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죽은 과거>를 바라보는 앙겔루스 노부스 본문
※ 이 게시글에는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단편 소설 <죽은 과거>의 치명적인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아직 미래는 오지 않았고, 현재는 흘러가는 중이다. 따라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폴 리쾨르가 쓴 <시간과 이야기>는 이렇게 회의론자가 추론한다고 말합니다. 회의론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회의합니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아직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비단 회의론들만 아니라 수많은 사상들과 문학들은 여기에 동의할 겁니다. 심지어 미래를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와 사이언스 픽션조차 마찬가지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아직 미래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공산주의 사회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누군가가 공산주의 사회를 명확하게 묘사한다면, 이건 오류일 겁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도래한 적이 없습니다. 원시적인 공산주의나 초기적인 사회주의 이외에 공산주의 사회는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미래이고, 아무도 미래로 날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도 공산주의 사회를 겪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공산주의 사회를 겪지 못했음에도, 인간이 공산주의 사회를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나요? 이건 불가능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공산주의 사회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설명(능력에 따른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합니다. 하지만 이건 구제척인 설명이 아닙니다.
SF 작가들은 미래 사회를 묘사하나, SF 작가들은 이게 예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반추하기 위해 SF 소설은 미래를 이용합니다. SF 작가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SF 작가는 미래를 예언하지 못합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와 아주 강력한 관계를 맺습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포함합니다. 어쩌면 인류 문명에서 수많은 철학들, 사상들, 사조들, 문화들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르크스주의와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미래를 함부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미래 속에서 우리는 살지 않습니다. 과거는 어떤가요? 과거는 이미 흘러갔습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과거를 바라보고 현재를 이용해 과거를 해석할 뿐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고문서들을 뒤적이고 사료들을 찾는다고 해도, 우리는 과거에 개입하지 못합니다. 이미 과거는 흘러갔고, 과거는 우리 손을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개입하고 싶다면, 우리는 시간 여행 장치를 만들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 여행 장치를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시간 여행 장치를 만든다고 해도, 시간 여행 장치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폴 앤더슨이 쓴 소설 <영원으로의 비행>처럼, 시간 여행 장치는 반드시 미래로 나가고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과거에 개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과거를 바라볼 뿐입니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과거를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 속에서 우리는 살지 않습니다. 미래 속에서 우리가 살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 속에서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미래와 과거는 모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선택은 현재입니다. 프레센트가 현재와 선물을 모두 가리킨다는 농담처럼, 많은 사람들은 현재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선물처럼, 현재는 소중합니다. 애니메이션 <쿵푸 팬더>에서 우그웨이 사부가 현명하게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는 소중한 현재를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회의론자들은 반박할지 모릅니다. 회의론자들은 현재가 흘러간다고 반박할 겁니다. 현재는 정체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를 바라보기 원하는 순간, 현재는 흘러가고 과거가 됩니다. 현재는 흐르고, 흐르고, 흐르고, 계속 흐릅니다. 그래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물이 계속 흘러가고 고정되지 않은 것처럼, 현재는 과거를 향해 계속 흐릅니다. 우리는 현재를 멈추지 못하고, 현재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현재를 현재라고 인식하는 순간, 이미 현재는 과거가 됩니다.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가 되고, 현재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싶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현재 속에서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현재가 과거가 되는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그저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현재 역시 선택 사항이 되지 못합니다. 미래는 존재하지 않고, 과거는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 현재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이건 망상인지 모릅니다. 회의론자들은 시간이 망상이라고 회의하고 시간을 의심할지 모릅니다.
언뜻 이런 주장은 옳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회의론자들이 옳은가요? 정말 시간이 존재하지 않나요? 어쩌면 소설 <죽은 과거>는 여기에 반박할 수 있을 겁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죽은 과거>는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시간 여행 장치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과거가 아주 폭넓다는 사실입니다. 과거가 무엇인가요? 언제부터 언제까지, 과거가 과거인가요? 우리가 과거라는 시간 스펙트럼을 단절할 수 있나요? 우리가 과거라는 시간 스펙트럼을 뚝 떼어놓을 수 있나요? 단편 소설 <죽은 과거>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과거는 끊임없는 흐름입니다.
10년 전은 과거입니다. 다들 10년 전이 과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5년 전은 과거입니다. 아무도 이걸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1년 전은 과거입니다. 6개월 전은 과거입니다. 3개월 전은 과거입니다. 1개월 전은 과거입니다. 15일 전은 과거입니다. 일주일 전은 과거입니다. 3일 전은 과거입니다. 1일 전은 과거입니다. 12시간 전은 과거입니다. 6시간 전은 과거입니다. 3시간 전, 1시간 전, 30분 전, 15분 전, 7분 전, 3분 전, 1분 전, 30초 전, 15초 전, 7초 전, 3초 전은 과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3초 전이 과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1초 전은? 1초 전이 과거가 되나요?
분명히 1초 전은 과거 같습니다. 문제는 1초 전이 현재와 너무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눈을 깜빡인다면, 순식간에 1초는 지나갈 겁니다. 순식간에 현재는 1초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는 1초가 되고, 또 다른 현재는 1초가 되고, 또 다시 현재는 1초가 되고, 계속 현재는 1초가 됩니다. 이렇게 현재는 과거로 계속 바뀌고,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아주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흐릿해지고, 현재는 아주 가까운 과거가 됩니다. 분명히 1초 전은 과거이나, 이건 과거보다 순식간에 흘러가는 현재에 가깝습니다.
10년 전과 1초 전이 똑같이 과거라고 해도, 10년 전과 1초 전은 아주 다른 과거입니다. 0.5초 전은 과거입니다. 0.1초 전은 과거입니다. 0.01초 전은 과거입니다. 0.001초 전은 과거입니다.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초 전은 과거입니다. 하지만 정말? 정말 이게 과거입니까? 개념적으로 이건 과거이나, 이건 너무 가까운 과거입니다. 이런 '너무 가까운 과거'와 '현재'의 경계선은 꽤나 흐릿합니다. 단편 소설 <죽은 과거>에서 사람들이 너무 가까운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걸 현재라고 인식할 겁니다. 사실 <죽은 과거>에서 사람들은 과거 같은 현재를 이용해 현재를 바꾸고 싶어합니다. <죽은 과거>에서 과거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닙니다.
과거는 현재가 되고, 사람들은 현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현재를 바꾸는 순간, 사람들은 어느 정도 미래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오직 너무 가까운 과거만 현재가 되나요? 왜 10년 전, 50년 전, 100년 전, 200년 전이 현재가 되지 못하나요? 우리가 현재를 이용해 과거를 해석하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를 명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우리는 현재를 바꿀 수 있습니다. 한상원이 쓴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은 아우구스티누스, 카를 마르크스, 발터 벤야민을 언급하고 과거가 그저 과거에 불과하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발터 벤야민은 실증주의 과학에 반박합니다. 벤야민은 우리가 '역사를 회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천사(앙겔루스 노부스)는 미래에 등을 돌리고 과거를 바라봅니다. 역사는 그저 과거를 이야기하는 실증주의 과학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회상'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회상하고 역사를 현재에 연결하는 순간, 우리는 현재를 바꿀 수 있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단절된 구간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회의론자들처럼 실증주의 과학은 "과거는 오직 과거일 뿐이에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고 노래하나, 발터 벤야민은 이런 노래에 반대할 겁니다.
19세기에 파리 코뮌이 부르주아 계급에게 치열하게 저항한 것처럼, 21세기에 남아메리카 좌파들은 치열하게 세계화 자본주의에 저항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를 현재에 반영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옹호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파리 코뮌이 학살을 당했기 때문에, 세계화 자본주의는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학살을 당한 희생자로서 파리 코뮌은 21세기에 기여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파리 코뮌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세계화 자본주의는 나타나지 못했을 겁니다. 역사는 오직 승리자(학살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패배자(희생자) 역시 역사를 만들고 역사에 기여합니다.
패배자로서, 끔찍한 피와 죽음으로서 파리 코뮌이 21세기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우리는 21세기 세계화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남아메리카 좌파들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과거는 그저 과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단편 소설 <죽은 과거>는 아주 가까운 과거들이 현재가 된다고 말합니다. 실시간 속에서 아주 가까운 과거들은 현재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천사를 내세우고 역사가 회상이라고 주장합니다. 회의론자들과 달리,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과 마르크스주의는 역사(과거)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와 사이언스 픽션을 함께 고려한다면, 우리는 훨씬 새롭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