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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또 다른 시간 속으로

시간 여행 이야기와 정보의 불균형

OneTiger 2019. 2. 18. 18:33

소설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시간 여행 연애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소설 속에서 두 연인의 연애는 주된 분량을 차지합니다. 재미있게도 종종 두 연인은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남자가 시간 여행자이고 다양한 시간대들을 들락거리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첫 부분에서 남자가 여자를 만났을 때, 여자는 남자를 알아봤으나, 남자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시간대가 (상대적으로) 과거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상대적으로) 미래에서 남자는 여자를 만나고, 남자는 여자가 누구인지 압니다.


남자가 고정적인 시간대를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남자는 계속 여자의 여러 시간대들에 간섭하고,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두 연인은 연애를 즐깁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꽤나 골치가 아픈 상황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꽤나 두근거리고 설렙니다. 아직 결혼을 꿈꾸지 못하는 소녀가 미래의 결혼 상대를 만난다면…. 이런 연애는 꽤나 재미있을 겁니다. 소녀에게 결혼이라는 단어는 막막합니다. 하지만 남자가 시간 여행자이기 때문에, 소녀는 자신의 연애를 예상할 수 있죠. 비단 <시간 여행자의 아내>만 아니라 여러 시간 여행 이야기들은 이런 연애들을 그립니다.



오드리 니페네거가 쓴 <시간 여행자의 아내>를 비롯해 수많은 시간 여행 이야기들은 '정보의 불균형'을 내세웁니다. 시간 여행 이야기에서 '정보의 불균형'은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여자와 남자가 연인이라고 해도, 두 연인은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반면, 남자는 왜 자꾸 여자가 자신에게 들이대는지 알지 못합니다. 남자는 미래에 자신이 여자와 사랑하고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죠. 시간대가 엇갈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애 이야기는 설레고 재미있으나, '정보의 불균형' 때문에 종종 시간 여행자는 곤란한 상황에 빠집니다.


사쿠라자카 히로시가 쓴 <All You Need Is Kill>에서 소설 주인공은 시간 여행자입니다. 소설 <All You Need Is Kill>에서 소설 주인공은 미래로 떠나지 못하나, 특정한 과거 시점으로 계속 돌아가죠. 과거로 돌아갔을 때, 소설 주인공은 무슨 미래가 나타날지 압니다. 미래는 너무 불행하고, 소설 주인공은 미래를 바꾸기 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설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에게 떠든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죠. 무기 정비 담당이 소설 주인공을 질책한 것처럼, 오히려 소설 주인공은 몇 번 오해에 휘말립니다. 이건 '정보의 불균형'입니다. 미래에서 과거로 왔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많은 것들을 압니다. 무기 정비 담당은 알지 못합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처럼 달달한 연애가 나오든, <All You Need Is Kill>처럼 급박한 전쟁이 터지든, 시간 여행 이야기에서 정보의 불균형은 중요한 역할을 맡습니다. 이걸 보기 위해 많은 독자들은 시간 여행 이야기를 읽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는 다소 전능합니다. 소설 속의 다른 등장인물들과 달리, 독자는 정보를 압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를 읽을 때, 독자는 시간 여행자 남자가 여러 시간대들을 돌아다니고 여자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All You Need Is Kill>를 읽을 때, 독자는 소설 주인공이 미래에서 과거로 계속 순환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정보의 불균형'이 갈등을 부를 때, (다른 등장인물들보다) 독자가 정보들을 많이 알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등장인물들처럼, 독자가 정보들을 알지 못한다면, 독자는 시간 여행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지 못할 겁니다. 시간 여행 이야기를 읽을 때, 독자는 미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독자는 미래 사람이 되고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시간 여행 이야기를 읽을 때, 독자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속해야 합니다. 만약 미래보다 과거에 정보들이 훨씬 많다면, 독자는 미래 사람이 아니라 과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허버트 웰즈가 쓴 <타임 머신>에서 독자는 미래 사람(위나)보다 과거 사람(19세기 시간 여행자)에게 감정을 이입합니다.



이건 모든 시간 여행 이야기가 정보의 불균형을 추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추리 소설이 중요한 정보들을 감추는 것처럼, 시간 여행 이야기들 역시 중요한 정보들을 감출 수 있습니다. 타마라 아일랜드 스톤이 쓴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에서 독자는 미래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독자는 소설 주인공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소설 주인공은 과거에 속했고, 독자 역시 과거 사람이 됩니다. 연애 상대가 시간 여행자이기 때문에, 언제든 연애 상대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이런 아슬아슬함은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고, 독자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소설을 읽을 겁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서 독자는 미래에 속하고 많은 정보들을 압니다. 반면,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에서 독자는 상대적으로 과거에 속하고 정보들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와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은 똑같이 시간 여행 연애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다양한 시간대들을 돌아다니고 여자와 연애합니다. 양쪽은 비슷한 설정을 이용하나,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많은 정보들을 풀어놓습니다. 반면,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에서 정보들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보다 <All You Need Is Kill>은 훨씬 많은 정보들을 풀어놓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문자 그대로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미래를 알지 못하나, 소설 주인공은 미래를 압니다. 윤회 덕분에 소설 주인공은 훨씬 많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건 아주 커다란 불균형이고 간격이고 격차입니다.



NAC가 쓴 <2nd RING>은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팬 픽션입니다. "만약 이카리 신지가 과거로 돌아가고, 다시 사도들과 싸우고, 다시 사람들을 만난다면?" 이런 가정에서 이 소설은 출발합니다. 이 소설에서 이카리 신지는 미래(애니메이션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LCL 바다)에서 과거(이카리 신지가 초호기를 타는 순간)로 돌아갑니다. 당연히 이카리 신지는 미래를 압니다. 신지는 미래와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과 심지어 제레 음모까지 압니다. 따라서 신지는 미래를 바꾸고 또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신지는 수많은 정보들을 압니다. 신지는 미래를 압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카리 신지는 갑작스러운 초인 영웅으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신지는 그저 소심한 남고생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엄청난 정보의 불균형 덕분에 신지는 숱한 고난들을 뛰어넘고 또 다른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아야나미 레이와의 '뽀까뽀까'한 연애 역시 마찬가지죠. 소설 <2nd RING>에서 이카리 신지는 미래 사람입니다. <2nd RING>을 읽는 독자 역시 신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미래 사람이 됩니다. 미래 사람으로서 이카리 신지와 독자는 엄청난 정보들을 압니다. 미래를 알기 때문에 독자는 조마조마하고 두근거리고 설레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2nd RING>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알지 못한다면, 독자가 <2nd RING>을 읽는다고 해도, 재미는 크게 줄어들 겁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와 <All You Need Is Kill>과 <2nd RING>처럼, 시간 여행 이야기는 정보의 불균형을 보여주고 언제든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절대 종착역이 아닙니다. 현실은 바뀔 수 있습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킨>에서 소설 주인공은 시간 여행자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20세기에서 19세기로 돌아갑니다. 20세기에는 노예 제도가 없으나, 19세기에는 노예 제도가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이 20세기 사람이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노예 제도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19세기 사람들은 미래를 알지 못하고 노예 제도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소설 주인공에게 노예 제도는 구닥다리 착취이나, 19세기 사람들에게 노예 제도는 당연한 현실입니다. 이건 정보의 불균형이죠. <킨>을 읽는 독자들은 20세기 이후 사람입니다. 독자들은 20세기 이후 사람입니다. 독자들은 노예 제도가 구닥다리 착취라는 사실을 압니다. 소설 주인공처럼, 독자들이 상대적으로 미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분개하며 소설을 읽을 수 있죠. 소설 주인공은 20세기에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을 압니다. 19세기 사람들은 절대 그것을 알지 못하죠.



19세기 사람들은 19세기가 역사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고 노예 제도가 영원불멸하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인류 사회는 영원불멸하지 않습니다. 인류 사회는 바뀝니다. 20세기 소설 주인공과 19세기 노예 주인 사이에는 엄청난 불균형과 간격과 격차가 있습니다. 현실 속의 우리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겁니다. 21세기 초반 사람들은 21세기가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21세기 초반 사람들은 세상이 절대 바뀌지 않고 21세기가 인류 문명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죠. 24세기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은 꽤나 웃길 겁니다. 만약 24세기까지 인류 문명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24세기 사람들은 21세기 사람들을 비웃겠죠. 20세기 소설 주인공이 19세기 노예 제도를 비판하는 것처럼, 24세기 사람들은 21세기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겠죠.


21세기 초반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옳다고 믿습니다. 왜? 자본주의가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예 제도가 사라진 것처럼, 인류 사회는 바뀔 수 있습니다. 24세기에 자본주의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걸 절대 생각하지 못합니다. 19세기 노예 주인처럼, 우리는 역사에 종착역이 있고 21세기 초반 자본주의 종착역이 영원불멸하다고 생각합니다. 24세기에 자본주의가 사라진다면, 24세기 사람들에게 이건 정보의 불균형이 될 겁니다. 24세기에 누군가는 자본주의를 이용해 <킨>과 비슷한 소설을 쓸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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