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과 시간을 비트는 형식 본문
폴 앤더슨이 쓴 <타임 패트롤> 시리즈는 여러 시간대들을 뒤섞습니다. <타임 패트롤> 시리즈는 시간 경찰들을 이야기하고, 시간 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시간 경찰들은 무수히 많은 시간대들로 들어가야 합니다. 공룡 시대부터 미래 시대까지, 시간 여행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시간 범인들은 수많은 역사들에 개입합니다.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종종 범인들은 대체 역사로 향합니다. 당연히 시간 경찰들 역시 다양한 시간대들을 만나고 다양한 시간대들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어제 고대 중국을 다녀온 시간 경찰은 오늘 식민지 남아메리카에 가고 내일 중생대 쥐라기로 떠나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간 경찰은 자신이 특정한 시간대에 속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고대 중국, 식민지 남아메리카, 중생대 쥐라기를 수시로 들락거리는 사람이 특정한 시간대에 애착을 보일 수 있겠어요? 만약 시간 경찰이 원래 20세기 유럽 사람이라면, 이 시간 경찰은 20세기 유럽에게 특별히 애착을 보일 겁니다. 하지만 무수한 시간대들을 들락거리는 동안, 시간 경찰은 자신이 20세기 유럽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겠죠. <타임 패트롤> 시리즈는 특정한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역사가 흐르는 과정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타임 패트롤> 시리즈는 뭔가 아련합니다. 거대한 역사가 계속 흐르고, 거대한 흐름 속에서 시간 경찰은 고향을 잃습니다. 전반적으로 <타임 패트롤> 시리즈는 웅장하고 서글픕니다. 인간에게 정착할 곳이 없다면, 인간은 외로운 방랑자가 되겠죠. 반면, <타임 패트롤> 시리즈와 달리, 어떤 시간 여행 이야기들은 다양한 시간대들을 하나로 종합합니다. 여러 시간대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 때문에 이런 시간 여행은 시끄럽고 떠들썩합니다. 전반적으로 이런 시간 여행은 웃기고 요란한 소동으로 이어집니다. <엑설런트 어드벤처> 같은 영화는 좋은 사례일 겁니다. <엑설런트 어드벤처>에서 두 시간 여행자는 다양한 시간대들을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세기 미국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그 대신 두 사람은 다양한 시간대들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데려옵니다. 여러 시간대들은 서로 얽히나, 이런 시간 여행은 산만하고 웃긴 농담으로 흘러가죠. 그 덕분에 시간 여행 이야기들 중에서 <엑설런트 어드벤처>는 유쾌한 고전이 될 수 있었죠. 하지만 이건 오직 시간 여행 이야기만 '다양한 시간대들'이라는 소재를 이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이야기가 시간 여행이 아니라고 해도, 그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양한 시간대들을 이용할 수 있어요.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고 시간 여행 이야기가 아니나, 이런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엑설런트 어드벤처>와 비슷한 감성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엑설런트 어드벤처>와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똑같이 한 장소에서 영화 주인공들은 다양한 시간대들을 만납니다. 고대와 중세와 현대와 동양과 서양은 함께 만나고, 그런 만남은 진귀하고 요란하고 웃긴 풍경을 펼칩니다. 원작 동화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공룡들이 살아난다고 이야기했으나, 영화는 비단 공룡만 아니라 다른 시간대들을 뒤섞었고, 공룡 시대와 로마 시대와 서부 시대는 신나게 뒤섞입니다. <엑설런트 어드벤처>에서 두 시간 여행자가 다양한 시간대들을 뒤섞는 것처럼. 하지만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시간 여행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록 <엑설런트 어드벤처>에 깊고 진지한 사변이 없다고 해도, 분명히 이건 SF 시간 여행입니다. 반면,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사이언스 픽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는 대체 역사 장르가 풍길 수 있는 감성과 재미를 살짝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역사를 비트는 것. 대체 역사 장르는 그런 재미를 선사하죠. <박물관이 살아있다> 역시 그런 재미를 선사합니다. 역사를 재미있게 비틀 수 있다면, 소재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시간 여행자가 다양한 시간대들을 방문한다고 해도, 박물관에 저주와 마법이 걸린다고 해도, 양쪽은 똑같이 역사를 재미있게 비틀 수 있어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마르크스 철학과 경제학 서적입니다. 하지만 다른 마르크스주의 서적과 달리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뭔가 판타지 소설 같습니다. 하이게이트 묘지에서 주인공은 카를 마르크스 유령을 만나요. 주인공과 마르크스 유령은 2008년 금융 대란, 미국의 중동 침략, 지구 온난화 같은 문제들을 논의합니다. 그때 잠시 존 메이너드 케인즈를 비롯해 다른 경제학자 유령들은 등장합니다. 그들은 마르크스 유령과 함께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논의하죠.
당연히 다른 경제학자 유령들은 자본주의에 찬성하고, 마르크스 유령 혼자 자본주의를 열심히 반대합니다. (엥겔스 유령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소 유감스럽습니다.) 이 장면은 <엑설런트 어드벤처>나 <박물관이 살아있다> 같은 역사 비틀기와 비슷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철학 경제학 서적이고 SF 소설이 아닙니다. 그저 철학 경제학을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 저자는 마르크스 유령을 만났다고 설정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게 진짜 SF 소설이고, 시간 여행자가 카를 마르크스와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여러 경제학자들을 한 장소에 모은다면, 그건 꽤나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SF 작가가 몇몇 설정과 이야기를 바꾸고 덧붙인다면,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SF 소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이건 타임 슬립 소설이 될 수 있겠죠. 소설 <시간 여행자의 아내>가 SF 소설이 된다면, (몇몇 설정과 이야기를 바꾸고 덧붙이는)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 역시 SF 소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불사 판매 주식 회사>처럼, 정말 유령들이 살아있고, 마르스크 유령과 케인즈 유령이 설전을 벌인다면? 그건 충분히 SF 소설이 될 수 있겠죠. 물론 어떤 독자들은 그 자체로서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이 SF 소설이 될 수 있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등장인물들과 사건들과 배경들이 있고 상상력 역시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이 이게 SF 소설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이건 아예 근거가 없는 주장이 아니겠죠. 그렇다고 해도 훨씬 많은 독자들은 이게 SF 소설이 아니라고 반박할 겁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문학적인 재미보다 철학 경제학 논증에 치중합니다. 어쩌면 저자 찰스 더버는 SF 소설을 쓰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을 썼을 때, 찰스 더버는 속마음으로 이 책이 SF 소설이 되기 바랐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작가가 의도했다고 해도, 이 책은 SF 소설이 되지 못할 겁니다. 수많은 독자들은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이 SF 소설이 되지 못한다고 반박하겠죠. 이 책이 SF 장르 공식들보다 철학 경제학 논증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기 때문입니다.
SF 소설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한편으로 이 책에는 역사를 종합하고 비트는 재미가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SF 소설이 되지 못하겠으나, 분명히 여기에는 역사를 비트는 재미가 있습니다.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은 SF 형식을 빌렸습니다. 어떤 두 이야기가 똑같은 주제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형식들이 달라질 때, 독자는 서로 다른 감성들로 주제를 받아들일 겁니다. 그래서 작가가 이야기를 전달할 때, 주제처럼 형식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수많은 창작물들을 만들 때, 이야기를 구성하는 형틀부터 이야기를 담는 매체까지, 작가들은 형식들을 고민해야 합니다. 심지어 형식은 내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아예 내용을 바꿀 수 있죠.
종종 사람들은 형식을 무시하고 내용에 치중합니다. 하지만 소설과 철학 저술은 다릅니다. 소설을 모방하는 철학 저술과 일반적인 철학 저술 역시 다르겠죠. 1인칭 시점 소설과 전지적 시점 소설은 다릅니다. 대사들이 많은 소설과 서술 문장들이 많은 소설은 다릅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이 소설이 된다면, 이건 대사들이 많은 소설이 되겠죠.) 게다가 매체가 바뀔 때, 형식은 훨씬 많이 바뀔 겁니다. 소설과 영화와 게임은 훨씬 다릅니다. 소설과 게임이 똑같이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소설과 게임은 서로 다르게 이야기할 겁니다. 심지어 게임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오직 소설만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죠. 그래서 이야기를 평가할 때, 사람들은 이런 형식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겠죠.
소설을 쓸 때, 작가들은 비단 내용만 아니라 형식을 고민합니다. 무슨 시점이 좋을까? 얼마나 대화들이 많아야 할까? 많은 대화들이 좋은 방법일까? 대화들에 문어체들이 있어야 할까? 문단들을 구분해야 할까? 서술 문장이 과거 시제가 되어야 할까? 비단 소설만 아니라 수필이나 일기나 게임 시나리오 같은 여러 이야기들에서 작가들은 언제나 형식을 고민합니다. 매체가 바뀔 때, 완전히 다른 관점들에서 작가들은 고민할 겁니다. 이 게시글은 <엑설런트 어드벤처>와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을 비교했으나, 한쪽은 영상 중심적이고 다른 한쪽은 텍스트 중심적입니다.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들을 꿈꾸는가>와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비교할 때, 이렇게 사람들은 비단 내용만 아니라 형식을 비교할 수 있겠죠. 형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형식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사람들은 이야기를 훨씬 자세히 파악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