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다섯 번째 계절>과 신조어 '보니다' 본문
"어떻게 땅이 움직이는지 보니기 위해 라임스톤은 살짝 주변을 둘러봤다. 라임스톤은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라임스톤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니지 못했다." 만약 독자가 이 문구를 읽는다면, 독자는 뭔가가 어색하다고 느낄 겁니다. 이 문구가 생소한 동사 '보니다'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문구 속에서 등장인물 라임스톤은 땅을 보닙니다. 라임스톤은 어떻게 땅이 움직이는지 보닙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보니다'가 무슨 뜻인가요? 이건 인간이 지각 변동을 파악한다는 뜻 같습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지각 변동 연구를 '보니다'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지질학자와 지진계가 지각 변동을 조사한다고 해도, 우리는 지질학자와 지진계가 땅을 '보닌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동사 '보니다'는 인간이 움직임을 본다는 표현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지각 변동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나요? 만약 지진이 일어난다면, 인간은 진동을 느낄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진동(지진)을 느낀다고 해도, 이건 '보니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이 지진을 보닌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진동을 느낍니다. 동사 '보니다'와 지각 변동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으나, 일상에서 지각 변동을 위해 우리는 특정한 동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보니다'는 일반적인 동사, 일상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보니다'는 SF 소설 속의 신조어입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는 조산술사들, 오로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지 초능력자들입니다. 오로진들은 바위를 들어올리거나, 지진을 일으키거나, 용암을 끌어올리거나, 지하 열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대지 초능력자로서 오로진들은 지각 변동을 느끼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오로진들은 이것을 '보니다'라고 표현합니다. 지각 변동을 느끼고 파악하기 위해 오로진들에게는 '보님 기관'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보님 기관이 없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땅을 보니지 못합니다.
오로진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을 '둔치들'이라고 비하합니다. 만약 지각이 움직인다면, 오로진들은 이것을 보니고 지각 변동을 멈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로진들은 지진, 화산 폭발, 해일 같은 재앙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반면, 둔치들은 지각을 보니지 못합니다. 마그마가 흐른다고 해도, 둔치들은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용암이 흐른 이후, 둔치들은 비명을 지르고 도망칩니다. 오로진들에게 소설 <다섯 번째 계절> 독자들 역시 둔치들입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지각 변동을 보니지 못합니다. 만약 강한 지진이 일어나고, 우리가 지진을 느낀다고 해도, 이건 '보니다'가 아닙니다.
오로진들이 지각 변동을 보닌다고 해도, 우리 같은 둔치들은 이게 무슨 느낌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과 저 같은 둔치들은 어떻게 오로진이 땅을 보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라임스톤이 땅을 보니는 동안, 우리는 라임스톤이 뭔가를 찾거나 느낀다고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라임스톤에게 공감하지 못합니다. 라임스톤에게는 보님 기관이 있으나,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보님 기관이 없음에도, 어떻게 우리가 라임스톤에게 공감할 수 있나요? 우리는 라임스톤이 땅을 보닌다고 상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건 감정적인 공감이 아닙니다.
향유 고래는 초음파를 발사하고 대왕 오징어를 찾습니다. 깊고 깊은 바닷속은 너무 어두우나, 막막한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향유 고래는 초음파를 발사하고 대왕 오징어를 찾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초음파를 발사하지 못합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들처럼, 우리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른다고 해도, 우리는 초음파를 발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소리만으로 주변 사물들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향유 고래에게는 초음파를 느끼기 위한 신체 기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상황을 이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공감하지 못합니다.
향유 고래가 초음파를 받을 때, 이게 무슨 느낌인가요? 우리는 이런 느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느낌을 추측한다고 해도, 아무리 이게 논리적인 추측이라고 해도, 이건 공감이 되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향유 고래가 느끼는지 공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직접 느끼지 못합니다. 많은 동물들은 뛰어나고 기이한 감각들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추측할 수 있으나, 이건 선험 지각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메리의 방 실험과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우리가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우리는 방 구조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옆동네 철수가 엉덩방아를 찧을 때, 이웃집 영희는 옆동네 철수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 역시 엉덩방아를 찧은 적이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이런 감정을 이용해 옆동네 철수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몸'이라는 유물론 관점에서 옆동네 철수와 이웃집 영희는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똑같은 경험인가요?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가 엉덩방아를 찧은 적이 있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보다 옆동네 철수는 엉덩방아를 훨씬 거칠게 찧었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이웃집 영희가 엉덩방아를 거칠게 찧었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보다 옆동네 철수는 '너무 거칠게' 찧었을지 모릅니다.
옆동네 철수와 달리, 이웃집 영희는 엉덩방아를 '너무 거칠게' 찧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너무 거칠게' 찧은 적이 없고, 옆동네 철수가 '너무 거칠게' 찧었다면, 이웃집 영희가 옆동네 철수에게 공감할 수 있나요? 이런 공감이 가식이나 위선, 허세, 망상이 아닌가요?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에게 똑같은 '몸'이 있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보다 옆동네 철수는 훨씬 훤칠하고 훨씬 무겁습니다. 이웃집 영희보다 옆동네 철수는 훨씬 근육질입니다. 여자로서 이웃집 영희에게는 두 젖가슴이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보다 이웃집 영희는 '물리적으로' 부드럽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에게 이런 여러 차이들이 있음에도, 이웃집 영희가 옆동네 철수에게 공감할 수 있나요? 이웃집 영희가 여자이고, 옆동네 철수가 남자이기 때문에, 영희는 철수에게 절대 공감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웃집 영희가 여자이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아기를 갖고, 아기를 낳고, 아기를 먹일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느낌인가요? 영희가 젖꼭지를 이용해 젖을 주는 동안, 뭐라고 이웃집 영희가 느끼나요? 옆동네 철수가 이웃집 영희에게 공감할 수 있나요? 옆동네 철수가 이웃집 영희를 간접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옆동네 철수는 직접 느끼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 추상적인 감정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언어가 사회적인 기호, 지배적인 기호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 추상적인 감정을 간접적으로 공유할 수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절대 젖꼭지를 이용해 아기를 먹이지 못하나, 언어 덕분에, 옆동네 철수는 이웃집 영희에게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건 약간 간지러워. 이건 약간 흥분을 일으켜. 무엇보다 내 몸의 일부는 빠져나가고 아기에게 가는 중이야." 이렇게 이웃집 영희는 뭐라고 자신이 느끼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직접 느끼지 못하나, 언어가 사회적인 기호, 지배적인 기호이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기호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 사이에는 비단 '몸'만 아니라 사회적인 기호, 지배적인 기호가 있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이웃집 영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어떤 언어에는 이런 느낌, 젖을 먹이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가 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인류 사회는 이런 단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할지 모릅니다. 국어 사전에는 "살먹임: 여자가 젖을 먹이는 동안, 여자가 느끼는 감정"이 있을지 모릅니다.
언젠가 옆동네 철수는 '살먹임'이라는 단어를 읽고 이게 무슨 단어인지 이해할지 모릅니다. 이웃집 영희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옆동네 철수는 단어 '살먹임'을 읽고 뭐라고 여자가 느끼는지 이해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옆동네 철수는 살먹임을 직접 느끼지 못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그저 사회적인 기호, 지배적인 기호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옆동네 철수가 남자이기 때문에, 만약 옆동네 철수가 사이버펑크 같은 가상 현실 장치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평생 동안 옆동네 철수는 '살먹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영희와 철수는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는 사회적인 기호 '살먹임'을 이용해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건 영희와 철수가 '살먹임'을 이용해 100% 교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기호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우리는 뭐라고 서로가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이고, 답답해. 아니, 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지?" 이렇게 우리는 따집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회적인 기호, 지배적인 기호를 이용한다고 해도, 이건 부족한 기호입니다. 해양 동물학자는 어떻게 향유 고래가 초음파를 받는지 설명하고, 학생들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이런 소통은 100% 완벽하지 않습니다. 기호는 그저 기호에 불과합니다.
[우리 신체와 향유 고래 신체는 다릅니다. 초음파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가 언어를 만들 수 있나요?]
학생들이 초음파를 직접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해양 동물학자가 열심히 설명한다고 해도, 학생들은 향유 고래를 직접 느끼지 못합니다. 오로진들에게도 이건 문제가 됩니다. 오로진이 땅을 보닌다고 해도, 둔치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둔치들은 동사 '보니다'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동사 '보니다'는 사회적인 기호, 지배적인 기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로진들에게는 다른 감정들이 있습니다. 오로진들에게는 '보니다' 이외에 다른 느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로진들은 표현하지 못합니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지의 품 속에서 라임스톤은 뭔가를 느낍니다. 하지만 라임스톤은 이것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라임스톤은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이용해 이것을 표현할 수 있으나, 이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만약 라임스톤이 다른 오로진들과 함께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이것을 널리 퍼뜨리고, 이게 사회적인 기호가 된다면, 라임스톤은 뭐라고 자신이 느끼는지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적인 기호가 나타나기 전까지, 라임스톤은 부족한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새로운 사회적인 기호가 나타난다고 해도, 둔치들은 그저 기호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이건 100% 완벽한 교감이 아닙니다.
SF 작가에게도 이건 문제가 됩니다. SF 작가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기 원합니다.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기 위해 SF 작가는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첫째 문단부터 여덟째 문단이 계속 설명한 것처럼, 언어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그저 사회적인 기호에 불과합니다. SF 작가가 '부족한 언어'를 이용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표현할 수 있나요? 독자가 이것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나요? 독자가 이해한다고 해도, 이게 그저 간접적인 이해에 불과하지 않나요? 현실 속에서 여자들이 젖을 먹임에도, 옆동네 철수는 '살먹임'을 완벽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초인이 아닙니다. 수유는 초능력이 아닙니다. 하지만 옆동네 철수는 '살먹임'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만약 SF 작가가 초능력을 묘사한다면, 이건 훨씬 커다란 문제가 될 겁니다. 현실에 초능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SF 작가가 열심히 설명한다고 해도, 이건 부족한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SF 소설을 읽기는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SF 작가가 소설을 쓰는 동안, SF 작가는 언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SF 작가는 어떻게 작가와 독자가 함께 사회적인 기호를 이용하고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