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쏘아올린 불꽃>과 서글픈 사랑의 도피 본문
[두 청춘은 자본주의 사회 속의 연인입니다. 이런 연인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애니메이션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는 타임 슬립 이야기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연인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거스르는 남자를 이야기합니다. 자꾸 남자가 시간대를 거스르는 이유는 '사랑의 도피'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고, 애정을 표현하고, 심지어 사랑의 도피를 계획합니다. 남자가 그저 막연한 호감을 느꼈을 때, 여자는 간접적이거나 교묘하거나 우회적으로 온갖 애정들을 표현합니다. 그것들은 사랑의 도피로 이어집니다. 두 연인은 사랑을 구속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나, 그건 쉽지 않습니다.
'사랑의 도피'는 낭만적이고 두근거리는 계획이나, 현실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일상은 두 연인을 붙잡고, 주변 사람들은 도피를 가로막고, 두 연인은 헤어져야 합니다. 성공적인 사랑의 도피를 위해 남자는 다시 시간대를 거스릅니다. 남자는 다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쏘아올린 불꽃>은 시간 여행 이야기이나, 남자는 미래로 가지 않습니다. 남자는 "만약 그때 우리가 제대로 도망쳤다면?"이라고 묻고 과거로 돌아갑니다. <쏘아올린 불꽃>은 미래가 나오지 않는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바라봅니다.
미래를 바라본다고 해도, 이 애니메이션은 과거에서 미래가 파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연히 분홍 빛깔 미래를 위해 시간 여행자는 과거를 돌아봐야 합니다. 멋진 과거 없이 두근거리는 미래는 없습니다. 사실 그 자체로서 미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수많은 과거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미래를 바라보고 진보를 준비하고 싶다고 해도, 결국 과거에서 미래는 파생합니다. 과거가 엉망이라면, 미래 역시 엉망이 될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정말 미래에 대비하고 싶다면, 사람들은 '미래에 등을 돌리고 과거를 바라봐야' 할지 모릅니다.
과거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제대로 미래에 대비하지 못할 겁니다. 낙관과 희망은 언제나 미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과거에서 낙관과 희망을 찾을 때, 비록 그게 실패한 낙관과 희망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실패를 딛고 미래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겠죠.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등을 돌리고 미래를 바라본다고 생각하나, 그건 진짜 진보주의가 아닐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런 진보주의는 제대로 미래를 대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과거 없이 미래는 없고, 그래서 진보의 시선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해야 할 겁니다. <쏘아올린 불꽃>에서 미래를 위해 시간 여행자 역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 여행자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사랑의 도피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두 연인이 사랑의 도피에 성공한다고 해도,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쏘아올린 불꽃>에서 두 연인은 고등학생입니다. 두 연인 나즈나와 노리미치는 모두 고등학생입니다. 나즈나와 노리미치가 사랑의 도피에 성공한다면, 두 연인은 가족, 친구들, 학교를 모두 버려야 합니다. 이게 올바른 행위일까요? 사랑의 도피를 실행하는 동안 노리미치는 어떻게 두 사람이 살아갈지 묻습니다. 나즈나에게는 특별한 계획이 없습니다. 나즈나는 그저 사랑하는 남자 노리미치와 함께 도망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만약 사랑의 도피가 성공한다고 해도, 두 연인에게 앞길은 막막할지 모릅니다.
나즈나와 노리미치가 도시로 상경한다고 해도, 일본 거대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지 정책들이 꽤나 발달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나즈나와 노리미치를 보살피지 않을 테고, 두 사람은 힘들게 먹고 살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일본은 별로 진보한 복지 국가가 아닙니다. 일본이 진보한 복지 국가였다면, 일본 공산당과 녹색당은 울상을 짓지 않았겠죠. 일본에서 학생들이 학교를 벗어나고 자유롭게 먹고 살 수 있을까요? 일본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먹고 사는 문제와 곧바로 이어집니다. 남한에서 수많은 학생들은 이른바 제도권 교육에 들어가느라 발버둥칩니다.
편의점 알바는 별로 대단하지 않은 일자리입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다면, 학생들은 편의점 알바 자리조차 제대로 건지지 못합니다. 제도권 교육에 속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어떻게든 검정 고시를 통과하느라 애씁니다. 이런 학생들에게 '답답한 학교를 벗어나고 마음껏 네 꿈을 펼쳐라' 같은 문구는 그저 상투적인 망상에 불과할 겁니다. 학생들이 당장 먹고 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답답한 학교 따위가 문제인가요? 당장 학생들에게 일자리가 없고, 먹고 살 돈이 없음에도, 대안 학교 따위가 문제인가요? 많은 사람들은 공교육이 문제라고 말하고 교육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제도권 교육에 들어가지 못하는 밑바닥 계급 아이들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밑바닥 계급을 수탈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존재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밑바닥 계급을 배제하고 진보와 보수를 언급합니다. 아무리 교육 정책이 진보적이라고 해도, 결국 그건 밑바닥 계급을 외면하는 진보입니다. 밑바닥 계급 학생들은 이런 교육 정책들이 야속하다고 여길 겁니다. 일본 사회 역시 별로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나즈나와 노리미치가 거대 도시로 상경한다고 해도, 두 사람에게 먹고 살기 위한 계획이 없다면, 두 사람은 빈곤에 처할 겁니다.
사랑이 빈곤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려울 겁니다. 결국 빈곤은 사랑을 짓밟고, 두 연인은 비참하게 몰락하거나 헤어질지 모릅니다. "오직 사랑만으로 연인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어!" 이건 꽤나 멋진 문구이나, 아쉽게도 자본주의 사회는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짧은 철학 서적 <에로스의 종말>에서 철학자 한병철은 심지어 자본주의가 사랑을 죽였다고 표현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사랑을 죽일 수 있습니다. 두 연인이 오직 사랑만으로 가난을 이길 때, 그 장면은 아주 아름다울 겁니다. 누구나 이런 사랑을 그릴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고, 사랑은 빈곤을 이기지 못하고, 자본주의는 연인을 짓밟을 수 있습니다. 소설 <연애의 기억> 초반에서 줄리언 반스는 사랑이 사회적인 환경과 관계가 없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줄리언 반스는 사랑이 어떤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동서남북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은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사랑은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먹고 사는 문제와 절대 멀어지지 못합니다. 비정규직 노동들을 전전하는 가난한 부부에게 줄리언 반스의 문구는 그저 배부른 망상에 불과할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소설 <연애의 기억> 역시 사회적인 환경에서 연애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도피 자금 없이, 사랑의 도피 따위는 없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없이, 사랑의 도피 따위는 없습니다. 나즈나와 노리미치는 그런 암울한 미래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쏘아올린 불꽃>이 '사랑의 도피'를 너무 낭만적으로 다룬다고 불평합니다. 사실 나즈나는 '사랑의 도피'가 정말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즈나는 그저 좀 더 오래 노리미치와 붙어있기 원했을 뿐입니다. <쏘아올린 불꽃>은 언뜻 사랑의 도피를 낭만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으나, 진짜 주제는 그게 아닙니다.
나즈나는 자신의 계획이 낭만적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소설 <연애의 기억>은 묻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지 못한다면, 심지어 인간은 사랑조차 시도하지 못할 겁니다. 비단 애니메이션 <쏘아올린 불꽃>만 아니라 현실에도 이런 청춘들은 많을 겁니다. 이런 청춘들은 두근거리는 사랑을 꿈꾸나, 수많은 장벽들은 두근거리는 청춘들을 짓밟고 억누를 겁니다. 사람들은 '청춘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나, 수많은 청춘들에게 그건 상투적인 망상에 불과할 겁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사랑을 짓밟는다면, 청춘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때 청춘들은 정말 두근거리는 사랑으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착취와 수탈과 오염만을 이용해 자신을 유지할 수 있고, 자본주의 사회는 수많은 청춘들의 사랑을 착취해야 합니다. 만약 청춘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쏘아올린 불꽃>에서 나즈나는 노리미치와 정말 사랑의 도피를 실행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나즈나가 노리미치에게 적극적이거나 우회적이거나 은밀하게 온갖 애정들을 표현한다고 해도, 그건 서글픈 도피로 이어지지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