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부엉이 울음소리와 딜로포사우루스 본문
소설 <쥬라기 공원>은 딜로포사우루스가 부엉거린다고 표현합니다. 부엉이처럼, 소설 속에서 딜로포사우루스는 부엉거립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딜로포사우루스가 나타날 때, 소설 시점은 데니스 네드리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밀림 속에서 데니스 네드리는 부엉이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딜로포사우루스는 부엉이와 다르게 울었는지 모릅니다. 소설 시점이 데니스 네드리에게 초점을 맞췄고, 데니스 네드리가 부엉이 울음소리를 느꼈기 때문에, 소설 시점은 부엉이처럼 딜로포사우루스가 운다고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소설 속에서 주체는 데니스 네드리입니다.
그래서 소설 시점은 부엉이 울음소리와 딜로포사우루스를 연결하는지 모릅니다. 독자는 이것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소설 시점이 데니스 네드리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소설 시점은 부엉이가 운다고 묘사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엘리 새틀러가 딜로포사우루스를 만났다면, 소설 시점은 다른 의성어를 선택했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 장면에서 오직 데니스 네드리만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소설에서 딜로포사우루스가 나타났을 때, 데니스 네드리 이외에 다른 등장인물들은 없습니다. 어쩌면 딜로포사우루스는 부엉이와 다르게 울었는지 모르나, 독자는 울음소리를 확인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직접 확인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 어렵습니다. 이미 딜로포사우루스가 멸종했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직접 확인하지 못합니다. 만약 현실 속에 살아있는 딜로포사우루스가 있다면, 독자는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데니스 네드리(를 이야기하는 소설 시점)는 부엉이처럼 딜로포사우루스가 운다고 묘사하나, 독자는 현실 속의 딜로포사우루스를 참고하고 데니스 네드리가 잘못 묘사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딜로포사우루스는 멸종했습니다. 고생물학자들은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고증할 수 있으나, 고생물학자들이 100% 고증할 수 있나요?
만약 고생물학자들이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100% 고증하지 못한다면, 독자는 딜로포사우루스가 부엉이와 비슷하게 우는지 확인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고생물학자들이 100% 고증한다고 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에서 딜로포사우루스는 순수한 천연 공룡이 아닙니다. 소설 속에서 모든 공원 공룡은 개조 생명체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생체 개조 과정은 공원 공룡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만약 공원 딜로포사우루스와 천연 딜로포사우루스가 다르다면, 울음소리 역시 다를 겁니다. 고생물학자들이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복원한다고 해도, 이건 데니스 네드리를 검증하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소설 속에서 다른 상황들 때문에, 데니스 네드리는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와 부엉이를 연결했는지 모릅니다. 소설 속에서 데니스 네드리가 딜로포사우루스를 만났을 때, 데니스 네드리는 너무 다급했습니다. 폭풍은 열대 섬을 강타했고, 폭우 속에서 데니스 네드리는 다급하게 방향을 잡아야 했습니다. 데니스 네드리는 너무 곤란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이런 곤란한 상황 속에서 데니스 네드리는 온전한 사고를 유지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다양한 상황들 속에서 인간은 다양한 것들을 느낍니다. 옆동네 철수가 재미있는 SF 소설을 읽는 동안, 철수는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흐른다고 느낍니다. 철수가 지루한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를 읽는 동안, 철수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른다고 느낍니다.
재미있는 SF 소설과 지루한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를 읽기 위해 옆동네 철수가 똑같이 1시간을 소비한다고 해도, 옆동네 철수는 양쪽 1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느낍니다. 재미있는 SF 소설은 빠른 1시간이고, 지루한 자본주의 경제학 교과서는 느린 1시간입니다. 이웃집 영희가 짜증나는 직장 상사와 함께 회의하는 동안, 1시간은 너무 느리게 흐릅니다. 하지만 만약 크래프트 맥주집에서 이웃집 영희가 옆동네 철수와 함께 알싸한 IPA를 즐긴다면, 1시간은 아주 빠르게 흐를 겁니다. 심지어 3시간조차 아주 빠르게 흐를 겁니다. 시간은 상대적입니다. 짜증나는 회사 회의는 너무 느린 1시간이고, 심쿵심쿵한 저녁 데이트는 아주 빠른 3시간입니다. 상황은 시간을 조절하고, 인간은 다른 시간을 느낍니다.
상황이 인간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데니스 네드리 역시 온전한 사고를 유지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극심한 폭우 속에서 데니스 네드리는 빨리 방향을 잡아야 했고, 데니스 네드리는 제대로 감각들을 유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가 다르다고 해도, 데니스 네드리는 부엉이처럼 딜로포사우루스가 운다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데니스 네드리는 이게 진짜 부엉이 울음소리가 아니라고 직감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데니스 네드리는 이것과 부엉이 울음소리가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엘리 새틀러는 다르게 느낄지 모르나, 엘리 새틀러는 딜로포사우루스를 만나지 않습니다.
다른 등장인물이 부엉이 울음소리와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가 비슷하다고 느낀다고 해도, 독자가 데니스 네드리(를 이야기하는 소설 시점)를 의심하는 것처럼, 독자는 다른 등장인물들을 계속 의심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가 다르다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의심에 불과합니다. 독자는 확인하지 못합니다. 현실에 딜로포사우루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에서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는 정말 비슷한지 모릅니다. 아니면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는 너무 다른지 모릅니다. 독자는 확인하지 못합니다.
어제 10월 29일 게시글이 설명한 것처럼, 소설 <우주 전쟁>에도 이것과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소설 <우주 전쟁>에서 소설 주인공은 화성 삼발이가 "알루~ 알루~" 소리지른다고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게 객관적인 의성어인가요? 정말 화성 삼발이가 "알루~ 알루~" 소리지르나요? 다른 등장인물들이 여기에 동의하나요? 독자가 데니스 네드리와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의심하는 것처럼, 독자는 소설 주인공과 화성 삼발이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쥬라기 공원>에서 데니스 네드리가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주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우주 전쟁>에서 소설 주인공은 화성 삼발이 소리를 주관적으로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쥬라기 공원>에서 엘리 새틀러는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와 "부엉~ 부엉~"을 연결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주 전쟁>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은 화성 삼발이 소리와 "알루~ 알루~"를 연결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독자는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의심에 불과합니다. 독자는 확인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확인하고 싶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현실에 살아있는 딜로포사우루스가 없는 것처럼, 현실에는 화성 삼발이가 없습니다. 심지어 아무도 화성 삼발이를 고증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고생물학자들은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고증할 수 있으나, 아무도 화성 삼발이를 고증하지 못합니다. 허버트 웰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딜로포사우루스와 화성 삼발이는 똑같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딜로포사우루스와 화성 삼발이를 만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화성 삼발이는 훨씬 비일상적입니다. 딜로포사우루스는 멸종했으나, 화성 삼발이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독자가 현실을 참고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는 정말 화성 삼발이가 "알루~ 알루~" 소리지르는지 확인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의심하나, 이건 의심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특히, <우주 전쟁>이 1인칭 주인공 시점 소설이기 때문에, 이건 훨씬 문제가 됩니다. <쥬라기 공원>은 전지적 작가 시점 소설입니다.
<쥬라기 공원>이 소설 화자로서 여러 등장인물들을 골고루 제시하기 때문에, <쥬라기 공원>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것 같습니다. 비록 데니스 네드리가 딜로포사우루스를 혼자 만난다고 해도, <쥬라기 공원>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이용해 데니스 네드리를 묘사합니다. 반면, <우주 전쟁>에서 소설 화자와 소설 시점은 상당히 가깝습니다. <쥬라기 공원>에서 '데니스 네드리'는 딜로포사우루스를 만나나, <우주 전쟁>에서 '나'는 화성 삼발이를 목격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부엉~ 부엉~"보다 "알루~ 알루~"가 훨씬 주관적이라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소설 화자가 유일한 창문이기 때문입니다.
독자가 <쥬라기 공원>을 읽는 동안, 독자는 여러 등장인물들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엘리 새틀러부터 조연 등장인물까지, 여러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내면들을 드러냅니다. 반면, <우주 전쟁>에서 소설 화자는 소설 속의 세상을 비추는 유일한 창문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로서 <우주 전쟁>은 여러 등장인물들을 보여주나, 그렇다고 해도 최종적인 창문은 소설 화자입니다. 만약 소설 화자가 창문을 검게 칠한다면, 독자는 소설 속의 세상이 검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만약 <우주 전쟁>이 주류 문학이라면, 독자는 현실과 소설을 비교하고 소설 화자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 전쟁>은 SF 소설이고, 독자는 현실과 소설을 비교하지 못합니다. 소설 화자는 화성 삼발이가 "알루~ 알루~" 소리지른다고 묘사하고, 독자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쥬라기 공원>보다 <우주 전쟁>은 훨씬 주관적입니다. 하지만 결국 두 소설에서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와 화성 삼발이 소리는 모두 주관적일 겁니다. "부엉~ 부엉~"은 주관적인지 모르고, "알루~ 알루~"는 주관적인지 모릅니다. <쥬라기 공원>이 부엉이 울음소리를 언급한다고 해도, 이건 '글자'입니다. "알루~ 알루~"는 의성어, '글자'입니다. 독자는 소리를 직접 듣지 못하고 확인하지 못합니다.
만약 '글자' 매체 소설에 이런 단점과 한계가 있다면, 영화는 어떤가요? 원작 소설처럼,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데니스 네드리는 딜로포사우루스를 만납니다. 딜로포사우루스는 웁니다. 어제 게시글이 지적한 것처럼, 관객들은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호숑숑숑~"이라고 표현하고, 옆동네 철수는 "오로로로롱~"이라고 표현하고,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꼬로로로록~"이라고 표현하고, 아랫집 수진은 형용하지 못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형용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소리는 의성어, '글자'가 되지 않습니다. 소리가 의성어가 된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지배적인 기호 '글자'를 의심할 겁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다양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결국 관객들은 똑같은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극장에서 관객들은 똑같은 딜로포사우루스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독서보다 극장 영화 관람은 상대적으로 훨씬 덜 주관적입니다. 2005년 영화 <우주 전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화성 삼발이는 커다란 소리를 들려줍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화성 삼발이 소리를 다르게 표현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형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극장 안에서 관객들은 똑같은 화성 삼발이 소리를 듣습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처럼, 소설 <우주 전쟁> 독서보다 극장 영화 <우주 전쟁> 관람은 상대적으로 훨씬 덜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글자' 매체 소설보다 영화는 훨씬 대중적인 인기를 끕니다. 특히, SF 소설보다 SF 영화를 이해하기는 훨씬 쉽습니다. 하지만 SF 영화를 이해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에, 관객들은 SF 영화를 너무 쉽게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만약 대형 극장이 고화질 영상과 빵빵한 음량과 첨단 시설들을 이용해 온갖 정보들을 쏟아붓는다면, 관객들은 영화 속에 너무 쉽게 빠질지 모릅니다. 만약 관객들이 영화 속에 너무 쉽게 빠진다면, 관객들은 영화를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처럼, 영화는 창작물, 픽션입니다. 창작물에는 문학 장치들이 있습니다. 관객들은 문학 장치들을 의심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반면, SF 소설을 이해하기가 다소 까다롭기 때문에, 독자가 SF 소설을 읽는 동안, SF 독자는 문학 장치들을 의심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소설이 '글자' 매체이기 때문에, 독자는 글자, 언어를 의심할 수 있을 겁니다. 딜로포사우루스 같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표현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언어를 낯설게 다룹니다. "호숑숑숑~" 같은 의성어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합의하거나 우리가 지배적인 체계에 복종하기 때문에, 언어는 나타납니다. SF 독자는 비일상적인 설정과 언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사회적인 기호, 지배적인 기호이기 때문에, SF 독자는 어떻게 사회, 지배적인 체계가 언어를 만드는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고민이 훨씬 넓어진다면, SF 독자는 언어를 이용해 사회 관계를 함께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우리 인간들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들이 꽥꽥거리며 개인과 자유를 멍청하게 부르짖는다고 해도, 심지어 수구 꼴통 정치인의 멍청한 꽥꽥거림조차 '사회 관계'입니다. 그래서 만약 SF 독자가 언어를 고민한다면, SF 독자는 사회 관계를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개인이 아닙니다. 심지어 개인주의, 자유주의는 헛소리, 왜곡, 편견, 차별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사회적인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사회적인 관계들은 우리에게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흔히 우리는 변호사들이 탐욕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변호사들이 탐욕스러운가요? 그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탐욕스럽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변호사들은 탐욕스럽게 돈을 뜯어내기 원합니다. 자본주의가 탐욕스럽기 때문에, 비단 변호사들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람들 역시 탐욕을 추구합니다. 자본주의는 비단 탐욕만 아니라 착취와 수탈, 약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 안에는 여러 약자들이 있습니다. 추운 계절이 다가옴에도, 거리에서 장애인 노동자들은 불편한 육체들을 이끌고 투쟁하고 시위해야 할지 모릅니다. 추위 속에서 장애인 노동자들은 고생하고, 수치들을 겪고, 고통들을 무릅써야 할지 모릅니다. 비일상적인 언어 고민은 이런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건 SF 독서가 사회 관계 고민으로 곧바로, 반드시 이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SF 소설이 언어를 낯설게 이용한다고 해도, 독자는 언어 표현 문제를 간과하고 오직 내용만 파악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어떤 문학 평론가들은 그 자체로서 문학이 사회 참여를 유도한다고 간주하나, 이게 사실인가요?
다른 많은 것들이 그러는 것처럼, SF 소설 역시 그저 도구에 불과합니다. 호미가 고구마를 혼자 캐지 못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SF 소설은 사회 관계 고민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어떻게 SF 소설이 언어를 이용해 비일상적인 설정을 이야기하는지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만약 이렇게 독자가 고민한다면, 독자는 SF 소설(이 다루는 낯선 글자들)과 사회 관계를 깨달을 겁니다. 독자는 우리가 사회적인 존재라고 깨달을 겁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