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에서 삽화의 역할 본문
[이런 삽화가 있다면, 독자들은 생체 고래 비행선의 모습과 크기를 훨씬 쉽게 가늠할 수 있겠죠.]
스콧 웨스터펠드는 어느 강연에서 소설 삽화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왜 자신이 <베헤모스> 같은 소설에서 삽화를 집어넣었는지, 왜 키스 톰슨 같은 삽화가를 섭외했는지 이야기했죠. 저는 그 강연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웨스터펠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충 저런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웨스터펠드가 강연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든 <레비아탄>, <베헤모스>, <골리앗>의 삽화는 정말 웅장하고 기괴하고 멋집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베헤모스와 SMS 괴벤의 싸움 장면입니다. 소설 속에서 베헤모스는 자연적인 괴수가 아니라 인류의 생체 병기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인류가 그토록 거대한 바다 동물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공적인 생명체라고 해도 베헤모스는 바다 괴수의 기괴한 이미지를 충분히 내뿜습니다. 베헤모스의 전체 모습을 그린 그림 역시 좋습니다. 심해어와 두족류를 합친 모습이죠. 게다가 그 거대한 몸집과 지느러미와 색감은…. 소설 속의 또 다른 바다 괴수 크라켄이 초라해지는군요.
저는 <베헤모스>를 읽지 않았으나, 저런 삽화들을 볼 때마다 <베헤모스>가 어떤 소설일지 상상하곤 합니다. 어쩌면 제 상상이 맞거나 틀릴 수 있죠. 삽화를 보고 소설 내용을 상상하는 것은 소설을 직접 읽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삽화가 있는 소설을 읽는 것과 삽화가 없는 소설을 읽는 것 역시 전혀 다를 겁니다. 삽화의 유무에 따라 독자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겠죠. 만약 키스 톰슨이 소설에 이런 삽화를 넣지 않았다면, 소설을 모두 읽은 독자의 소감 또한 달랐을 겁니다. <베헤모스>는 여전히 재미있는 소설이겠으나, 뭔가 기괴한 느낌은 줄어들었을 듯합니다.
한편으로 이런 삽화는 독자의 상상력을 고정시킬 수 있습니다. 독자의 상상력이 삽화에 한정될 수 있어요. 이건 장점이자 단점일 겁니다. <베헤모스>처럼 뛰어난 삽화는 소설의 분위기를 한층 배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삽화를 공식적인 설정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삽화 덕분에 독자가 엉뚱한 상상으로 빠지지 않는다면, 그건 장점이겠으나, 자유로운 상상력까지 막힐 수 있어요.
가령,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다곤>을 썼습니다. 러브크래프트는 다곤이 어떻게 생겼다고 대략적으로 설명했으나, 삽화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곤의 다양한 모습을 상상합니다. 다양한 독자들이 다양한 다곤을 상상합니다. 하나의 글에서 수많은 상상력이 튀어나옵니다. 만약 러브크래프트가 다곤의 모습을 직접 그렸다면, 독자들은 자유롭게 상상하는 대신 그 그림을 머릿속에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리고 다곤의 모습을 상상하는 재미 역시 떨어졌겠죠.
물론 일부 독자들은 공식적인 삽화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상상력을 펼칩니다. 삽화가 있다고 해서 모든 독자가 그 삽화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삽화를 무시하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독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삽화가 있다면, 독자가 그 이미지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그림은 글보다 훨씬 강렬합니다. 때때로 한 장의 그림은 백 마디의 말보다 인상적입니다. 글은 추상적이지만 그림은 직접적입니다. 이건 비단 SF 소설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SF 소설은 비일상적인 요소를 묘사하기 때문에 삽화의 비중이 훨씬 클 겁니다. 시드니 파젯은 셜록 홈즈를 그린 삽화가로 유명합니다. 파젯 덕분에 셜록 홈즈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만약 시드니 파젯이 셜록 홈즈를 그리지 않았다고 해도 독자들은 얼마든지 홈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셜록 홈즈는 보통 사람이죠. 파젯은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를 창조했을 뿐이고,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명체를 창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헤모스는 바다 괴수이고, 이런 바다 괴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베헤모스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상상의 날개를 훨씬 넓게 펼쳐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고려한다면, SF 소설에서 삽화의 비중은 다른 소설보다 크겠죠. 검마 판타지 소설 역시 SF 소설과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검마 판타지 소설은 신화에 의존할 수 있고, 그래서 독자는 드래곤이나 그리폰을 쉽게 상상할 수 있으나, SF 소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 저는 모든 SF 소설들에 삽화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아마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겠죠. 저는 <블라인드 사이트> 같은 소설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삽화가 있었으면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삽화가 독자의 상상력을 고정할 위험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