 찾지? 만약 작가가 뭔가를 말하기 원한다면, 작가는 그것을 직접 말할 거야. 비유와 상징은 오독(誤讀)이거나 너무 편협한 해석이야." 이렇게 문학 평론가는 황금 열쇠, 비유, 상징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언어 활동에 수사학과 기호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직접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뭔가를 우회하거나, 비유하거나, 상징과 기호를 대입하거나, 과장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수사학과 기호학은 창작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이 전형적인 시 문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창작물은 뭔가를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창작물이 비유, 상징, 기호를 동원할 때, 이건 문학성을 드러내고, 많은 사람들은 문학성에 감탄합니다. 인간 마음이 호수가 되는 것처럼, 심지어 비유, 상징, 기호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동원합니다. 심지어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이 어머니 지구 설정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변 장르는 비유를 설정으로 전환합니다. 만약 우리가 뭔가를 직접 말해야 한다면, '내 마음은 호수', '어머니 지구' 같은 상징에는 아무 가치가 없을 겁니다. 우리는 '내 마음이 호수'라고 말하기보다 '나는 그대를 사모한다'고 직접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너무 밋밋하고 시시합니다. 이런 밋밋하고 시시한 표현은 벅찬 감정을 담지 못합니다.



[오른쪽 그림은 가이아 행성입니다. 왜 가이아 행성이 '가이아'인가요? 왜 이런 표현이 존재하나요?]



벅찬 감정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문구가 벅찬 감정을 담지 못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문구 밖으로 벅찬 감정이 흘러넘치기 때문에, 이것을 담기 위해 화자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고 인간 마음이 호수라고 비유해야 합니다. 어머니 지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구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이 번성한다'고 직접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너무 밋밋하고 시시합니다. 이런 밋밋하고 시시한 표현은 역동적이고 다양하고 활기찬 번성, 원초적인 생명 진화 역사를 담지 못합니다. 의미는 표현 밖으로 흘러넘칩니다. 비일상적인 표현은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벅찬 의미에게는 일상적인 표현보다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SF/판타지 같은 사변 장르는 비일상적으로 상상합니다. 그래서 사변 장르는 비유, 상징, 기호가 훨씬 쉽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은 훨씬 확장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는 그저 짧은 문장에 불과하나, 독자는 소설 그 자체가 비유, 상징, 기호라고 확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유는 뭔가를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특히, 문학이 인생을 반영하고, 인생에 특정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문학은 비유가 되고, 비유는 뭔가를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유, 상징, 기호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문학을 비롯해 창작물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위 그림(어머니 지구와 가이아 행성)은 너무 불쾌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 그림이 여자를 생체 인큐베이터라고 취급한다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생체 인큐베이터가 올바른 해석인가요, 아니면 그저 황금 열쇠에 불과한가요? 듀나님이 로켓 라쿤에게 전형적인 백인 남자를 대입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위 그림에 생체 인큐베이터를 대입할 수 있나요? 만약 이런 해석이 그저 황금 열쇠에 불과하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성 폭력들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그저 단순한 황금 열쇠에 불과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위 그림을 너무 불쾌하게 여긴다고 해도, 오히려 이런 사람들은 가부장 제도에 찬성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부장 제도임에도, 사람들은 오직 가이아 행성 그림에만 반대하고 가부장 제도에 찬성할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 구조보다 오직 문화적인 측면만 비난합니다. 문화적인 측면보다 사회 구조가 훨씬 근본적임에도, 많은 사람들은 사회 구조보다 문화적인 측면에 몰두합니다. 하지만 문화적인 측면은 다양한 해석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어떤 단편 소설에서 반다나 싱은 풍성한 삼림을 '녹색 자궁'이라고 표현했으나, 이게 정말 가부장적인 편견, 가부장적인 표현인가요?



다양한 해석들은 갈등하고, 충돌하고, 대립하고,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문학 해석들이 진절머리가 난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문학이 비유가 되기 때문에, 다른 많은 학문 분야들보다 문학은 매력적일지 모릅니다. 마스다 미리 일상 만화가 스페이스 오페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처럼, 문학을 비롯해 창작물들은 아주 풍성하고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저 반짝이는 별들로부터>는 매력적일지 모릅니다.



※ 그림 <Mother Earth> 출처: Kanza,

https://www.deviantart.com/kanza/art/Mother-Earth-92585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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