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어부사시사>와 지구 자전축 기울기 본문
[비록 게임이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태계 게임은 23.5도 공전 측면 기울기를 상정할 겁니다.]
간밤에 눈 갠 후에 경물(景物)이 달랐고야.
앞에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에는 천첩옥산(千疊玉山)
선계(仙界)ㄴ가 불계(佛界)ㄴ가 인간이 아니로다.
위 문구는 윤선도가 쓴 시조 <어부사시사> 중에서 겨울 부분입니다. 제목처럼, <어부사시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이용해 어부 생활을 노래합니다. 어업 같은 1차 산업은 자연 환경에 많은 영향들을 받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후와 자연은 어업 같은 1차 산업에 많은 영향들을 미칩니다. 그래서 세계화 자본주의와 기후 변화는 농업, 어업 같은 1차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크게 미칩니다. 제3세계 기후 난민들은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하고 물고기들을 잡지 못합니다. 그들은 굶주리고 파멸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는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기후 변화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기후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후 변화가 사라진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또 다른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킬지 모르고, 이건 1차 산업에 다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겁니다. 이렇게 기후, 자연은 1차 산업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어부사시사>는 계절을 강조했을 겁니다. 위 시조에서 시조 화자는 겨울 바다를 둘러보고 웅장하고 신비로운 자연 환경을 예찬합니다. 지난 밤에 눈이 내렸기 때문에, 화자는 세상 경치가 달라졌다고 감탄합니다.
시조 화자 앞에는 유리 같은 바다가 있고, 시조 화자 뒤에는 보석 같은 산이 있습니다. 화자는 아름다운 바다와 보석 같은 산을 비교합니다. 여기는 신선이 머무는 장소거나 부처님 나라 같습니다. 웅장하고 신비로운 자연 환경을 강조하기 위해 시조 화자는 도교와 불교를 동원합니다. 시조 화자는 영성을 느끼고, 영성을 표현하기 위해 화자는 인간 세상에서 벗어나고 종교를 향해 승화합니다. 비단 조선 시조만 아니라 영성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문학들 역시 인간 세상에서 벗어나고 종교를 향해 승화할 수 있습니다. 소설 <듄>에는 웅장한 사막 행성 생태계가 있습니다.
웅장한 사막 행성 생태계에는 거대 괴수 모래벌레가 있습니다. 모래벌레는 비단 거대 괴수일 뿐만 아니라 사막 생태계 핵심 생물종입니다. 모래벌레는 사막 순환, 멜란지 순환을 일으킵니다. 이런 웅장한 자연을 강조하기 위해 <듄>은 모래벌레가 창조자(maker)라고 말합니다. 모래벌레는 단순한 거대 괴수가 아닙니다. 단순한 거대 괴수는 단순한 거대 로봇과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파괴와 전투와 학살을 단순하게 추구합니다. 반면, 창조자로서 모래벌레는 생태계 핵심종입니다. 아라키스 행성에서 모래벌레에게 중요한 것은 파괴, 전투, 학살보다 창조, 생태계 순환입니다.
모래벌레가 사막 생태계를 웅장하게 순환시키기 때문에, 모래벌레는 창조자가 됩니다. 모래벌레는 단순한 야생 동물보다 신화적인 존재가 됩니다.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역시 자연을 신화적인 영역에 집어넣습니다. 어떤 출판사 판본 표지 그림(링크)에는 녹색 여자가 있습니다. 녹색 여자는 자연의 여신 같습니다. 수많은 어머니 자연들이 녹색 식물 여자인 것처럼,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표지 그림에서도 녹색 식물 여자는 어머니 자연, 자연의 여신일 겁니다.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속에는 자연의 여신이 없으나, 소설 표지 그림은 자연의 여신을 보여줍니다.
왜 소설 속에 자연의 여신이 없음에도, 소설 표지 그림이 자연의 여신을 보여주나요? 이런 표지 그림이 타당한가요? 이것과 소설 줄거리가 어긋나지 않나요? 독자는 소설을 읽고 소설 표지 그림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이럴수가! 소설 속에는 자연의 여신이 없어! 소설 표지 그림과 소설 줄거리는 일치하지 않아! 소설 표지 그림은 사기야!" 이렇게 독자가 외치고 출판사가 사기를 저질렀다고 고소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자연의 여신, 어머니 자연을 비유합니다. 소설 표지 그림 역시 자연의 여신, 어머니 자연을 비유할 겁니다. 만약 이 그림이 어머니 자연이 아니라고 해도, 많은 독자들은 이게 어머니 자연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소설 <세상 숲> 표지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연을 예찬하기 위해 창작물은 신화, 종교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영화들 속에서 사람들은 모스라를 숭배하고, 모스라는 자연의 여신이 됩니다. 만약 독자들이 <세상 숲> 표지 그림 속의 녹색 여자가 어머니 자연이라고 해석한다면, 소설 <세상 숲> 표지 그림에 모스라가 있다고 해도, 비유적인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엄마 괴수 모스라가 자연의 수호자이기 때문에, 모스라는 어머니 자연이 될 수 있습니다. 모래벌레와 <세상 숲> 표지 그림과 모스라처럼,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 역시 신화와 종교를 동원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나오기 전에, 이미 <어부사시사>는 도교와 불교를 동원했습니다.
이렇게 <어부사시사>와 모래벌레와 <세상 숲> 표지 그림과 모스라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웅장하고 신비로운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 모두 영성, 신화, 종교를 동원합니다. 시조 화자는 노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한가롭게 저으나, 아름답고 거대한 자연 환경은 시조 화자를 둘러쌌습니다. 그래서 시조 화자는 오직 노만 젓지 못합니다. 시조 화자는 절경을 표현해야 하고, 창조자와 녹색 어머니 자연과 모성적인 거대 괴수처럼, 시조 화자는 인간 세상보다 종교 차원을 향해 승화해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역시 종교 차원을 향해 승화합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계몽주의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여전히 인류는 초월성을 추구하고, 사이언스 픽션은 신화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건 <어부사시사>와 <모스라>가 신화, 종교를 완전히 똑같이 이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연 환경을 표현하기 위해 <어부사시사>와 <모스라>가 신화, 종교를 동원한다고 해도, 양쪽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모스라>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비록 <모스라>가 과장된 사이언스 판타지라고 해도, 폭넓은 범주에서 <모스라>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서구 근대화, 계몽주의에서 비롯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진보, 시대 격차를 인정합니다. 근대적인 사이언스 픽션과 달리, <어부사시사>는 이른바 전근대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아무리 모스라가 사이언스 판타지 여신이라고 해도, 모스라는 근대적인 환경 오염, 핵 폐기물을 정화합니다. 반면, <어부사시사>는 서구 근대화를 알지 못합니다. <어부사시사>는 근대적인 환경 오염, 핵 폐기물을 알지 못합니다.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쓰는 동안, 윤선도는 핵 발전소를 구경한 적이 없을 겁니다. 어슐라 르 귄은 핵 발전소를 비판할 수 있으나, 윤선도는 구경하지 못합니다. 프랭크 허버트는 행성 환경 변화를 예측할 수 있으나, 윤선도는 예측하지 못합니다. 윤선도가 전근대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세상 숲>은 근대 환경 오염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어부사시사>가 자연 환경을 예찬하고 환경 오염을 비판하기 원한다고 해도, <어부사시사>는 핵 폐기물이 반영구적인 환경 오염이라고 지적하지 못합니다. <모스라>가 얄팍하고 가벼운 환경 보호를 떠든다고 해도, <모스라>는 지적할 수 있으나, <어부사시사>는 지적하지 못합니다. <어부사시사>에는 이른바 근대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어부사시사>와 <모스라>는 모두 자연 환경을 과장하고 신화적인 영역을 동원하나, <어부사시사>와 <모스라>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 서구 근대화가 있습니다. 이런 결정적인 차이는 또 다른 문제, 해석 문제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자연 환경이 어업 같은 1차 산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부사시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들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왜 계절들이 바뀌나요? 왜 겨울 하늘이 하얀 눈송이들을 뿌리나요? 하늘 나라에서 겨울을 축복하기 위해 선녀들이 눈송이들을 뿌리나요? 어제 <겨울 왕국 2>가 개봉했기 때문에, 머나먼 아렌델 왕국에서 엘사 여왕이 썰렁한 빙결 마법을 시전하기 때문에, 시조 화자가 하얀 설산을 구경할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태양 주변에서 지구는 공전하고, 태양 적도 측면을 향해 지구 공전 측면은 기울어졌습니다. 두 가지 이유(지구 자전축 기울기, 지구 공전과 태양) 때문에, 북반구/남반구 중위도 지역에서 계절들은 바뀝니다.
12월에 북반구 중위도 한반도는 겨울이나, 남반구 중위도 뉴질랜드는 여름입니다. 문제는 시조 화자가 전근대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시조 화자가 지구 자전축 기울기와 지구 공전을 아나요? 시조 화자가 북반구 중위도 한반도 기후와 남반구 중위도 뉴질랜드 기후 차이를 인식하나요? 만약 시조 화자가 뉴질랜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시조 <어부사시사> 속에 뉴질랜드가 없나요? 시조 <어부사시사> 속에 뉴질랜드가 없고 오직 한반도만 있나요? 시조 <어부사시사> 속에서 23.5도 기울기 상태에서 지구가 공전하나요? 시조 화자가 지구 자전축 기울기를 인식하나요?
만약 시조 화자가 태양 적도 측면과 지구 공전 측면 기울기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게 <어부사시사>에서 지구가 똑바로 공전한다는 뜻인가요? 시조 화자가 아니라 시조 작가 윤선도는 어떤가요? <모스라>는 우라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모스라>가 20세기 후반 서구 근대화 SF 영화이기 때문에, <모스라> 제작자들은 우라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반면, 윤선도가 우라늄과 핵 반응을 아나요? 윤선도가 우라늄과 핵 반응을 이야기할 수 있나요? 만약 윤선도가 우라늄을 알지 못한다면, <어부사시사>에서 우라늄이 없나요? 시조 작가가 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시조에도 그게 없나요?
잠시 다른 사례들을 대조해볼까요. 만약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겨울 환경을 묘사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지구 공전 측면 기울기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지구 공전 측면 기울기를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은 지구 생태계를 어느 정도 모방하고 구현합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는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 속에 지구 공전 측면 기울기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Among Ripples>처럼, 만약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네 계절 변화들을 보여준다면, 게임이 지구 공전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여기에 지구 자전축 기울기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생태계 게임이 지구 공전 측면 기울기를 무시할 수 있나요?
반면, 중세 유럽 판타지 <엘더 스크롤 V: 스카이림>은 어떤가요? <엘더 스크롤 V: 스카이림>은 웅장하고 스산한 겨울 풍경을 묘사합니다. <스카이림>에서 겨울 풍경은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웅장하고 스산한 겨울 풍경을 즐깁니다. 하지만 왜 탐리엘 북방이 겨울인가요? 고도 때문에? 행성 자전축 기울기와 행성 공전 궤도가 여기에 영향을 미치나요? 항성 적도 측면을 향해 행성 공전 측면이 기울기 때문에, 지구에서 겨울이 나타나는 것처럼, 스카이림이 웅장하고 스산한 겨울 풍경을 자랑하나요? <엘더 스크롤 V: 스카이림>은 21세기 초반 게임입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가 여기에 천문학을 적용할 수 있나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세 유럽 판타지들은 근대 과학과 다소 거리를 둡니다.
<어부사시사>에는 겨울 풍경이 있습니다. 생태계 게임으로서 <Among Ripples>는 계절 변화들을 묘사합니다. <엘더 스크롤 V: 스카이림>에는 웅장하고 스산한 북방 겨울 풍경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부사시사>는 서구 근대화 이전 시조입니다. <Among Ripples>는 21세기 초반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Among Ripples>는 서구 근대화를 거쳤고, 동시에 이 게임은 서구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엘더 스크롤 V: 스카이림>은 21세기 초반 게임이나, 동시에 이 게임은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중세 유럽 판타지들과 서구 근대화(특히, 여러 자연 과학들) 사이에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가 행성 공전 측면 기울기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중세 판타지 팬은 "아니, 이게 뭐야? 이건 엉터리야! 어떻게 행성 공전 측면이 기울지 않았음에도, 겨울 하늘이 눈송이들을 뿌릴 수 있지?"라고 반박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장르 공식입니다. 중세 판타지 팬은 현실 속의 천문학과 중세 판타지 장르 공식을 함께 고려하고 중세 판타지 속의 겨울 풍경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다른 것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스카이림은 북유럽 문화를 모방하는 것 같습니다. <스카이림>은 탐리엘 북방 문화가 북유럽 문화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
<스카이림>이 "게임 플레이어 여러분, 탐리엘 북방 문화는 북유럽 문화를 모방합니다."라고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탐리엘 북방 문화가 북유럽 문화를 모방하거나 적어도 두 가지 사이에 아주 커다란 유사성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현실 속의 북유럽 문화를 참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현실 속의 계절 변화들을 참고하고 기술적인 자연 환경을 해석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현실 속의 북유럽 문화를 참고하고 탐리엘 북방 문화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창작물이 뭔가를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현실을 참고하고 창작물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현실 속의 계절 변화들을 참고하고 기술적인 자연 환경을 해석하거나, 현실 속의 북유럽 문화를 참고하고 <스카이림>을 해석할 수 있다면, 독자는 현실 속의 천문학을 참고하고 서구 근대화 이전 시조를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서구 근대화 이전에 문학 작가들은 지구 공전 기울기와 공전 궤도를 알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만약 그들이 지구 공전 기울기를 알지 못했다면, 서구 근대화 이전 문학들 속에 겨울 풍경이 있다고 해도, 21세기 초반 독자가 지구 공전 기울기를 부정하거나 외면해야 하나요? 고대 문학 속에서 태양 적도 측면을 향해 지구 공전 측면이 똑바로 서나요? 만약 작가나 화자가 알지 못한다면, 문학 속에 그게 반드시 없나요?
[게임 플레이어는 중세 판타지 공식을 고려하고 중세 판타지와 현실 관계를 함께 고려할 수 있습니다.]
만약 시조 작가 윤선도가 태양 적도 측면을 향하는 지구 공전 측면 기울기를 알지 못한다면, 시조 <어부사시사>에서 지구가 비스듬히 공전하지 않나요?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겨울 하늘이 하얀 눈송이들을 뿌리나요? 이 게시글은 <어부사시사>를 주로 이야기하나, <어부사시사>는 수많은 사례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독자는 다른 사례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많은 문학들은 자연 생태계를 예찬했습니다. 하지만 중세 문학 작가들은 진화 이론을 알지 못했습니다. 중세 문학 작가들이 진화 이론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중세 문학들 속에서 자연 생태계가 진화하지 않나요?
중세 문학 작가들이 진화 이론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독자가 중세 문학 속의 까마귀가 용궁류(龍弓類, Sauropsid)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하나요? 여기에서 독자 위치 역시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일반적인 독자들은 조선 시대 천문학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할 겁니다. 만약 독자가 조선 시대 천문학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독자가 <어부사시사> 속에서 지구가 비스듬히 공전한다고 해석하지 못하나요? <어부사시사> 속의 비스듬한 지구 공전을 해석하기 위해 독자가 조선 천문학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나요? 만약 독자가 조선 천문학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독자가 <어부사시사>를 해석하지 못하나요?
많은 독자들은 작가 의도를 중시합니다. 독자들이 문학을 해석할 때, 작가 의도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심지어 많은 독자들은 오직 작가 의도에만 매달립니다. 만약 어떤 독자가 작가 의도 및 소설 설정에서 벗어난다면, 다른 많은 독자들은 그 독자를 힐난할 겁니다. "이건 엉터리 해석이야! 작가는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어! 작가는 이것을 의식하지 못했어! 소설은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아! 독자는 오직 소설이 이야기하는 것만 이해해야 해! 그래서 이건 엉터리 해석이야! 독자는 작가 의도를 추구해야 해!" 네, 독자는 작가 의도를 추구해야 합니다. 문학 해석에서 작가 의도는 아주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독자가 오직 작가 의도에만 매달려야 하나요?
만약 윤선도가 우라늄을 알지 못한다면, <어부사시사> 속의 자연 환경에 우라늄이 없나요? 만약 윤선도가 지구 자전축 기울기와 지구 공전을 알지 못한다면, <어부사시사>에서 지구가 비스듬히 공전하지 않나요? 만약 <어부사시사>에서 지구가 비스듬히 공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겨울 하늘이 하얀 눈송이들을 뿌릴 수 있나요? 21세기 초반 독자가 태양 적도 측면을 향하는 지구 공전 측면 기울기를 인식한다고 해도, 독자가 오직 윤선도 의도만 반드시 추구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만약 윤선도가 태양 적도 측면을 향하는 지구 공전 측면 기울기를 알지 못했다고 해도, 21세기 초반 독자는 <어부사시사>에서 23.5도 기울어진 상태에서 지구가 공전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흐음,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많은 사람들은 지구와 태양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에 겨울이 나타난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교육자들, 지식인들조차 이것을 믿을지 모릅니다. 이건 흔한 오해입니다. 만약 이것을 믿는 어떤 작가가 겨울 풍경을 묘사한다면, 작가가 지구와 태양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에 겨울이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에, 독자가 공전 측면 기울기를 무시하고 지구와 태양 거리 때문에 겨울이 나타난다고 해석해야 하나요? 독자가 작가 의도를 반드시 따라가야 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뭐라고 작가가 믿든, 독자는 현실 속의 천문학을 참고하고 공전 측면 기울기 때문에 겨울이 나타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 역시 비슷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왜 겨울이 나타나는지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이들에게 지구 자전축 기울기는 이해하기가 힘든 이론일지 모릅니다. (솔직히 지구 자전축 기울기보다 지구와 태양 거리는 훨씬 쉬운 이론입니다. 하지만 쉬운 이론은 반드시 옳은 이론이 아닙니다.) 아이가 지구 자전축 기울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아이 역시 문학을 쓸 수 있습니다. 만약 아이가 문학을 쓴다면, 아이가 지구 자전축 기울기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가 왜 문학 속에 겨울이 있는지 해석하지 말아야 하나요? 독자가 작가 의도(아이의 이해력)를 반드시 따라야 하나요? 문학 속의 겨울을 해석하기 위해 독자가 얼마나 아이가 천문학 지식을 습득했는지 분석해야 하나요? 분명히 이런 분석에는 가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해석의 전부인가요? 독자가 작가 의도가 전부라고 이해해야 하나요?
만약 윤선도가 뉴질랜드 기후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독자는 <어부사시사>에 뉴질랜드가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시조 화자가 겨울 바다를 노래하는 동안, 뉴질랜드 마오리 사람들은 여름 풍경을 구경할 겁니다. 독자는 <어부사시사>가 서구 근대화 이전 문학이라고 인식하고, 동시에 독자는 현실 속의 천문학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작가 의도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작가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합니다. 작가는 모든 현실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학은 모든 현실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작가와 문학이 모든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반영하지 못함에도, 만약 독자가 오직 작가 의도에만 매달린다면, 해석은 너무 비좁은 시각이 될 겁니다.
어떤 소설 속에서 모든 여자 등장인물이 수동적이고 조신하다고 해도, 소설 작가가 "모든 여자는 태생적으로 수동적이고 조신하다."고 철썩같이 믿는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과 현실 관계를 고려하고 소설 속의 여자 등장인물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문학을 해석하는 동안, 독자는 작가 의도를 고려하고, 동시에 독자는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비록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거나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작가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기 때문에, 독자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