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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아로낙스 박사, 내 전기는 세간에서 흔히 쓰이는 전기가 아니에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군요." 소설 에서 네모 선장은 아로낙스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로낙스는 어떻게 노틸러스가 움직이느냐고 물었고, 네모는 전기로 움직인다고 대답했죠. 하지만 그게 무슨 전기인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아로낙스 역시 더 이상 캐묻지 않아요. 게다가 노틸러스를 둘러보는 아로낙스는 계속 수수께끼들에 부딪히나, 그걸 일일이 풀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아로낙스는 네모에게 "성과에만 주목하고 굳이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로낙스가 아예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로낙스는 정말 중요한 사실들을 은근슬쩍 우회한다는 느낌을 풍깁니다. 왜 그랬을까..
소설 가 과연 SF 소설일까요. 아마 여러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의견들을 내놓을 겁니다. 어떤 독자는 이 소설이 미래를 상상했기 때문에 SF 소설이 될 수 있다고 말하겠죠. 어떤 독자는 이 소설이 자연 과학적 상상력을 별로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유토피아 문학일 뿐이라고 말할 거고요. 저는 가 SF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게 반드시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상상하는 만큼 SF 소설은 어느 정도 과학적 상상력을 꿈꿔야 합니다. 하지만 는 사회 구조만 줄창 떠들 뿐이고, 과학적 상상력을 예견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이나 , , 같은 작품들과 분명히 달라요. 저런 소설들처럼 미래의 사회 구조를 예상하나, 과학적 상상력은 꽤나 부족하죠. 저는 사회학적 상상력만 발휘해도 SF 소설이 ..
인간은 꽤나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과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들을 분류할 때, 유전자 개념을 이용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두 눈만으로 동물들을 분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종종 아리스토텔레스는 난관에 부딪혔어요. 서로 비슷하게 생긴 동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고기와 돌고래를 분류하기 위해 꽤나 고심했습니다. 허먼 멜빌이 '고래는 분수공으로 숨을 쉬는 물고기'라고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돌고래와 물고기가 똑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쪽 모두 바다에 살고, 지느러미들이 있고, 몸매가 유선형이죠. 그래서 다들 돌고래와 물고기가 똑같은 종류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물고기에게 아가미가 있고 돌고래에게 분수공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은 돌고래를 물고기..
[게임 는 근사한 탐험이나, 여기에는 외계 생태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부족해요.] 와 와 는 모두 똑같은 SF 창작물입니다. 인류가 우주로 나가고, 다른 생명체들과 마주치고, 서로 싸우거나 교류하는 이야기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이나 주제는 전혀 다르지만, 세 창작물들 모두 전형적인 사이언스 픽션들이죠. 사실 세부적인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매체일 겁니다. 각각 매체가 다릅니다. 는 소설이고, 는 영화이고, 는 비디오 게임이죠. 그리고 매체가 다르면, 해당 창작물의 특성 역시 달라지곤 합니다. 저 세 창작물들은 모두 똑같은 사이언스 픽션이지만, 과학적 상상력을 이용하는 방법은 서로 다릅니다. 저는 SF 소설과 SF 영화와 SF 비디오 게임이 모두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 소설이 제일 사이언스 ..
[영화 의 한 장면. 이런 SF는 엄격할 것 같으나, 결국 이것 역시 상상의 영역입니다.] 어쩐지 하드 SF 소설들은 굉장히 엄중할 것 같은 느낌을 풍깁니다. 흔히 사람들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우주 활극에 지나지 않는다고 조롱하지만, 반대로 하드 사이언스 픽션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죠. 분명히 하드 SF 소설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빛내는 정수를 담았습니다. 만약 독자가 가장 순수한 사이언스 픽션을 만나고 싶다면, 하드 SF 소설이 해답일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드 SF 소설에 환상적인 요소가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드 SF 소설은 엄중한 고증을 자랑하는 것만큼 수많은 환상적인 요소들에 기댑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만큼 신화와 전설이 점유하는 영역까지 날아가지 않으나, 종종 하드 사이언스 픽션은 진..
[게임 에서 함대와 싸우는 우주 드래곤! 이런 설정 역시 중세 판타지에서 비롯했겠죠.] 예전에 어떤 인터넷 평론을 읽었습니다. 그 평론은 판타지 소설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나열하더군요. 초기 소설부터 전성기 소설을 거치고 던전 크롤링 게임을 설명하고 21세기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기념비적인 판타지 작품들이 줄줄이 등장했습니다. 각종 신화를 제외하고, , , 등은 초기 판타지입니다. (는 초기 SF 소설로 불리기도 하죠.) 3부작이나 시리즈는 현대 서사 판타지를 구축한 장본인이고요. 3부작 역시 빼놓지 못하겠죠. 그 평론은 소설 위주로 이야기했으나, 게임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게임 자체의 영향력도 어마어마하고, 시리즈나 시리즈 같은 걸출한 소설들도 있고요. 는 전형적인 서사 판타지가 아니지만, 21세기 판..
[이런 삽화가 있다면, 독자들은 생체 고래 비행선의 모습과 크기를 훨씬 쉽게 가늠할 수 있겠죠.] 스콧 웨스터펠드는 어느 강연에서 소설 삽화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왜 자신이 같은 소설에서 삽화를 집어넣었는지, 왜 키스 톰슨 같은 삽화가를 섭외했는지 이야기했죠. 저는 그 강연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웨스터펠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충 저런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웨스터펠드가 강연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든 , , 의 삽화는 정말 웅장하고 기괴하고 멋집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베헤모스와 SMS 괴벤의 싸움 장면입니다. 소설 속에서 베헤모스는 자연적인 괴수가 아니라 인류의 생체 병기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인류가 그토록 거대한 바다 동물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
여기 블로그 상단에는 'SF/생태/사회주의'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사실 저는 사이언스 픽션을 잘 모릅니다. 게다가 사이언스 픽션을 많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SF'라는 명칭을 빼고 싶었지만, 여기에서 SF 이야기를 어느 정도 하기 때문에 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종종 이렇게 자문하곤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SF 팬들 중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을 겁니다. 저는 그런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유형은 SF 소설들을 모두 섭렵합니다. 첫째 유형은 그야말로 골수 SF 독자이고, 고전 소설과 최신 소설과 하드한 소설과 뉴 위어드 소설과 해외 소설과 국내 소설을 모두 챙겨봅니다. 둘째 유형은 SF 소설들을 읽고 그 경이감에 감동을 받지만, SF 소설만큼 ..
종종 같은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사상 철학 서적이라는 푸념을 받습니다. 사실 이런 소설들은 극적인 전개나 줄거리보다 특정한 사상을 길게 풀어놓는 것에 주목하죠. 같은 소설도 겉보기에는 해양 모험물이지만, 그 알맹이는 사상 철학 서적에 가깝습니다. 주인공 선원이 고래 머리를 보며 칸트를 운운하는 장면은 거의 뭐…. 따지고 보면, 윌리엄 모리스의 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우리말 번역자 박홍규 교수는 아예 사회주의 철학 설명까지 달아놨습니다. 사실 박홍규 교수가 이 소설을 번역한 이유는 그저 소설을 출판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을 널리 퍼뜨리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윌리엄 모리스 본인도 딱히 소설을 쓰고 싶다거나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을 겁니다. 윌리엄 ..
중세 판타지는 판타지 장르의 하위 분류이고, 상당한 인기를 자랑합니다. 종종 검마 판타지, 서사 판타지, 하이 판타지와 함께 동의어로 쓰이죠. 중세 판타지가 무조건 하이 판타지나 검마 판타지라고 할 수 없으나, 이 하위 장르들의 관계는 결코 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가깝고, 때때로 하나의 창작물을 동시에 중세 판타지, 검마 판타지, 하이 판타지 등으로 분류할 수 있어요. 으로 대표되는 작품들이 그러하고, 같은 게임 덕분에 중세 검마 서사 하이 판타지(…)는 판타지의 대표자로 자리 매김합니다. 아마 사람들이 '판타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13~16세기 유럽 무대를 금방 떠올릴 겁니다. 때때로 판타지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들은 이런 중세 판타지를 화려하고 웅장하거나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