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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어스텅>, 외계 자연과 픽셀 그래픽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어스텅>, 외계 자연과 픽셀 그래픽

OneTiger 2020. 1. 24. 16:15

※ 이 게시글에는 필립 딕이 쓴 <사기꾼 로봇>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연이 웅장하다고 표현하나, 단순한 픽셀 그래픽과 그뤠잇 아웃도어가 어울리나요?]

 

 

만약 하나의 세계가 폭발한다면, 이건 아주 거대한 이야기가 될 겁니다. 만약 행성이 폭발한다면, 아무도 이걸 작은 사건이라고 부르지 않을 겁니다. 영화 <스타 워즈: 새로운 희망>에서 데스 스타가 행성 하나를 날려버렸을 때, 오비완 케노비는 충격을 받았고 휘청거렸습니다. 만약 행성이 폭발한다면, 이건 엄청난 사건이 될 겁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이야기가 이런 엄청난 사건을 묘사하기 원한다면, 이야기 형식 역시 엄청나야 할 겁니다. 만약 내용과 형식이 일치해야 한다면, 엄청난 내용은 엄청난 형식에 기반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필립 딕이 쓴 <사기꾼 로봇>에서 형식은 별로 엄청나지 않습니다.

 

<사기꾼 로봇>은 단편 소설이고, 문자 그대로 분량은 짧습니다. <사기꾼 로봇>은 행성이 폭발한다고 이야기하나, 행성 폭발이라는 거창한 내용과 달리, 단편 소설 형식은 별로 거창하지 않습니다. 형식은 아주 짧습니다. 이게 이상하지 않나요? 내용과 형식은 일치하거나 적어도 비슷해야 합니다. 내용처럼, 형식은 중요합니다. 형식이 중요하고, 내용과 형식이 비슷해야 함에도, <사기꾼 로봇>은 거창한 내용과 간단한 형식을 보여줍니다. 거창한 내용은 짧은 형식에 기반합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쓴 <덧없는 존재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중편 소설은 생명/인류 진화 역사를 고찰합니다.

 

 

<덧없는 존재감>은 아주 장대합니다. 이 중편 소설은 생명 진화 역사를 아주 장대하게 회고합니다. 하지만 <덧없는 존재감>은 중편 소설이고, 중편 소설 형식은 아주 장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편 소설 형식은 짤막합니다. 이 중편 소설은 거창하고 암울하고 비장한 형식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덧없는 존재감>은 서사시가 아닙니다. 알프레드 테니슨이 쓴 비장한 시는 장대한 역사를 노래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덧없는 존재감>은 장대한 역사를 회고하기 위한 서사시가 아닙니다. 만약 내용과 형식이 일치해야 한다면, <덧없는 존재감>은 장엄한 서사시 형식에 기반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덧없는 존재감>이 장엄한 서사시 형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SF 독자들이 시(詩) 종류들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덧없는 존재감>을 서사시 형식으로 분류하지 않을 겁니다. 전문적인 문학 평론가들 역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서사시를 썼다고 분류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이게 오류인가요? 생명 진화 역사라는 장대한 내용이 서사시 형식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중편 소설' <덧없는 존재감>이 오류가 되나요? '단편 소설' <사기꾼 로봇>은? 행성 폭발이라는 거창한 내용이 단편 소설이라는 간단한 형식에 기반하기 때문에, <사기꾼 로봇>이 오류가 되나요?

 

 

비단 분량만 아니라 다른 형식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드 보일드 작가가 존댓말로 범죄 소설을 쓴다면, 독자는 내용과 형식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 깡패는 상대 조직 부두목을 사시미로 신나게 찔렀답니다." 이런 말투는 하드 보일드 소설보다 동화에 어울립니다. 이런 폭력적인 내용은 "찔렀답니다." 같은 존댓말보다 "찔렀다." 같은 반말에 어울립니다. 하드 보일드 독자는 성인입니다. 성인으로서 하드 보일드 독자는 폭력적인 내용을 읽습니다. 이미 독자가 성인이기 때문에, 작가는 독자를 특별히 우대하지 않습니다. 성인과 성인으로서 작가는 반말을 냉정하게 늘어놓고 독자는 반말을 읽습니다.

 

존댓말은 존중, 배려, 이해를 나타냅니다. 이반 예프레모프가 쓴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대부분 등장인물들은 존댓말을 사용합니다. 이상적인 공산주의 문명에서 다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선 선장 역시 다른 승무원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합니다. 공산주의 우주선은 가부장적이지 않습니다. 남자 우주선 선장은 여자 승무원에게 반말을 지껄이지 않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쓴 <덧없는 존재감>과 달리, (공산주의가 돌봄 노동을 인정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우주선은 가부장 문화를 멀리 쫓아냅니다. 공산주의 우주선에서 존댓말은 존중, 배려, 이해입니다. 이건 하드 보일드 소설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드 보일드 소설은 반말을 써야 합니다. 만약 하드 보일드 소설이 존댓말들을 화사하게 늘어놓는다면, 독자는 내용과 형식이 어긋난다고 느낄 겁니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이 어울려야 하기 때문에, <사기꾼 로봇>과 <덧없는 존재감>은 오류를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두 이야기에서 거창한 내용과 거창하지 않은 형식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행성 하나가 폭발한다고 해도, 이게 거창한 내용이 반드시 되어야 하나요? 왜 행성 폭발이 거창한 내용이 반드시 되나요? 현실은 고단하고 힘겹습니다. 도시 생활은 혼란스럽고 너무 복잡합니다. 단편 소설 시점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이런 현실이 날아간다고 해도, 이건 별로 아쉽지 않습니다.

 

현실이 고단하고 힘겹기 때문에, 도시 생활이 혼란스럽고 복잡하기 때문에, 행성 하나가 날아간다고 해도, 이건 거창한 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사기꾼 로봇>은 단편 소설이고, 창작물로서 <사기꾼 로봇>은 도시 생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단편 소설 시점은 냉정합니다. 소설 주인공이 위기에 빠짐에도, 단편 소설 시점은 그걸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단편 소설 시점은 소설 주인공을 동정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기꾼 로봇>에서 행성 폭발은 거창한 사건이 아닙니다. '중편 소설' <덧없는 존재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편 소설 시점은 사건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우주선 내부를 흐르는 가부장적인 분위기는 별로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사건(행성 폭발, 인류 진화)을 바라보는 시점이 거창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 형식이 거창하지 않다고 해도, 이건 오류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하드 보일드 작가가 존댓말들을 늘어놓는다면, 이건 오류인지 모릅니다. 하드 보일드 소설의 "행복하게 사시미를 찔렀답니다."와 달리, <사기꾼 로봇>에서 행성 폭발과 짧은 분량은 오류가 아닙니다. 게다가 창작물에서 내용이 형식을 따라야 하나요? 아니면 형식이 내용을 따라야 하나요? 내용과 형식이 반드시 일치해야 하나요? 만약 어떤 시가 권태를 노래한다면, 이 시의 형식이 반드시 지루해야 하나요? 만약 어떤 산문이 게으름을 찬양한다면, 산문 형식이 게을러야 하나요?

 

여러 철학자들과 평론가들은 형식과 내용이 비슷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건 형식과 내용이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형식은 중요합니다. 대실 해밋은 동화 같은 말투로 하드 보일드 소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상이 쓴 <오감도>는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일상적이지 않습니다. 이 문장에는 띄어쓰기가 없습니다. 독자가 이 문장을 읽을 때, 독자는 이 문장을 당장 소화하지 않을 겁니다. "어라, 왜 이 시가 맞춤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지? <SF 생태주의>가 오타 천국인 것처럼, <오감도>가 오타 천국인가?" 독자는 물을 겁니다. <오감도>는 불안, 공포, 소외, 혼란을 조성합니다.

 

 

이상이 쓴 소설 <날개>에서 소설 주인공은 엄청난 혼란을 겪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불안, 공포, 소외, 혼란을 드러냅니다. 만약 소설 <날개>처럼, 시 <오감도>가 불안, 공포, 소외, 혼란을 표현하기 원한다면,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라는 형식은 불안이라는 감성에 어울릴 겁니다. 독자는 이 문장을 당장 해석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이 문장이 낯설다고 느낄 겁니다. 만약 독자가 해석하지 못하는 문장들이 계속 늘어난다면, 독자는 불안하다고 느끼고 어지럽다고 느낄 겁니다. 시 <오감도>는 편안하고 빠르고 가벼운 소비 문화에 저항합니다. 이 시는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형식은 내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권태를 노래하는 시가 권태로운 형식을 취한다면, 평론가들은 이 시를 별로 좋게 평가하지 않을 겁니다. 시가 권태를 노래한다고 해도, 시는 권태를 아름답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시가 죽음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시는 죽음을 냉정하게 바라보거나 비웃거나 칭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시의 시점이 죽음을 칭찬한다면, 형식은 발랄하고 가벼울 수 있습니다. 모든 시는 똑같은 시점으로 권태나 죽음을 파악하지 않습니다. 시에게는 여러 시점들이 있고, 여러 시점들은 다른 형식들로 이어집니다. 시가 권태를 노래한다고 해도, 시 형식이 권태로워질 이유는 없습니다. "궈어어어어어언태애애애애애애느으으으으은 나아아아아쁘으으으으지이이이이 안아아아아아나아아아아요오오오오오." 이렇게 구태여 쓸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어떤 시가 성 소수자들을 노래한다면, 이 시가 홀수 연(聯)을 고집해야 하나요? 여자와 남자 이외에 다른 성별들이 존재한다고 가리키기 위해 이 시가 홀수 연에 기반해야 하나요? 만약 이 시가 짝수 연 형식에 기반한다면, 짝수가 2를 깔끔하게 나누기 때문에, 짝수 행은 오직 양성(兩性)에만 어울릴지 모릅니다. 여자와 남자는 짝수입니다. 성 소수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성 이외에 다른 성별들을 가리키기 위해 이 시는 홀수 연 형식에 반드시 기반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여자와 남자의 사랑을 노래하기 위해 시는 짝수 연에 기반할 수 있으나, 성 소수자들을 노래하기 위해 시는 홀수 형식에 기반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성 소수자들을 노래하기 위한 시가 홀수 연 형식에 반드시 기반해야 한다면, 이건 이른바 '모방의 오류'일 겁니다. 형식이 내용을 반드시 모방해야 한다면, 이건 오류가 될 겁니다. 소재가 권태라고 해도, 시의 시점은 권태를 아름답게 찬양할 수 있고, 시의 형식 역시 우아하고 발랄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것처럼, SF 소설에서도 형식과 내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많은 SF 소설들은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SF 소설들은 과거 시제를 서술하거나 적어도 현재 (진행형) 시제를 서술합니다. 아무리 SF 소설들이 미래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SF 소설들은 미래 시제를 서술하지 못합니다.

 

 

"2545년에 개척 생태학자 수진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탑승했다." 이렇게 SF 소설은 서술합니다. 아니면 SF 소설은 "2545년에 개척 생태학자 수진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탑승한다."고 서술합니다. SF 소설은 "2545년에 개척 생태학자 수진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탑승할 터이다."라고 서술하지 않습니다. SF 소설이 미래 시제를 서술한다고 해도, 미래 시제는 주된 서술이 되지 않습니다. 주된 서술은 과거 시제(~했다)와 현재 시제(~한다)입니다. 생체 우주선 항해가 미래 사건이라고 해도, 소설 시점은 과거를 바라봅니다. 소설이라는 매체는 과거를 추구하고, 소설 시점 역시 과거를 바라봅니다. 작가는 과거에 벌어진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그래서 SF 소설이 미래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항해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SF 소설은 과거 시제를 서술합니다. SF 소설에서 내용과 형식은 일치하지 않는 것 같으나, 형식은 소재보다 소설 시점을 따릅니다. 그래서 미래 생체 우주선 항해라는 내용(소재)은 과거 시제라는 형식을 입습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여러 창작물들에서 내용과 형식은 일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비디오 게임 <어스텅>은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비디오 게임 <압주> 역시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어스텅>과 <압주>는 완전히 다릅니다. <어스텅>은 단순한 픽셀 그림체를 보여주나, <압주>는 압도적이고 환상적인 그래픽을 자랑하고 엄청난 생물 다양성을 묘사합니다.

 

 

흔히 우리는 자연을 大自然이라고 부릅니다. <압주>의 압도적이고 환상적인 그래픽은 대자연에 어울립니다. 반면, <어스텅>의 단순한 픽셀 그림체는 대자연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어스텅>은 외계 자연을 묘사합니다. 외계 자연은 신비로워야 하나, 단순한 그래픽은 신비롭지 않습니다. <어스텅>에서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어스텅>은 자연 생태계가 재미있는 퍼즐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퍼즐들과 달리, 자연 생태계는 스스로 번성하고 조절합니다. 그래서 자연 생태계는 일반적인 퍼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게임 시점은 자연 생태계가 퍼즐이라고 표현합니다.

 

자연을 퍼즐이라고 표현하기 위해 <어스텅>은 외계 풍경을 도입합니다. 이 게임에서 신비로움보다 퍼즐 맞추기를 위해 외계 풍경은 존재합니다. 다른 많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게임 플레이어가 작은 신이라고 간주하는 것처럼, <어스텅>에서 작은 신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 생태계를 바라봅니다. 작은 신에게 자연 생태계는 웅장한 상호 작용보다 퍼즐 맞추기에 가깝습니다. 외계 행성은 퍼즐 맞추기를 위한 도화지입니다. <어스텅>에서 주된 사건은 (생태계) 퍼즐 맞추기이고, 단순한 픽셀 그림체는 재미있는 퍼즐과 잘 어울립니다. 그래서 <어스텅>에서 내용과 형식은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창작물들은 형식들과 내용들을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습니다. 창작물이 형식을 고민할 때, 소재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자연이 웅장하기 때문에,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 창작물은 웅장한 형식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재처럼, 소재를 바라보는 시점 역시 중요합니다. 이런 시점은 형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 게임 <어스텅> 스크린샷 출처: genEnemy Games,

https://www.youtube.com/watch?v=dk-7q41JB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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