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은 무엇에 주목할 수 있는가 본문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수많은 호평을 받은 작품입니다. 비록 개봉 당시 불운한 시기를 거쳤다고 해도 결국 <블레이드 러너>는 빛나는 SF 금자탑에 올라갔죠. 예전에 감독판 기념회였나, 박상준 평론가가 "명작 SF 영화들이 많다고 해도 이 영화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대단하다."고 말한 기억이 나는군요. 아마 그 평가에 토를 다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비단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는 관객만 아니라 장르 영화에 흥미가 없는 관객들 역시 이 영화를 호의적으로 평가하죠. 좋은 장르 창작물은 장르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솔직히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들>이나 <멋진 신세계>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죠. <블레이드 러너>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놀라운 장면들을 찬탄합니다. 반젤리스가 작곡한 우울하고 미래적인 음악이 울려퍼질 때, 타이렐 회사 건물이 웅장하게 드러날 때, 거대한 광고판이 기모노 입은 일본 여자를 비출 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어두운 거리를 걸을 때, 데커드가 네온 사인들이 화려한 번화가를 달릴 때….
그럴 때마다 관객들은 탄성을 발합니다. 그런 장면들은 <블레이드 러너>를 상징하는 요소들입니다. 아마 그런 장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블레이드 러너>를 수작 SF 영화라고 평가하지 않았겠죠. 만약 시각 효과들을 구현하지 않았다면, 반젤리스가 신디사이저를 울리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블레이드 러너>에 별로 감탄하지 않았겠죠. 만약 <블레이드 러너>가 연극이었다면? <블레이드 러너>가 고등학생들이 공연하는 연극 수준이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관객들이 그 연극에 감탄했을까요? 아무리 그 연극이 인조인간을 둘러싼 관념들을 깊게 파고든다고 해도 관객들이 감탄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뭐라고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를 평가하는 여러 평론들에서 다들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장면들을 칭찬합니다. 대부분 그런 찬사를 빼놓지 않습니다. 만약 <블레이드 러너>가 그런 장면들이나 시각 효과를 선보이지 않았다면, <블레이드 러너>는 금자탑에 오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필립 딕이 쓴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는 그런 장면들을 묘사하는 소설이 아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원작 소설에 실망합니다. 소설에는 인상적인 시각 효과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가 선보이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비단 이 소설만 아니라 각종 SF 소설들이 선보이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게 상상 과학과 거기에 반응하는 관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그 두 가지를 이용해 세상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파악할 때, 우리 인간은 크게 두 가지에 주목합니다. 물질과 관념입니다. 그래서 흔히 유물론과 관념론은 대립하곤 합니다. 유물론과 관념론이 무조건 대립적인 관계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만큼 물질과 관념이 두 가지 축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여러 감각들을 이용해 물리적인 실체들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실체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때마다, 우리는 어떤 관념들을 형성합니다. 평생 사막에서 사는 사람은 익사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익사를 이해하는 이유는 물이 풍부한 세계에서 살고 물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물리적인 실체들이 바뀔 때, 사람들은 관념을 바꿉니다. 상상 과학은 물리적인 실체를 바꾸고, 어떻게 사람들이 관념을 바꾸는지 실험합니다. 그렇게 SF 소설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SF 영화들이나 SF 게임들은 그런 부분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비단 평범한 SF 영화만 아니라 <블레이드 러너> 같은 SF 영화에서조차 관념의 변화보다 시각 효과가 우선합니다. 영화는 종합 영상물이고, 사변이나 철학만 아니라 시각 효과, 배경 음악, 배우 연기 등등 종합적인 것들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맨 프롬 어스>처럼 사변적인 부분에 주목하는 SF 영화들 역시 존재하나, 구조적으로 영화는 사변적인 부분에만 주력하지 않아요. 아니, <맨 프롬 어스> 같은 영화도 등장인물의 사변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지 못하죠. 구조적으로 그건 불가능합니다.
소설은 그런 것을 묘사할 수 있는 매체이나, 비단 SF 영화나 SF 게임만 아니라 흥미 위주의 SF 소설들 역시 사변적인 부분을 안드로메다 너머로 날려버립니다. 여러 우주 활극들이나 괴수물들은 전쟁을 터뜨리고 괴수를 내보내고 사람들을 학살하느라 바쁩니다. 그래서 우주 전쟁이나 거대 괴수를 둘러싼 관념들을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거대 괴수를 바라보는 관념? 왜 그걸 이야기해야 합니까? 그걸 이야기할 시간이 있다면, 창작가는 거대 괴수가 사람들을 찢어발기는 장면을 하나 더 묘사할 겁니다. 아니면 진부한 관념들을 대충 늘어놓고 괴수가 학살하는 장면들에 공을 들이겠죠. 괴수는 거대하나, 괴수를 바라보는 관념은 그렇게 거대하게 바뀌지 않습니다.
흥미 위주의 창작가들은 관념의 변화가 아니라 자극과 흥분과 액션을 노립니다. 그런 창작가들은 괴수를 바라보는 시각을 조명하지 않고, 괴수가 사람들의 머리통을 덥썩덥썩 물어뜯는 장면들만 나열할 겁니다. 저는 그런 흥미 위주의 소설들 역시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작가가 거창한 설정을 짰다면, 그만큼 관념을 거창하게 바꿔야 할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저 설정만 거대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SF 창작 사이트에서 거대한 설정들을 구경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대한 설정을 따라가는 관념의 변화나 사회 구조적인 변화를 구경하기는 어렵습니다. 거대 괴수 이야기를 읽을 때, 저는 어떻게 사람들이 거대 괴수를 바라보는지 읽고 싶습니다. 그게 SF 소설이 선사하는 진짜 재미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