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그림 'S.F.C City' 해석과 솔라펑크 도시 본문
"하늘을 보라. 꿈과 희망을 품어라." 이건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진부한 문구입니다. 이런 위로 문구들은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봐야 하나요? 왜 하늘인가요? 창공은 자유롭고 무한합니다. 지상과 달리, 창공에는 거칠 것들이 없습니다. 지상에서 우리는 바위를 건너고, 진창을 건너고, 산을 건너고, 강을 건너야 합니다. 하지만 창공에서 새들은 자유롭게 날 수 있습니다. 창공에는 장애물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늘, 창공, 비행, 새, 자유, 희망, 꿈을 연결합니다. '새장 속의 새'와 '하늘을 올려다보라'는 문구는 대조적입니다.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 갑갑한 현실을 (간접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쟈스민은 새장을 엽니다. 새들은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쟈스민은 하늘, 날아다니는 새들, 날개들, 빛나는 태양을 올려다봅니다. 쟈스민은 태양을 선망하는 것 같습니다. 하늘에는 비단 새들만 아니라 태양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태양이 빛나기 때문에, 지상은 밝습니다. 만약 태양이 사라진다면, 지상은 어둠컴컴할 겁니다. 태양은 빛입니다. 태양은 선망입니다. 선망을 바라보기 위해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봐야 합니다. 심지어 노래 <Part of Your World> 막판에서 에리얼조차 하늘을 올려다보고 빛을 향해 손을 뻗습니다.
심해에서 에리얼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손을 뻗은 것처럼, 우리 역시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희망과 꿈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투적인 위로 문구를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도시(링크)에서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본다고 해도, 우리는 하늘을 선망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본다고 해도, 우리는 오직 천장만 구경할 겁니다. 그림 속의 도시는 첨단 미래 도시 같습니다. 일반적인 디스토피아 사이버펑크 메트로폴리스와 달리, 그림 속의 도시는 밝고 화사하고 싱그럽습니다. 일반적인 디스토피아 메트로폴리스에서 도시 색감은 우충충하거나 요란합니다.
만약 디스토피아 메트로폴리스가 억압적인 독재 분위기로 흐른다면, 도시 색감은 우중충할 겁니다. 영화 <이퀼리브리엄>이 보여주는 것처럼, 칙칙한 색감은 사람들을 둘러쌀 겁니다. 만약 디스토피아 메트로폴리스가 과장된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흐른다면, 도시 색감은 요란할 겁니다. 비디오 게임 <새틀라이트 레인>처럼, 흔한 사이버펑크 풍경들은 자본주의 도시가 요란하다고 묘사합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이윤만을 노립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상품을 팔고, 팔고, 팔고, 계속 팔아야 합니다. 상품들을 팔기 위해 자본주의는 요란하게 광고합니다. 도시 색감 역시 요란합니다.
디스토피아 메트로폴리스와 사이버펑크 메트로폴리스는 모두 첨단 미래 도시입니다. <이퀼리브리엄>과 <새틀라이트 레인>은 미래 첨단 기술들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의 도시 역시 미래 첨단 기술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와 색감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림 속의 미래 도시는 칙칙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습니다. 전반적인 색감은 하얀색, 파란색, 녹색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얀색이 순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아서 고든 핌의 모험>과 소설 <백경>이 하얀색을 두려워한 것처럼, 종종 하얀색은 무시무시합니다. 만약 처녀 귀신이 하얀 소복을 입고 피를 흘린다면, 이건 긍정적이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얀색은 긍정적인 상징입니다. 소설 <반지 원정대>에서 사루만이 하얀색을 버리고 요란한 색깔들을 치장한 것처럼, 하얀색은 순수합니다. 노래 <신부에게>가 새하얀 드레스, 수줍은 발걸음, 꿈꾸는 설레임을 연결하는 것처럼, 하얀색은 아름답고 정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결혼식장에서 오직 신부만 하얀 드레스를 입고 신랑이 검은 턱시도를 입는지 물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하얀 드레스는 성 차별, 가부장적인 편견인지 모릅니다. 이건 오직 여자만 순결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편견인지 모릅니다. 신부 역시 검은 드레스나 잿빛 드레스, 다른 색깔들을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얀색은 순수합니다. 우리가 순수한 사고 방식을 가리킬 때, 우리는 하얀 캔버스를 언급합니다. 하얀 캔버스가 때묻지 않은 것처럼, 그림 속의 미래 도시는 하얗습니다. 어쩌면 이런 도시는 유토피아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유토피아는 순수해야 합니다. 만약 도시가 더럽고 지저분하고 추레하다면, 도시는 유토피아가 되지 못할 겁니다. 유토피아 같은 도시는 순수해야 하고, 하얀색은 유토피아 같은 도시와 잘 어울립니다. 게다가 하얀색은 첨단 과학과 잘 어울립니다. 과학자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 의사들 역시 그렇습니다. 과학자들, 의사들은 전문가들, 첨단 기술자들입니다.
물론 하얀 의사 가운과 순수함 사이에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하얀 의사 가운은 순수함보다 무균(無菌) 상태를 가리킵니다. 순수함과 무균 상태는 동의어가 되지 못합니다. 무균 상태는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깨끗합니다. 순수함에는 자연이 있으나, 무균 상태는 인위적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과학자들, 의사들이 하얀 가운을 입는 것처럼, 하얀색은 첨단 과학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 속의 미래 도시는 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림 속의 도시에서 또 다른 지배적인 색감은 빛나는 파란색입니다. 하얀색은 배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빛나는 파란색은 역동적인 활기를 더합니다.
파란색은 시원한 색깔입니다. 하얀색은 순수한 분위기를 풍기고, 파란색은 도시에 시원한 분위기를 더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림 속의 도시가 파란색보다 다른 색깔들을 빛낸다면, 이건 다소 어색할지 모릅니다. 빨간색은 위험합니다. 빨간색은 경고입니다. 그림 속의 도시가 붉은색들을 빛내는 순간, 미래 도시는 위험한 디스토피아가 될 겁니다. 노란색은 따뜻합니다. 이미 하얀색이 도시를 따스하게 감쌌기 때문에, 따스한 노란색은 중복이 될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병아리가 노란색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첨단 도시와 유치한 노란색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녹색 역시 중복입니다. 미래 도시에는 삼림 건물들이 있습니다. 삼림 건물들은 녹색 식물들을 보여줍니다.
만약 미래 도시가 녹색들을 빛낸다면, 녹색 삼림 건물과 녹색 불빛들은 중복이 될 겁니다. 보라색은 너무 고급스럽습니다. 분명히 미래 첨단 도시는 온갖 고급 시설들을 자랑하겠으나, 보라색은 귀족적입니다. 하얀 첨단 도시와 시원한 파란 불빛들은 가장 잘 어울립니다. 어쩌면 그림 속에서 천장이 파란 하늘을 막았기 때문에, 곳곳에서 (하늘을 대신하기 위해) 파란 불빛들은 시원하게 빛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건물들부터 공중 교통 수단들까지, 다들 시원한 파란색들을 빛내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유토피아 도시와 자연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녹색 식물은 자연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몇몇 삼림 건물은 녹색 식물들을 싱그럽게 자랑합니다. 그림 속에서 가장 오른쪽 건물은 전형적인 삼림 건물입니다.
어쩌면 그림 속의 미래 도시는 솔라펑크 도시인지 모릅니다. 이름처럼, 솔라펑크 도시는 태양열을 비롯해 재생 에너지를 이용합니다. 여러 솔라펑크 도시들은 하얀색, 파란색, 녹색을 이용합니다. 그림 속의 미래 도시 역시 솔라펑크 도시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미래 도시는 유려한 곡선들을 보여줍니다. 사이버펑크 메트로폴리스들과 달리, 그림 속의 미래 도시에서 곡선들은 두드러집니다. 천장부터 건물 외벽까지, 곳곳에서 곡선들은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사이버펑크 메트로폴리스에서 수직 건물들은 하늘을 위협하는 것 같습니다. 그림 속의 미래 건물은 훨씬 부드럽고 포근합니다.
이런 해석은 논리적입니다. 이런 해석은 미래 도시 그림을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화가가 이것들을 의도했나요? 만약 화가가 이것들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이런 해석이 오류가 되고 엉터리가 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여러 SF 그림들은 하얀색, 파란색, 녹색, 곡선을 이용해 유토피아 같은 미래 도시, 솔라펑크 도시를 묘사합니다. 분명히 현실 속에서 하얀색은 순수한 상징이 되고, 파란색은 시원한 색깔이 되고, 녹색은 대표적인 자연이 됩니다. 곡선은 생태적이고 부드럽고 온화합니다. 구엘 공원처럼, 곡선은 신의 예술, 이상적인 예술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요소들을 이용해 그림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록 화가가 다른 것들을 의도했다고 해도, 화가는 이런 현실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화가는 어떻게 현실 속의 여러 상징들, 기호들이 그림에 영향을 미칠지 고민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화가는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화가는 오롯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화가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화가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림 같은 창작물은 수많은 해석들을 내포할 수 있습니다. 비단 그림만 아니라 소설,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 같은 다른 창작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림 속의 도시는 첨단 미래 유토피아 같으나, 어떤 사람들은 그림 속의 미래 도시가 이상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첫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진부한 위로 문구는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희망을 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쟈스민은 창공과 날아다니는 새들과 태양을 올려다보고, 에리얼은 하늘과 빛을 향해 손을 뻗고 갈구합니다. 하지만 그림 속의 미래 도시에서 시민들이 하늘을 올려다본다고 해도, 시민들은 하늘과 태양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천장이 하늘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에는 거대한 창문들이 있는 것 같으나, 그렇다고 해도 시민들은 하늘과 태양을 쉽게 구경하지 못합니다.
"하늘을 보라. 꿈과 희망을 품어라." 아, 죄송합니다. 그림 속의 미래 도시에서 시민들은 하늘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첨단 미래 도시에서 상투적인 위로 문구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림 속의 미래 도시가 부정적이라고 평가할지 모릅니다. 구불거리는 천장이 하늘을 막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하늘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가가 천장을 그리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화가가 하늘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림 속의 미래 도시에서 부정적인 상징들, 기호들, 요소들보다 긍정적인 상징들, 기호들, 요소들은 훨씬 많습니다.
순수한 하얀색과 시원한 파란색과 싱그러운 녹색 자연과 첨단 과학 기술과 유려한 곡선은 부정적인 상징보다 긍정적인 상징입니다. 미래 도시에는 긍정적인 상징들이 가득합니다. 긍정적인 미래 도시에서 시민들은 하늘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긍정적인 미래 도시에서 "하늘을 보라. 꿈과 희망을 품어라."는 통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미래 도시와 상투적인 위로 문구는 적대적입니다. 만약 시민들이 하늘을 올려다본다고 해도, 시민들은 구불거리는 천장을 봐야 합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구불거리는 천장이 긍정적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구불거리는 천장 덕분에 시민들은 악천후를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을 구경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악천후를 견뎌야 할 겁니다. 언제나 하늘은 맑지 않습니다. 하늘은 비를 뿌리고, 눈을 뿌리고, 벼락을 내리꽂습니다. 엄청난 태풍은 커다란 재앙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악천후를 견뎌야 합니다. 반면, 미래 도시는 천장을 이용해 악천후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1년 동안, 미래 도시는 온화한 상태를 계속 유지할지 모릅니다. TV 날씨 예보는 "내일은 소나기입니다. 우산들을 준비하세요."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미래 도시 시민들은 구불거리는 천장이 좋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구불거리는 천장은 긍정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진부한 위로 문구가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하늘을 올려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래 그림 도시, 사이언스 픽션은 고정 관념을 깨뜨립니다. 인간이 하늘을 올려다볼 때, 인간은 하늘보다 구불거리는 첨단 천장을 올려다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부한 위로 문구는 그저 불쏘시개 문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SF 팬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진부한 사고 방식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누가 아나요? 자본주의 사회 역시 고정 관념입니다. 어쩌면 미래 첨단 도시는 사회주의 도시, 계획 경제 도시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