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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SF 소설과 그림과 상상력

OneTiger 2018. 2. 21. 19:13

[게임 <에이븐 콜로니>의 한 장면. 개척 도시와 외계 식생은 멋지나, 이런 그림에는 사유가 없습니다.]



저는 인터넷 창작 사이트들에서 SF 그림들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데비앙아트 같은 사이트는 화려하고 아름답고 장대하고 멋진 SF 그림들을 끝없이 보여줍니다. 하루 종일 구경해도 끝이 없을 것 같아요. 찬란한 미래 도시, 웅장한 궤도 승강장, 각종 로봇들이나 사이보그들, 거대한 우주 함선들과 보행 병기들, 빛나는 성운, 희한한 외계 종족들과 이질적인 자연 생태계. 이런 그림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는다면, SF 소설을 읽을 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겁니다. 텍스트만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을 읽을 때, 저는 이런 그림들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텍스트보다 그림이 훨씬 이해하기가 쉽고, SF 독자는 저런 SF 그림들을 보조적인 도구로 삼을 수 있겠죠. 그림에 의지하는 독서가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림 없이 스스로 상상하고 읽을 수 있다면, 그게 진짜 SF 독서일 겁니다. 하지만 수많은 작가들은 자세한 묘사 없이 우주선이나 거대 건축물을 이야기하고, 독자는 그런 부분에서 막힐지 모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런 부분에서 진도를 못 나갑니다. 그럴 때 SF 그림은 좋은 도우미가 됩니다. 이게 올바른 독서 방법이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요.



하지만 창작 사이트들에서 SF 그림들을 구경할 때마다, 저는 아쉬움을 많이 느낍니다. SF 그림들은 멋집니다. 첨단 미래 도시나 반짝거리는 우주선이나 초거대 건축물은 정말 멋지죠. 이질적인 자연 생태계 역시 그렇고요. 하지만 그런 그림들 속에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저 한 순간이 존재할 뿐입니다. 가령, 사이버펑크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멋진 미래 도시 그림이 있다고 가정하죠. 그런 그림은 도시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도시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뭐라고 말할까요. 그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행동할까요.


SF 그림은 그런 것을 말하지 않아요. 그저 미래 도시라는 한 순간을 포착할 뿐이죠.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도시는 분명히 저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자연 환경을 오염시킬 겁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처럼 살아있는 야생 동물이 없어졌을지 모르죠. <우주 상인>처럼 목재가 희귀 자원이 되었을지 모르죠. 당연히 디스토피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환경 운동가들은 열심히 투쟁할 겁니다. 하지만 <우주 상인> 같은 소설과 달리 SF 그림은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그저 한 순간을 포착하기 때문에.



이는 텍스트와 그림의 차이일 겁니다. 텍스트는 추상적인 과정을 자세하고 길게 풀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텍스트를 읽고 상상하는 것은 다소 어렵습니다. 게다가 SF 소설이 비일상적인 상황을 묘사하기 때문에 SF 독자는 한층 더 치열하게 상상해야 합니다. 반면, 그림을 볼 때,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그림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화가가 상황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림은 많은 것들을 순간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림이 완전히 가시적인 매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림 역시 상상력을 불러올 수 있고, (종종 의도적으로) 여러 가지를 감춥니다.


하지만 텍스트에 비해 그림은 훨씬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압도적으로 쉽죠. 대신 그림은 추상적인 사고 방식들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합니다. 제가 첨단 미래 도시를 묘사한 그림을 본다고 해도, 작화가가 직접 설명이나 해설을 달지 않는다면, 저는 도시 시민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알지 못할 겁니다. 저는 그 도시가 무슨 문제들을 품었는지 모를 겁니다. 저는 그저 여러 사이버펑크 소설들에서 읽었던 문제들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죠. 그건 SF 그림이 드러내는 한계일 겁니다.



가끔 저는 SF 소설들이 삽화들을 갖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SF 소설들이 삽화들을 갖춘다면, 막연한 텍스트를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방법을 싫어할 겁니다. 독자의 상상력이 삽화에 갇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텍스트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서로 다른 상상력을 펼칠 수 있습니다. 만약 작화가가 삽화를 그린다면, 독자들의 상상력은 삽화를 넘어서지 못할 테고, 자유로운 상상력이 방해를 받을지 모르죠.


똑같이 <라마와의 랑데부>를 읽었다고 해도, 독자들은 서로 다른 라마 우주선을 상상할 겁니다. 인데버 우주선의 모습 역시 독자들의 상상력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아서 클라크는 인데버 우주선이 무슨 모습인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소설에 삽화들을 넣기 위해 SF 작가와 작화가가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 하겠죠. SF 소설에 삽화들을 집어넣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어요. 다행히 인터넷 창작 사이트에는 좋은 SF 그림들이 많고, 그것들을 구경하기는 쉽습니다. 독자 입장에서 SF 소설과 좋은 그림을 병행하기는 어렵지 않아요. 텍스트만 읽기가 막막하다면, 이런 창작 사이트에서 SF 독자는 금방 도움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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