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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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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또 다른 시간 속으로

왜 <킨>이 좋은 SF 소설이 될 수 있을까

OneTiger 2018. 11. 15. 20:05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킨>을 읽은 이후, 어떤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와, 이건 정말 무시무시한 소설이야. 하지만 이건 SF 소설이 아니라 노예 제도를 고발하는 소설이지." 사실 <킨>은 타임 슬립 이야기입니다. 소설 주인공 흑인 여자는 1970년대에서 과거 미국 남부 농장으로 돌아가고 흑인 노예가 됩니다. 여타 타임 슬립 이야기들이 그런 것처럼, <킨>에는 타임 슬립을 설명하는 상세한 설정이 없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저도 모르게 과거로 돌아가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다시 과거로 돌아갑니다.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소설 주인공은 흑인 노예가 됩니다. 소설 주인공은 이를 두려워하나, 자신의 능력을 막지 못합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 같은 로맨스 소설에서 타임 슬립 능력은 꽤나 설레고 두근거리는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킨> 같은 소설에서 타임 슬립 능력은 고문입니다. 독자들은 언제 소설 주인공이 무슨 고통을 겪을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겠죠. <킨>은 얼마나 노예들이 폭력적인 고통에 시달렸는지 조명하고, 따라서 어떤 독자들은 이게 SF 소설보다 노예 제도를 고발하는 소설에 훨씬 가깝다고 느낄 겁니다.



어떤 관점에서 <노예 12년> 같은 소설은 <킨>과 많이 비슷합니다. <노예 12년>에서 소설 주인공은 자유민 흑인입니다. 하지만 인신매매단 때문에 노예로서 소설 주인공은 팔리고 노예가 됩니다.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자유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요. 다른 흑인 노예들과 달리, 자유민으로서 태어났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노예 제도를 좀 더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1970년대를 살아가는 흑인이고 자유민입니다. 미국 남부 농장으로 타임 슬립한다고 해도, 소설 주인공은 자신이 자유민이고 노예 제도가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설 주인공 역시 노예 제도를 좀 더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죠. 하지만 똑같이 자유민 주인공이 노예 제도를 고발하는 소설임에도, <킨>은 <노예 12년> 같은 소설과 다릅니다. 똑같이 소설 주인공이 자유민 흑인이라고 해도, <노예 12년>은 19세기를 벗어나지 않으나, <킨>은 20세기 후반에 이릅니다. <킨>에서 소설 주인공은 1970년대 시각으로 노예 제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0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은 소설 주인공에게 좀 더 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20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과 함께 호흡합니다. 이건 타임 슬립이라는 설정 없이 존재하지 못하는 시각이죠.



게다가 <노예 12년>과 달리, <킨>에서 소설 주인공은 여자입니다. 여자임에도 소설 주인공은 농장 주인들(남자들)에게 당당히 맞서죠. <노예 12년>과 달리, <킨>에서 소설 주인공은 흑인 여자들이 권리를 신장하고 투표권을 행사하고 엄연한 하나의 시민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런 입장에서 흑인 여자는 노예 제도와 맞서죠. <킨>은 <노예 12년>보다 훨씬 진보적인 시각을 내놓을 수 있고, 그래서 노예라는 문제와 함께 성 차별이라는 문제 역시 담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유민이라고 해도, <노예 12년>의 주인공은 20세기 후반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자유를 외칠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시각은 20세기 진보에 닿지 못하죠.


<노예 12년>에서 의로운 배스는 노예 제도가 악습이라고 열심히 주장하나, 어떻게 시대가 진보할지 말하지 못합니다. <킨>은 소설 주인공을 과거로 돌려보내는 동시에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을 잃지 않아요. 만약 <킨>이 SF 소설이 아니었다면, 옥타비아 버틀러는 이런 이야기를 펼치지 못했겠죠. 따라서 <킨>은 단순히 노예 제도를 고발하는 소설이 아닙니다. SF 소설로서 <킨>은 시대적인 격차를 조명합니다. SF 소설에서 시대적인 격차를 조명하는 시각은 중요합니다. SF 소설은 19세기 유럽에서 비롯했습니다. 19세기 유럽은 근대성을 만들었어요. 근대성 덕분에 유럽 사람들은 시대가 급격하게 바뀐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시대 변화에 두 눈을 떴습니다.



SF 소설들은 그런 변화에 주목합니다. 흔한 오해와 달리, 세상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세상이 뚝 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초역사적이라고 생각하죠. 그들은 모든 것이 당연히 이미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SF 소설들은 세상이 고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계속 바뀌고, 그래서 시간적인 격차는 아찔한 감성을 선사합니다. 시간적인 격차 때문에 우리는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SF 소설은 그런 충격을 재미로 선사합니다. 물론 SF 소설들은 어떻게 시대가 바뀔지 예측하지 못합니다. SF 소설들은 그저 가능성들을 따질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시대는 바뀔 겁니다. 주류 문학들이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현실에만 매달릴 때, SF 소설들은 미래를 전망하고 진보를 바랄 수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들이 현실과 고립된 허구를 상상할 때, SF 소설들은 현실에서 이어지는 허구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SF 소설에서 이건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SF 소설들이 현실을 예측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게 중요한가요? SF 소설에게는 미래를 예측할 임무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몇몇 소프트 SF 소설이 미래를 예측했다고 떠벌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우연히 때려맞춘 결과에 불과해요. SF 소설들은 미래를 이용해 시간적인 격차를 만들고, 우리를 고정 관념에서 건져냅니다. 물론 세상이 고정적이라는 오해는 꽤나 지배적입니다. 심지어 세상이 변한다고 주장하는 SF 작가들조차 모든 것이 당연히 이미 존재한다고 덜컥 믿어요. 모든 것이 당연히 존재한다는 광신은 정말 무섭죠. 그렇다고 해도 SF 소설들이 드러내는 가치(세상은 고정적이지 않다)는 사라지지 않겠죠.



<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킨>은 1970년대와 과거 노예 제도를 대조하고 시대가 바뀔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킨>은 그걸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으나, 분명히 그런 설정을 기반에 깝니다. 누군가는 <킨>이 미래를 전망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네, 그렇죠. <킨>은 미래를 전망하지 않고, 그래서 <킨>은 SF 소설처럼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건 스팀펑크 소설들이 본격적인 SF 장르가 되지 않는 현상과 비슷하죠. 그렇다고 해도 <킨>은 시대가 바뀐다는 설정을 기반에 깔고 더 진보한 사회를 꿈꿀 수 있습니다. 비록 다른 SF 소설들과 달리, <킨>은 시대적인 변혁을 미래에 투영하지 않으나, 좋은 SF 소설이 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어요. 그래서 <킨>은 단순히 노예 제도를 고발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은 흑인 여자 주인공과 함께 고정적이지 않은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겁니다.



※ 이 게시글은 <노예 12년>보다 <킨>을 훨씬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킨>이 <노예 12년>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SF 소설에게 무슨 특징이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 게시글은 그저 <노예 12년>과 <킨>을 대조했을 뿐입니다. <노예 12년>을 읽는 동안 독자는 저도 모르게 분노의 주먹을 부르르 떨지 모릅니다. 배스가 노예 주인을 설득하고 노예 주인이 배스를 놀릴 때, 이 장면은 시대를 뛰어넘고 억압과 차별을 타파하기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장들을 뒤흔들지 모릅니다. 한때 '피꺼솟'이라는 유행어는 널리 퍼졌죠. 노예 주인이 배스를 놀려먹을 때, 독자들은 그런 피꺼솟 분노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노예 12년>은 분노의 피를 끓게 하는 뜨겁고 훌륭한 문학입니다.



"오직 옛것만을 숭상하며 관습에 얽매인 사람들은

행성적인 병폐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조차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것이라고 우기며

신성한 것으로 떠받드네.

하지만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태생적인 한 인간이

착취와 마찬가지로 고정 관념과 편견으로 세뇌된 한 인간이

절대 군주처럼 혼자 자유롭다고 떠들어대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성적인 토론이 가능할 수 있는가.

게다가 어떻게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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