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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그리워하다>와 SF, 지적 허영심 본문

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그리워하다>와 SF, 지적 허영심

OneTiger 2021. 9. 20. 20:00



"만약 미생물들이 화성 표면을 뒤덮는다면, 화성 표면에서 유기 물질들은 일정한 층을 이루겠지. 이 환경은 산소를 조성하기 위한 조건을 마련할 수 있어. 특히, 아주 낮은 온도 같은 극한 환경에서 미생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어. 몇 천 년짜리 미라, 몇 만 년짜리 빙하에서도 미생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어. 복잡한 생태계가 정착하기 전에, 미생물들은 기초적인 생태계를 이룩해야 해. 하지만 화성에는 자기장이 부족하지. 지구 자기장은 방사능 입자들을 막을 수 있으나, 화성에서 이건 너무 어려워. 자기장이 막지 않기 때문에, 태양풍은 산소를 날려버릴지 몰라."

 

만약 SF 소설에서 개척 생태학자가 이 문구들을 말한다면, 어떤 독자들은 골치가 아프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 문구들이 전문 용어들을 늘어놓기 때문입니다. 미생물, 외계 행성 대기, 유기 물질, 몇 만 년짜리 빙하, 행성 자기장, 방사능 입자들, 태양풍, 산소 형성은 일상적인 단어들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이 단어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몇 만 년짜리 빙하와 방사능 입자들과 행성 자기장과 태양풍을 일상적으로 언급한다면, 으음, 이미 이건 일상보다 비(非)일상에 가까울 겁니다. 이 단어들이 전문적이기 때문에, 이 단어들은 비일상적입니다.



게다가 화성 표면에서 지구 미생물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나요? 아니, 화성 표면이 너무 극한 환경이기 때문에, 아무리 지구 미생물들이 아주 놀라운 생존자들이라고 해도, 극한 외계 환경에서 이 생존자들은 생존하지 못할 겁니다. 지구 미생물들이 쉽게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척 과학자들은 지구 미생물들을 개조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만약 개척 과학자들이 개조 미생물들을 풀어놓지 않는다면, 그들은 유기 물질 산소 형성보다 다른 방법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과학자들이 미생물들을 개조하기 때문에, SF 소설은 전문 용어들을 계속 늘어놓을지 모릅니다.

 

만약 SF 소설이 아미노산 활성화 효소, 뉴클레오타이드, 염기 서열, 소단위체, 핵산 가수 분해를 늘어놓는다면, 어떤 독자들은 골치가 아프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 단어들 역시 과학 전문 용어들입니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이 단어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아미노산 활성화 효소와 염기 서열과 핵산 가수 분해를 일상적으로 언급한다면, 으음, 이미 이건 일상보다 비일상에 가까울 겁니다. 이 단어들이 전문적이기 때문에, 이 단어들은 비일상적입니다. 외계 행성 자기장부터 핵산 가수 분해까지, 사이언스 픽션은 전문 용어들을 아주 신나게 늘어놓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사이언스(과학)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이 사이언스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 전문 용어들을 아주 열심히 늘어놓습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사이언스 픽션이 전문 용어들을 떠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드 SF 소설에게 전문 용어들은 필수적이나, 스페이스 오페라를 비롯해 사이언스 판타지에게 전문 용어들은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가 복잡한 과학 논의를 고증하기보다 신화를 재현하거나 전투에 치중한다면,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과학 전문 용어들은 필수적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심지어 스페이스 오페라조차 전문 용어들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가 전문 용어들을 떠든다면, 스페이스 오페라는 전문가 분위기를 조성할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전문가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주연 등장인물들이 전문가, 엘리트라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주연 등장인물들이 엘리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주연 등장인물들, 엘리트들을 함부로 과소평가하지 못할 겁니다. "아, 젠장, 아무리 아주 빠른 입자가 빛의 속도를 자랑한다고 해도, 사건의 지평선에서 이 입자는 무한대 시간과 공간으로 탈출하지 못해!!"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탐사선 1등 항법사가 사건의 지평선과 무한대 시간과 민코프스키 공간과 진공의 에너지 밀도 물리 상수를 운운한다면, 1등 항법사는 전문가, 엘리트 분위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주연 등장인물이 엘리트 분위기를 팍팍 풍기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전문 용어들을 열심히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유럽 판타지가 비슷하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처럼, 중세 판타지는 전문 용어들을 열심히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만약 마법사가 어려운 주문 용어들을 떠든다면, 마법사는 전문가, 엘리트 분위기를 풍길 겁니다.

 

"아니, 뭐야? 어떻게 철학자의 돌이 에테르 상수를 뒤집을 수 있지? 아스트랄 차원에서 이건 불가능해! 마나가 극소점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위상 전이는 이 현상을 막을 거야. 이미 제3차 위상 학술 대회에서 소르노스-안스트라스 학파는 이것을 증명했어!" 마법사는 이 문구들을 떠들고 엘리트 분위기를 팍팍~ 풍길 수 있습니다. 만약 마법사들이 어려운 주문 용어들을 떠든다면, 전사들은 한숨을 쉬거나, 땅을 내려다보거나, 뒷통수를 긁을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판타지는 전문 용어들을 늘어놓고 주연 등장인물들이 엘리트라고 팍팍~ 강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중세 판타지가 마법 용어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현실에서 마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법과 달리, 현실에서 과학은 존재합니다. 과학자들은 사건의 지평선과 무한대 시간과 민코프스키 공간과 진공의 에너지 밀도를 진지하게 논의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미래 첨단 과학을 묘사하고, 현실에서 미래 과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법이 비(非)현실 세계에 속하는 것처럼, 미래 과학은 비현실 세계에 속하나, 적어도 과학 그 자체는 현실입니다. 마법 그 자체는 현실이 아니나, 과학 그 자체가 현실이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현실적입니다.

 

적어도 중세 유럽 판타지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현실(주의)적이고, 소르노스 학파 마법사보다 탐사선 1등 항법사는 현실(주의)적입니다. 과학 그 자체가 현실이고, 스페이스 오페라가 어려운 과학 용어들을 늘어놓을 수 있기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는 전문가 분위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전문가 분위기를 훨씬 팍팍~ 풍깁니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에게 엘리트 분위기는 장르 전형입니다. 독자들은 하드 SF 소설이 전문가 분위기를 풍긴다고 기대합니다. 만약 하드 SF 소설이 장르 전형을 외면한다면, 독자들은 실망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전문가 분위기, 엘리트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지적 허영심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여러 예술들, 문화들 중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지적 허영심을 가장 자극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어떤 예술이 커다란 인기를 끈다고 해도, 이 예술보다 SF 소설은 지적 허영심을 훨씬 자극할지 모릅니다. 아이돌 그룹 비투비는 <그리워하다>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아주 서정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비투비와 <그리워하다>를 좋아합니다. <그리워하다>는 커다란 인기를 끕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듣고 눈시울들을 적시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그리워하다>를 듣고 촉촉한 눈시울들을 적신다고 해도, <그리워하다>는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이 노래가 전문 용어들을 늘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서은광이 목청을 높인다고 해도, 아무리 이민혁이 서글픈 랩을 쏟는다고 해도, 아무리 이창섭이 목소리를 긁는다고 해도, <그리워하다>는 전문 용어들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이 노래는 엘리트 분위기를 팍팍 풍기지 않고, 이 노래가 엘리트 분위기를 풍기지 않기 때문에, 이 노래는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아니, 엘리트 분위기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망칠 겁니다.



독자들은 SF 소설이 엘리트 분위기를 풍긴다고 기대할 수 있으나, 아무리 SF 소설보다 <그리워하다>가 훨씬 커다란 인기를 끈다고 해도, 이 노래보다 SF 소설은 지적 허영심을 자극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SF 소설)보다 <그리워하다>가 지적 허영심을 자극한다고 해석할지 모르나, 심지어 그들조차 <그리워하다>보다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이 어려운 전문 용어들을 늘어놓는다고 인정할 겁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워하다>가 어려운 용어들을 늘어놓는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이 노래보다 SF 소설에게는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기 위한 높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비단 <그리워하다>만 아니라 다른 예술들, 문화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워하다>와 달리, 어쩌면 어떤 예술은 어려운 용어들을 늘어놓는지 모르나, 아무리 이 예술이 전문 용어들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이 예술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지적 허영심을 자극할 겁니다. 의학 드라마, 법정 드라마는 어려운 전문 용어들을 늘어놓습니다. 의학 드라마, 법정 드라마에서 어려운 전문 용어들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어떤 드라마들은 자막들을 집어넣고 전문 용어들을 설명합니다. 법정 드라마와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SF 소설)이 전문 용어들을 늘어놓기 때문에, 두 가지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법정 드라마보다 SF 소설은 지적 허영심을 훨씬 자극할지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SF 소설이 미래를 전망하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사람들은 리보핵산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유전 공학이 남조류를 개조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17세기 사람들이 똑똑했다고 해도, 그들은 우주 환경에서 곰벌레가 살아남는다고 알지 못했습니다. 반면, 21세기 초반 과학자들은 리보핵산을 알고, 유전 공학과 개조 남조류를 알고, 우주 환경과 곰벌레 생존 실험을 압니다. 과학이 발달하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과학자들보다 17세기 사람들은 무지합니다.

 

21세기 초반 과학자들보다 17세기 사람들이 무지한 것처럼, 26세기 과학자들보다 21세기 초반 사람들은 무지할 겁니다. 21세기 초반 우리보다 26세기 과학자들은 훨씬 많은 사실들을 이해할 겁니다. 우리보다 미래 과학자들이 훨씬 많은 지식들을 알고,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이 미래 과학자들을 묘사하기 때문에, 법정 드라마가 미래 사람들을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은 지적 허영심을 훨씬 자극할 수 있습니다. 이 사례처럼, 아무리 어떤 예술이 어려운 전문 용어들을 떠든다고 해도, 이 예술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지적 허영심을 훨씬 자극할지 모릅니다.



<그리워하다>처럼, 많은 예술들은 지적 허영심을 자극하지 않습니다. 많은 예술들은 지적 허영심과 필수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법정 드라마처럼, 테크노 스릴러는 지적 허영심을 자극할 수 있으나, 테크노 스릴러는 미래 과학자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만약 테크노 스릴러가 사이언스 픽션이라면, 테크노 스릴러는 미래 과학자를 묘사할 수 있으나, 테크노 스릴러에게 사이언스 픽션은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법정 드라마보다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이 미래 과학자를 묘사하는 것처럼, 아무리 어떤 예술이 지적 허영심을 자극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자극합니다.

 

다른 예술들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지적 허영심을 훨씬 자극하기 때문에, 이건 SF 우월론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비투비? 아이돌? <그리워하다>? 흥, 이 노래는 엘리트 분위기를 풍기지 않아. <그리워하다>는 그저 서정적인 가락들만 늘어놓을 뿐이야. 반면,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은 훨씬 지성적이야. 그래서 아이돌 팬보다 SF 독자는 훨씬 지성적이야. SF 독자보다 아이돌 팬은 무식해. 내가 우주 개척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돌 팬들보다 나는 지성적이야. 후훗, 나는 똑똑하고 기발해." 만약 이렇게 SF 독자가 자만한다면, 이 SF 자만심에게는 근거가 어느 정도 있을 겁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지적 허영심을 자극한다고 해도, 문자 그대로 이건 그저 허영심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사이언스(과학)에게 기반한다고 해도, 아무리 하드 SF 소설에서 사이언스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 그 자체가 과학적인 사고 방식을 필연적으로 보장하나요? 언제나 모든 사이언스 픽션이 과학적인 사고 방식을 필연적으로 보장하나요? 17세기 계몽주의부터 19세기 산업 혁명까지, 서구 사회에서 과학이 발달하는 동안, 서구 사회는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착취했고, 수탈했고, 강간했습니다.

 

서구 사회에서 과학이 발달하는 동안, 서구 사회가 식민지들을 끔찍하게 수탈했기 때문에,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두 가지가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SF 독자가 이것을 지적하나요? SF 독자가 이것을 필연적으로 지적하나요? 기후 정의는 부유한 북반구를 비판하고 가난한 남반구를 동정합니다. 왜 북반구가 부유하고, 왜 남반구가 가난한가요? 북반구(서구 제국주의)가 남반구(식민지)를 수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드 SF 독자가 서구 제국주의를 필연적으로 비판하나요? 엄중한 우주 개척 소설이 서구 제국주의 범죄를 필연적으로 비판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에서 생태학자가 생물 다양성을 퍼뜨리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새로운 자연이 나타난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만약 개척 과학자들이 불모지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한다면, 불모지 행성은 살아있는 생명의 요람으로 바뀔 테고, 이건 새로운 자연이 나타난다는 뜻일 겁니다. 불모지 행성에서 사람들은 먹고 살지 못하나, 생명의 요람이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을 자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새로운 자연이 엄청난 해양 생물 자원들을 자랑한다면, 사람들은 물고기들과 해초들과 다른 여러 해양 자원들을 먹을 겁니다.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은 새로운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먹고 산다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먹고 살기는 가장 근본적입니다. 비단 인간만 아니라 생명체들에게 신진대사(물질대사)는 가장 근본적입니다. 신진대사는 생명체를 규정하기 위한 1단계 조건, 가장 기초적인 조건입니다. 실험 생물학자들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때, 그들은 실험 생명체가 신진대사를 거치는지 확인합니다.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이 새로운 자연과 신진대사를 묘사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가장 근본적인 것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은 아주 지성적입니다.



하지만 아주 지성적인 우주 개척 소설이 산업 자본주의를 필연적으로 비판하나요? 산업 자본주의 이후, 온실 가스 그래프가 계속 치솟았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산업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 원인이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을 관리하기 위해 인류 문명은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드 SF 소설이 이것을 필연적으로 주장하나요? SF 독자가 자본주의를 기후 변화 원인이라고 필연적으로 지적하나요? 아니, 어쩌면 우주 개척 소설은 산업 자본주의를 떠받들지 모릅니다. 우주 개척 소설은 행성급 환경 오염을 떠받들지 모릅니다.

 

아무리 우주 개척 소설이 새로운 자연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얄팍한 관점에서 우주 개척 소설은 생물 다양성 파괴를 바라볼지 모릅니다. 아무리 하드 SF 독자가 전문가 분위기, 엘리트 분위기에 빠진다고 해도, 어쩌면 하드 SF 독자는 서구 제국주의를 떠받들지 모릅니다. 하드 SF 독자는 끔찍한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할지 모릅니다. 이 상황에서 문자 그대로 지적 허영심은 그저 허영심에 불과합니다. 이게 그저 허영심에 불과하기 때문에, 만약 SF 독자가 우월론을 주장하고 아이돌 팬들을 비웃는다면, 이건 그저 오만방자한 과학 만능주의에 불과할 겁니다.



우주 개척 소설이 산업 자본주의를 떠받들고, 하드 SF 독자가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적인 사고 방식을 필연적으로 보장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SF 독자는 과학이 무엇인지 착각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사이언스에게 기반한다고 해도, SF 독자는 사이언스가 무엇인지 착각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서구 제국주의 속에서 SF 독자가 사이언스(과학)를 파악할 수 있나요? 이 관점에서 SF 우월론은 엉터리입니다. 하드 사이언스 픽션과 사이언스 판타지는 다르지 않고, 사이언스 픽션과 다른 예술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은 지성적인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이건 장르 전형일 수 있습니다. 지성적인 분위기에 심취하기 위해 SF 독자는 우주 개척 소설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지성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SF 팬은 이 장르를 좋아할 수 있고, 사이언스 픽션은 지성적인 문화를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지성적인 문화를 형성하기 원한다면, SF 소설들은 아주 커다란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개연성에 불과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지성적인 문화를 필연적으로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SF 우월론은 비약적인 주장입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야생 주술사를 묘사한다면, 만약 야생 주술사가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고, 야생 동물로 변신하고, 자연의 힘을 휘두르고, 지옥 악마들을 물리친다면, 이건 사이언스 픽션보다 판타지일 겁니다. 판타지 소설보다 SF 소설이 지성적이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야생 주술사보다 생태계 테라포밍이 우월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 SF 자부심에게는 근거가 있습니다. 야생 주술사(판타지)보다 생태계 테라포밍(SF)은 우월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생태계 테라포밍 소설이 하드 SF 소설이라면, 야생 주술사보다 생태계 테라포밍은 훨씬 지성적이고 우월할 겁니다.

하지만 비록 판타지 소설이 과학에게 기반하지 않는다고 해도, 판타지 소설은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 소설에서 야생 주술사는 서구 제국주의가 기후 변화 원인이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야생 주술사는 '지성적'입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전문 용어들을 늘어놓고 생태계 테라포밍을 묘사한다고 해도, 판타지 소설과 달리, 만약 SF 소설이 서구 제국주의를 간과한다면, 이 SF 소설이 지성적인가요? 이게 지성적인가요? 아니, 지성은 그저 어렵고 복잡한 전문 용어들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지성은 지배적인 관념을 비판해야 합니다. 



※ 게임 <케발 스페이스 프로그램 2>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954850/Kerbal_Space_Program_2/

※ 사진 <School of Fish in Body of Water> 출처: Francesco Ungaro,
https://www.pexels.com/photo/school-of-fish-in-body-of-water-380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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