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엔드존>과 자본주의 환경 아포칼립스 본문
"나는 어슐라 르 귄을 읽는 중이야." 아니, 이게 무슨 뜻인가요? '읽다'라는 동사는 글자들을 뒷받침합니다. 사람들이 글자들을 보고 해석할 때, 이건 읽기가 됩니다. 소설이 글자 매체이기 때문에, 만약 사람들이 소설을 보고 해석한다면, 이건 소설 읽기가 될 겁니다. 반면, 어슐라 르 귄은 소설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어슐라 르 귄을 읽을 수 있나요? 만약 사람들이 어슐라 르 귄을 읽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닐 게이먼이나 옥타비아 버틀러나 퍼트리샤 콘웰을 '읽을' 수 있나요? 사람들이 궁예가 되고, 관심법을 발휘하고, 퍼트리샤 콘웰을 읽을 수 있나요? 이건 그 뜻이 아닙니다.
"나는 어슐라 르 귄을 읽는 중이야." 이건 사람들이 관심법에 통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슐라 르 귄은 소설이 아니나, 어슐라 르 귄은 소설 작가입니다. 어슐라 르 귄은 <어둠의 왼손>과 <빼앗긴 자들>과 <로캐넌의 세계>와 <어스시의 마법사>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비롯해 여러 장편/단편 소설들을 썼습니다. 어슐라 르 귄이 여러 장편/단편 소설들을 썼기 때문에, '어슐라 르 귄'이라는 단어는 비단 인간 어슐라 르 귄만 아니라 어슐라 르 귄 소설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나는 어슐라 르 귄을 읽는 중이야." 이 문장은 독자가 어슐라 르 귄 '소설'들을 읽는다는 뜻입니다.
독자는 <빼앗긴 자들>과 <로캐넌의 세계>와 <어스시의 마법사>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어슐라 르 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비단 인간 르 귄만 아니라 르 귄 소설들을 가리킵니다. 닐 게이먼과 옥타비아 버틀러와 퍼트리샤 콘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 사람들은 소설 작가들입니다. 어슐라 르 귄처럼, 닐 게이먼과 옥타비아 버틀러와 퍼트리샤 콘웰은 여러 소설들을 썼습니다. 퍼트리샤 콘웰은 비단 인간 퍼트리샤 콘웰만 아니라 퍼트리샤 콘웰 소설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왜 소설 작가 이름이 소설들을 가리키나요? 소설이 고유한 작품(work)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작가는 소설에게 고유한 색깔을 집어넣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자신의 색깔을 <어둠의 왼손>에게 집어넣습니다. 소설 <어둠의 왼손>은 소설 작가 어슐라 르 귄의 고유한 색깔을 포함합니다. 어슐라 르 귄이 쓰기 전에, 소설 <어둠의 왼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심지어 다른 소설 작가들조차 <어둠의 왼손>을 쓰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슐라 르 귄의 색깔을 집어넣지 못합니다. 오직 어슐라 르 귄만 자신의 색깔을 소설에게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작가에게 종속됩니다. 작가가 쓰기 전에, 소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둠의 왼손>은 어슐라 르 귄에게 종속됩니다.
소설이 작가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소설 작가 이름은 소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어스시의 마법사>를 가리킬 수 있고, 닐 게이먼은 <스타더스트>를 가리킬 수 있고, 옥타비아 버틀러는 <쇼리>를 가리킬 수 있고, 퍼트리샤 콘웰은 <흑색 수배>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비단 소설 작가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작가가 작품(work)을 만든다면, 작가 이름을 작품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가리킬 수 있고,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국가와 혁명>을 가리킬 수 있고,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의 축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비단 산문, 글자 매체만 아니라 다른 매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대항해 시대 2> 배경 음악들을 듣는 중이야."와 "나는 칸노 요코를 듣는 중이야."는 비슷한 뜻입니다. 칸노 요코는 인간입니다. 칸노 요코는 배경 음악이 아닙니다. 하지만 칸노 요코가 <대항해 시대 2> 배경 음악들을 작곡했기 때문에, 이 음악들이 작품이기 때문에, 칸노 요코가 자신의 색깔을 이 음악들에게 집어넣었기 때문에, 칸노 요코가 작곡하기 전에, 이 음악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칸노 요코를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칸노 요코는 인간 개체보다 배경 음악 <Close To Home>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작품이 작가에게 종속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작가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작품과 작가는 일치합니다. 작가에게서 작품은 독립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작품이고, 작품은 작가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 작가 의도는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가요? 정말 작품이 작가에게 종속되나요? 아니, 여러 소설 작가들은 고개들을 젓고 부정합니다. 여러 소설 작가들은 소설이 출판되는 순간 작가에게서 소설이 독립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보수적인 문학 평론가들조차 소설이 독립한다고 주장합니다. 분명히 작가 의도는 중요하나, 작가와 작품은 별개입니다.
어슐라 르 귄이 쓰기 전에, <어둠의 왼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쓰기 전에, <자본의 축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칸노 요코가 작곡하기 전에, <Close To Home>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설 독자가 <어둠의 왼손>을 읽는 동안, 어슐라 르 귄 의도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칸노 요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어슐라 르 귄과 <어둠의 왼손>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슐라 르 귄이 소설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어슐라 르 귄은 소설 <어둠의 왼손>을 씁니다. 현실에서 어슐라 르 귄은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둠의 왼손>은 SF 소설입니다. SF 소설로서 <어둠의 왼손>은 비(非)현실 세계(헤인 우주)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둠의 왼손>이 비현실 세계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결국 현실에서 어슐라 르 귄은 <어둠의 왼손>을 씁니다. <어둠의 왼손>은 미국 영어를 동원합니다. 어슐라 르 귄이 미국 영어를 직접 만들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어슐라 르 귄이 <어둠의 왼손>을 쓰기 전에, 이미 미국 영어는 존재했습니다. 심지어 어슐라 르 귄이 태어나기 전에, 미국 영어는 존재했습니다. 이미 미국 자본주의, 미국 자유 민주주의, 미국 개척 문화, 끔찍한 인디언 학살, 공유지 파괴는 존재했습니다.
이 현실 속에서 어슐라 르 귄은 태어났고, 자랐고, 세계관을 형성했고, SF 소설을 썼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소설을 썼으나, 아무리 이 소설이 비현실 세계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결국 현실 속에서 어슐라 르 귄은 SF 소설을 썼습니다. <어둠의 왼손>은 어슐라 르 귄 의도를 포함하나, 현실 속에서 어슐라 르 귄이 SF 소설을 썼기 때문에, <어둠의 왼손>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어슐라 르 귄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고, <어둠의 왼손>이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어둠의 왼손>에서 작가 의도는 전부가 아닙니다. 비단 <어둠의 왼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가와 작품은 별개입니다.
작가와 작품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건 두 가지 의미를 가리킵니다. 첫째, 아무리 작가가 뭔가를 의도한다고 해도, 이건 작품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둘째, 비록 작가가 뭔가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작품은 그것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폴 드 만은 해체주의 문학 이론을 주장했습니다. 자크 데리다와 함께 폴 드 만 해체 이론은 커다란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른바 '드 만 사건' 때문에, 해체 이론은 심각한 위기에 부딪힙니다. 폴 드 만은 파쇼주의를 찬양한 적이 있습니다. 폴 드 만은 이것을 은폐하기 원한 것 같으나, 이제 많은 문학인들은 폴 드 만이 파쇼주의 앞잡이라고 간주합니다.
파쇼주의와 에즈라 파운드가 떨어지지 못하는 것처럼, 파쇼주의와 폴 드 만은 떨어지지 못합니다. 많은 문학인들은 파쇼주의가 해체 이론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고 해체 이론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파쇼주의가 해체 이론에게 영향을 미쳤나요? 아무리 폴 드 만이 나치 앞잡이라고 해도, 작가와 작품이 별개이기 때문에, 폴 드 만과 해체 이론은 별개이고, 파쇼주의는 해체 이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평론가는 해체 이론이 모든 것을 해체하기 때문에 결국 해체 이론이 해체 이론 그 자체를 해체할지 모른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이것과 파쇼주의는 아무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개차반 인성이었습니다. 비록 카를 마르크스가 개차반 인성이라고 해도, 개차반 인성과 <공산당 선언>은 별개입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자유 분방한 영혼이었습니다. 아무리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유 분방한 영혼이라고 해도, 자유로운 영혼과 <공산당 선언>은 별개입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 신화를 썼습니다. 크툴루 신화는 SF, 판타지, 공포 소설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SF, 판타지, 공포 장르에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합니다. 동시에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인종 차별론자였습니다. 그래서 크툴루 신화 그 자체가 인종 차별인가요?
던전 탐험 비디오 게임 <다키스트 던전>은 크툴루 신화를 인용합니다. 그래서 이 게임이 인종 차별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작품과 작가가 별개이기 때문에, <다키스트 던전>은 인종 차별이 아닙니다. 크툴루 신화 그 자체는 인종 차별이 되지 않습니다. <레드 훅의 공포>에서 작가 의도는 중요하고, 작가 의도는 인종 차별을 포함하나, 인종 차별보다 크툴루 신화는 훨씬 폭넓은 것을 가리킵니다. 분명히 SF 팬들은 인종 차별을 비판해야 하나, 만약 SF 팬들이 크툴루 신화 그 자체를 거부한다면, 이건 과잉 해석일 겁니다. 비단 문학 이론과 SF 소설만 아니라 가요 역시 가수와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종종 가수들은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저지릅니다. 특히, 아이돌 그룹들이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저지를 때, 이건 훨씬 커다란 화제가 됩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많은 팬들에게 아이돌 그룹들은 우상(idol)입니다. 많은 팬들이 우상을 추종하기 때문에, 우상은 모범을 보여야 하나, 예능 돈벌이 상품에서 아이돌 그룹들은 벗어나지 못하고, 어떤 아이돌 그룹들은 불미스러운 사건들에 휘말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아이돌 그룹들은 사랑스럽고 멋진 모습들을 보여주나, 이것들은 그저 기만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어떤 사랑스러운 아이돌 그룹 멤버는 추악한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아이돌 그룹 멤버가 추악한 짓거리를 저질렀다고 해도, 이 아이돌 멤버와 이 아이돌 그룹의 노래/무대 공연은 별개입니다. 비록 아이돌 멤버가 추악한 짓거리를 저질렀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 그룹의 노래와 안무와 무대 공연을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문학 평론가가 에즈라 파운드 시들을 읽기 원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아이돌 팬들은 이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듣기 원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 에즈라 파운드와 작품 <지하철 정거장에서>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문학 평론가는 <지하철 정거장에서>를 읽고, 시구들을 분석하고, 이미지 이론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작가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문학와 가요가 다르기 때문에, 가요는 작가의 죽음 이론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나, 작가가 소설을 혼자 완성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수는 노래를 혼자 완성하지 못합니다. 작가와 독자가 소설을 함께 완성하는 것처럼, 가수와 청중은 노래를 함께 완성합니다. 노래는 가수에게 완전히 종속되지 않고, 문학 평론가가 <지하철 정거장에서>를 분석하는 것처럼, 아이돌 팬들은 가수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반대 상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2019년 3월 27일 게시글(링크)은 뮤직 비디오 <오늘부터 1일>을 설명했습니다. 노래 <오늘부터 1일>과 케이윌과 뮤직 비디오 <오늘부터 1일>이 완전히 일치하나요?
아니, 비록 뮤직 비디오 <오늘부터 1일>이 멍청한 인종 차별이라고 해도, 이건 가수 케이윌과 노래 <오늘부터 1일>이 인종 차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김혜순 시인은 <피어라 돼지>를 썼습니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이렇게 <피어라 돼지>는 강렬한 말투들을 동원하고 구제역 사태를 비판합니다. 구제역 사태를 비롯해 여러 동물 전염병 사태는 산업 자본주의에게 기반합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목축업을 산업화합니다. 막대한 이윤을 얻기 위해 산업 자본주의는 대량 생산해야 하고, 가축들 역시 대량 생산 구조에 들어갑니다. 좁은 공간에서 가축들이 몰리기 때문에, 이 상황은 심각한 전염병 사태를 유발할지 모릅니다.
여러 환경 전문가들은 대량 생산 축산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거대 자본가 계급은 이것을 고집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높은 이윤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높은 이윤은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비록 동물 전염병 사태가 퍼진다고 해도, 오직 높은 이윤만 중요합니다. 비단 동물 전염병만 아니라 다른 환경 오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유 시장 경제는 자유 무역을 선호합니다. 수많은 무역선들이 돌아다니는 동안, 무역선들은 수많은 생명체들을 사방팔방으로 퍼뜨리고, 이것들은 자연 생태계들을 교란합니다. 생태계 교란을 막기 위해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이것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본가 계급에게 오직 높은 이윤만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리 자유 시장 경제가 생물 다양성을 교란한다고 해도, 자본가 계급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오직 이윤 극대화만 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직 상품만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상품화를 위해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야생 동물들 역시 상품이 됩니다. 사람들은 야생 동물들을 상품화하고 야생 동물들을 함부로 거래합니다. 이건 치명적인 전염병 사태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거대 자본가 계급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오직 높은 이윤만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입니다.
그래서 김혜순 시인이 산업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만약 독자가 김혜순 시인에게 묻는다면, 독자는 대답을 들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독자가 김혜순 시인에게 묻지 못한다면, 독자는 스스로 해석해야 합니다. 비단 김혜순 시인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은 작가들을 직접 만나지 못하고 작가들에게 직접 묻지 못합니다. 심지어 이미 작가들은 고인이거나 작가들은 독자들의 열린 해석들을 원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독자는 스스로 해석합니다. <피어라 돼지>는 자본주의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김혜순 시인은 자본주의를 인식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김혜순 시인이 자본주의 범죄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작가와 작품이 별개이기 때문에, 김혜순 시인과 <피어라 돼지>는 별개입니다. 비록 <피어라 돼지>가 자본주의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시가 구제역 사태를 강렬하게 비판하기 때문에, 독자는 이 시를 읽고 산업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이라고 고민할 수 있습니다. <피어라 돼지> 속의 세계에서 환경 오염으로서 산업 자본주의는 존재합니다. 비록 김혜순 시인이 자본주의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시의 세계 속에서 산업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입니다. 현실 속에서 김혜순 시인이 <피어라 돼지>를 쓰기 때문입니다.
김혜순 시인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하고, 그래서 김혜순 시인과 <피어라 돼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 <엔드존 Endzone - A World Apart>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엔드존>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2021년, 핵 발전소 테러들은 세계를 혼돈에 빠뜨렸고, 인류는 지하에 숨었습니다. 150년 이후, 인류는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하지만 다시 문명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염된 세계에서 새로운 도시는 살아남아야 하고, 생존자들은 방사선, 독성 소나기, 모래 폭풍, 가뭄에 대비해야 합니다. <엔드존>은 오염된 자연을 제시합니다. 이건 산업 자본주의 환경 오염입니다.
환경 운동가들은 핵 발전소들에 반대합니다. 만약 핵 발전소들이 사라졌다면, 테러리스트들은 핵 발전소들을 공격하지 못했을 테고, 자연 환경은 오염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윤 극대화를 위해 자본가 계급은 핵 발전소들을 폐쇄하지 않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핵 발전소들을 폐쇄하지 않고, 테러리스트들이 핵 발전소들을 공격하기 때문에, 자연 환경은 오염됩니다. 그래서 이건 자본주의 환경 오염입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핵 발전소들에 반대하는 것처럼, 비록 테러리스트들이 핵 발전소들을 공격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핵 발전소들, 핵 폐기물들은 환경 오염입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폭력이라고 주장하나, 오히려 공산주의 지역 러시아보다 자유 민주주의 서구 지역에서 폴 드 만과 에즈라 파운드 같은 파쇼주의 앞잡이들은 비롯했습니다. 파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폭력적인 모순으로서 자본주의는 파쇼주의를 유발합니다. 만약 평론가가 폴 드 만을 까기 원한다면, 평론가는 해체 이론과 파쇼주의보다 자본주의와 파쇼주의를 연결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폭력적인 모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비단 전쟁 범죄자일 뿐만 아니라 환경 오염 범죄자입니다. 현실에서 세계화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행성급 환경 오염을 저지릅니다.
어쩌면 게임 제작자들은 이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게임 제작자들은 그 자체로서 산업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게임 제작자들은 산업 자본주의가 최고라고 자본주의 만만세를 외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 제작자들을 필연적으로 따라가나요? 그건 아닙니다. 작가와 작품이 별개이기 때문에, 폴 드 만과 해체 이론이 별개인 것처럼, 김혜순 시인과 <피어라 돼지>가 별개인 것처럼, 게임 제작자들과 <엔드존>은 별개일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산업 자본주의가 환경 아포칼립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