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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여름으로 가는 문>은 하인라인이 아니다 본문

SF & 판타지/또 다른 시간 속으로

<여름으로 가는 문>은 하인라인이 아니다

OneTiger 2019. 3. 27. 18:05

소설 <여름으로 가는 문>은 유쾌하고, 아기자기하고, 치밀합니다. 시간 여행 이야기로서 <여름으로 가는 문>은 시대적인 격차를 이용해 놀라운 이야기를 선사합니다. 수많은 시간 여행 이야기들에서 시대적인 격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간 여행자가 다른 시대로 이동한다면, 시간 여행자는 다른 역사에 개입하거나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여름으로 가는 문>에서 이런 요소는 훨씬 특별합니다. 소설 주인공 시간 여행자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기 때문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사면초가에 빠지고, 빠져나가기 위한 구석은 없습니다.


소설 주인공에게 절체절명은 그저 사자성어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 여행은 판도를 단번에 뒤집기 위한 기회가 됩니다. 소설 주인공은 시간 여행으로 절체절명을 전화위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시대가 절체절명을 전화위복으로 만드는 순간, 소설 주인공은 판도를 바꾸고 짜릿하게 복수할 수 있습니다.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구태여 증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복수는 언제나 짜릿합니다. 게다가 <여름으로 가는 문>에는 비단 시간 여행만 있지 않습니다. 시간 여행 이야기에서 설레는 연애는 빠지지 못합니다.



연인은 서로 수렴하고 싶어합니다. 연인은 언제나 서로 함께 하기 바랍니다. "저기, 라면 먹고 갈래요?" 이 유명한 대사를 말했을 때, 여자는 정말 남자가 라면을 먹을지 알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자신과 좀 더 함께 있어달라고 간접적으로 권유했습니다. 심지어 이건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원래 이 대사는 "라면, 먹을래요?"이나, 형식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작은 기표(형식)는 기의(내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연인들은 이런 대화들을 나눌지 모릅니다. 라면은 커피가 되거나 아이스 크림이 되거나 팥빙수가 되거나 다른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나가 쓴 <사랑의 힘>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묻습니다. "우리 여기 편의점에서, 커피 마시고 갈까요?" 이건 구실입니다. 여자는 편의점 커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헤어지기 싫은데, 나랑 5분만 더 같이 있어줄래요?" 여자의 본심은 이겁니다.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하기 위해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 편의점 커피를 감수합니다. '사랑의 힘'은 시큼한 편의점 커피를 얼마든지 최고의 탄자니아 피베리로 만들 수 있어요.


이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의점 커피를 감수하면서) 연인은 서로 함께 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시간 여행은 연인을 가릅니다. 시간 여행 이야기에서 연인은 서로 다른 역사에 속하고, 연인에게 이건 꽤나 암담한 시련입니다. 그래서 시간 여행 이야기에서 연애는 훨씬 감동적이고 두근거릴 수 있습니다. <여름으로 가는 문> 역시 이걸 놓치지 않습니다. 꼬마 아가씨 리키의 대사는 최고의 명대사인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런 연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남성 판타지입니다. 나이들고 허름한 남자와 오직 그 남자만 따르는 어리고 귀여운 아가씨. 소설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역시 비슷한 연애 구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은 그저 가능성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반면, <여름으로 가는 문>은 훨씬 더합니다. 심지어 소설 <키다리 아저씨>조차 여기에 비하지 못할 겁니다. 많은 독자들은 로버트 하인라인이 로리콘이라고 장난스럽게 놀리나, 어떤 독자들은 이런 연애 구도가 불편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독자들은 로버트 하인라인이 로리콘이라고 단정하지 못합니다.


<여름으로 가는 문>은 그저 시간 여행 이야기일 뿐입니다. 가부장 깡패 험버트 험버트씨와 달리, <여름으로 가는 문>에서 소설 주인공은 꼬마 아가씨 리키에게 크게 의지합니다. 이게 남성 판타지라고 해도, 여기에는 극심한 억압과 폭력이 없습니다. 여러 소설들에서 로버트 하인라인은 자유분방한 연애를 가장해 남자들에게 치우친 연애를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것들은 험버트 험버트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것보다 진짜 문제는 다른 것일지 모릅니다. 진짜 문제는 로버트 하인라인이 제국주의 침략에 찬성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름으로 가는 문>은 알콩달콩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로버트 하인라인은 별로 알콩달콩한 작가가 아닙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서구 제국주의에 찬성합니다.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했을 때, 로버트 하인라인은 침략에 찬성했습니다. SF 컨벤션에서 로버트 하인라인은 공공연하게 서구 제국주의에 찬성했고, SF 독자들에게 하인라인은 커다란 야유들을 들어야 했습니다. 소설 <여름으로 가는 문>은 두근거리고 풋풋한 연애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건 폭력적인 제국주의자의 소설입니다. 이건 커다란 모순입니다. 독자가 이걸 받아들여야 하나요? 서구 제국주의가 나쁘기 때문에, 독자가 <여름으로 가는 문>을 버려야 하나요? 서구 제국주의가 나쁨에도, 독자가 <여름으로 가는 문>을 두근거리며 읽을 수 있나요?


사실 많은 독자들은 이런 모순에 부딪힙니다. <셜록 홈즈> 독자들 중에는 여자 독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코난 도일은 전형적인 수구 꼴통이었습니다. 코난 도일은 여자 참정 권리에 반대했습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노골적으로 서구 제국주의에 찬성합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는 아이린 애들러를 비롯해 몇몇 똑똑한 여자가 있으나, 셜록 홈즈는 여자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여자들을 억압했음에도,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은 그걸 비판하지 않습니다. 여자 독자들은 이게 불편하다고 느낄 겁니다. 그래서 낸시 스프링어는 <에놀라 홈즈> 시리즈를 썼을 겁니다.



노르웨이 소설가 크누트 함순은 <굶주림>을 썼고 커다란 명성을 누렸습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크누트 함순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에 비교합니다. 크누트 함순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나치 군대가 노르웨이를 침략했을 때, 크누트 함순은 나치 제국을 지지했습니다. <굶주림>은 멋진 소설이나,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독자들은 크누트 함순이 나치 지지자라는 사실을 되새길 겁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굶주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크누트 함순이 나치를 지지했다고 해도, <굶주림>이 파쇼주의 소설이 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작가와 소설은 다릅니다. 작가는 소설을 쓰나, 작가와 소설은 일심동체가 아닙니다.


심지어 레프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부정한 것처럼, 작가는 소설과 완전히 동떨어질지 모릅니다. 레프 톨스토이는 극단적인 사례이나, 일상에서 작가가 풍기는 느낌과 소설이 풍기는 느낌은 다릅니다. 심지어 작가가 자전적인 소설을 쓴다고 해도, 소설과 작가는 다릅니다. 세계적인 대문호부터 일개 블로거까지, 작가는 소설이 아니고 블로거는 게시글이 아닙니다. 크누트 함순은 <굶주림>과 다릅니다. 만약 <굶주림>이 정말 파쇼주의 소설이라고 해도, 독자들은 (비판적으로) 크누트 함순의 필력과 문체를 읽을 수 있어요.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가 아닙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은 <여름으로 가는 문>이 아닙니다. 독자는 로버트 하인라인을 비판할 수 있으나, 동시에 독자는 <여름으로 가는 문>을 두근거리며 읽을 수 있어요.



가수 케이윌(K.will)은 <오늘부터 1일>을 불렀습니다. <오늘부터 1일>은 두근거리고 설레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뮤직 비디오 역시 두근거리고 설레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관심을 끌기 바라고, 곳곳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갑니다. 도서관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도서관에서 여자가 공부하는 동안, 남자는 책을 들고 여자 주변을 서성거립니다. 여자가 정말 사랑스럽기 때문에, 남자는 미소를 감추지 못합니다. 문제는 남자가 고른 책입니다. 남자는 장 지글러가 쓴 <탐욕의 시대>를 골랐습니다. 장 지글러는 UN 식량 전문가입니다.


UN 식량 전문가로서 장 지글러는 제3세계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둘러보고 분노와 수치를 억누르지 못합니다. 장 지글러는 세계화 자본주의가 숱한 아이들을 굶겨죽인다고 목이 터지도록 질타합니다. <탐욕의 시대>는 절망적이고 암울합니다. 이 책에는 분노와 수치가 있습니다. 흑인 아이들이 굶어죽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분노하고 수치를 느낄 겁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1일> 뮤직 비디오에서 남자는 헤벌레 웃습니다. 흑인 아이들이 굶어죽음에도, 남자는 헤벌레 웃습니다. 왜 연애를 노래하는 뮤직 비디오가 <탐욕의 시대>를 보여주나요? 뮤직 비디오 제작자들이 이 책을 읽지 않았나요? 아무도 이 책을 읽지 않았나요?



어떤 관점에서든 <오늘부터 1일>과 <탐욕의 시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1일>은 달달한 연애를 노래하고, <탐욕의 시대>는 아이들을 굶겨죽이는 세계화 자본주의에 분노합니다. <탐욕의 시대>는 분노하는 사람들이 봉기하고 혁명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달달한 뮤직 비디오 <오늘부터 1일>은 분노하는 <탐욕의 시대>를 보여줍니다. 굶어죽은 흑인 아이들 앞에서 남자는 헤벌레 웃습니다. 남자가 인종 차별론자인가요? 케이윌이 인종 차별론자인가요? "You're my lady. 정말 나 장난 아냐~♪"를 흥얼거리는 케이윌 팬들이 인종 차별론자들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뮤직 비디오 제작자들은 실수로 <탐욕의 시대>를 골랐을 겁니다. 만약 케이윌이 정말 인종 차별론자라고 해도, 노래 <오늘부터 1일>에는 인종 차별 내용이 없습니다. 뮤직 비디오가 실수했다고 해도, 아니면 뮤직 비디오가 의도적으로 흑인을 차별했다고 해도, 이런 사실과 노래 <오늘부터 1일>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케이윌과 노래 <오늘부터 1일>과 뮤직 비디오 <오늘부터 1일>은 서로 독립적입니다. 분명히 케이윌과 노래 <오늘부터 1일>과 뮤직 비디오 <오늘부터 1일>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들이 있고, 똑같은 생산 조건들은 케이윌과 노래 <오늘부터 1일>과 뮤직 비디오 <오늘부터 1일>을 생산했습니다. 하지만 케이윌은 <오늘부터 1일>이 아닙니다.


케이윌은 가수이고, <오늘부터 1일>은 뮤직 비디오입니다. 가수는 뮤직 비디오가 아닙니다. 뮤직 비디오에 헤벌레 웃는 남자와 분노를 터뜨리는 <탐욕의 시대>가 함께 나온다고 해도, 케이윌 팬들은 "내가 뭘 어떡하면 너 내 맘 알겠니~♬"라고 흥얼거릴 수 있습니다. 작가와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버트 하인라인이 베트남 침략을 지지했다고 해도, 독자들은 두근거리며 <여름으로 가는 문>을 읽을 수 있어요.



작가가 소설을 쓰기 때문에, 독자들이 소설을 해석할 때, 많은 독자들은 오직 작가만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작가와 소설이 다르다면, 독자들 역시 작가와 소설을 구분해야 할 겁니다. 심지어 독자는 무명 작가가 쓴 소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SF 독자들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옛날 SF 독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작가는 소설이 아니고, 독자가 오직 작가만을 따라간다면, 그건 오류에 빠질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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