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상상 과학과 그것을 둘러싼 관념의 변화 본문
마이클 크라이튼은 바람직하지 않은 SF 작가로 불리곤 합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분명히 유명한 SF 작가이나, 어떤 사람들은 크라이튼이 SF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죠. 우선 마이클 크라이튼은 상상 과학보다 스릴러에 흥미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크라이튼이 쓴 유명한 SF 소설들은 대부분 스릴이나 액션을 강조합니다. <델로스>, <쥬라기 공원>, <떠오르는 태양>, <타임라인>, <스피어>, <콩고>, <먹이>, (악명이 높은) <공포의 제국> 등등. 이런 소설들은 스릴이나 액션을 부각하죠. 크라이튼은 <별의 계승자>나 <솔라리스>나 <프로스트와 베타> 같은 차분하고 정적인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아요.
페이지들이 휙휙 넘어가는 필력은 확실히 발군이나, 과학자들이 차분하게 토의하는 내용은 어쩐지 크라이튼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쓸 수 있는 필력이 있다고 해도 일부러 안 쓰는 듯해요. 게다가 누군가는 크라이튼이 SF 특유의 전복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아마 테드 창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SF 소설은 세계를 크게 뒤집어야 하나, 크라이튼은 언제나 이 세계가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뭔가 무시무시한 암시들은 숱합니다. 하지만 공포 분위기만 조성할 뿐이고, 세계가 뒤집어지거나 인류 문명이 무너지거나 새로운 종족이 지배하는 내용은 크라이튼 소설들에 없죠.
마이클 크라이튼이 형편없는 작가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공포의 제국>이 엄청난 헛소리라고 생각하나, <쥬라기 공원>이나 <먹이>, <콩고> 같은 소설들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SF 작가가 아니라고 해도 그게 크라이튼의 명성에 해가 되지 않겠죠. 정말 중요한 것은 작가가 SF 소설을 쓰는지가 아니겠죠. 재미있는 소설을 쓴다면 (그게 SF 소설이든 탐정 소설이든 공포 소설이든) 그 소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크라이튼이 바람직한 SF 소설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 속에서 나름대로 상상 과학과 그걸 둘러싼 관념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가령, 유명한 <쥬라기 공원>에서 복제 공룡들을 봤을 때, 숱한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반응들을 선보입니다. 누군가는 떼돈을 벌겠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오만한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분별이 없다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공룡 그 자체에 감탄하죠. 이런 반응들은 다양한 토론들과 고민들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관념들을 주장하고, 비일상적인 현상에 부딪혔을 때, 그런 관념들을 충격적으로 변합니다. 독자는 <쥬라기 공원>에서 그런 관념들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요.
물론 마이클 크라이튼은 그런 관념들을 깊게 파고들지 않습니다. 다른 작가들과 비교한다면, 예를 들어, 고전적이라고 해도 메리 셸리나 허버트 웰즈는 생체 실험을 이용해 영혼을 자극하고 울리는 글을 썼습니다. 크라이튼은 그런 수준으로 파고들지 않아요. 온갖 지식들을 나열하고 액션을 펼치느라 바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깊이가 얕다고 해도 복제 공룡을 둘러싼 관념들은 소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쉽게도 실사 영화는 그런 부분을 휙 날려버렸습니다. 솔직히 2시간짜리 영화는 그런 길고 복잡한 사변들을 일일이 보여줄 방법이 없겠죠.
게다가 보여주고 싶다고 해도 영화는 영상물입니다. 사변은 추상적인 영역이고, 영상물은 추상적인 영역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지 못해요. 그래서 실사 영화는 복제 공룡을 둘러싼 관념들을 날려버리고 대신 시각 효과들을 채웠습니다. 비디오 게임은 훨씬 더합니다.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는 게임 플레이어가 직접 공룡 사파리를 만드는 건설 경영 게임입니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복제 공룡을 둘러싼 관념들이나 서로 다른 관념들의 충돌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건물들을 짓고 공룡들을 구경합니다. 그게 <오퍼레이션 제네시스>가 드러내는 제일 핵심적인 가치입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죠. 왜 사람들은 SF 소설을 읽을까요. 아마 각자 이유가 다를 겁니다. 저는 사람들의 관념이 충격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상상 과학은 관념을 바꿀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주 어마어마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토대가 상부 구조를 바꾼다면, 상상 과학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관념을 엄청나게 뒤집을 수 있습니다. 시간 여행자가 미래에서 멸망한 자연 환경을 보거나, 우주 탐사대가 희한한 외계 생명체들을 만나거나, 남자 승무원들이 여자들만 사는 행성에 도착하거나…. 그럴 때마다 관념들은 한없이 바뀝니다.
저는 그런 과정에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진다'는 문구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쥬라기 공원>이 얄팍한 테크노 스릴러라고 해도 이 소설은 그런 관념들이 변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솔라리스> 같은 수작 SF 소설들은 훨씬 더하죠. 그렇다면 SF 영화나 SF 게임은 그럴 수 있을까요. 흠, 저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SF 영화나 SF 게임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조적으로 SF 영화와 SF 게임이 관념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런 관념 묘사보다 시각 효과나 특수 음향이나 웅장하고 신비한 배경 음악이나 배우의 연기를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많은 이견들이 있겠으나, 그것 역시 사이언스 픽션을 즐기는 방법이겠죠.
저는 시각 효과나 배경 음악이나 메소드 연기를 즐기는 취향을 존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가치는…. 저런 관념들의 변화가 아닐까요. 그런 묘사는 우리 인류라는 존재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표현하죠. 사실 이는 SF 소설만 아니라 철학 분야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들 중 하나죠. 어떻게 인간을 규정하는가? SF 소설은 상상 과학을 이용해 관념이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거기에 대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