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압도적인 영상 매체들과 추상적인 세계관 본문
[게임 <에이븐 콜로니>의 한 장면. 외계 생태계는 멋집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세계관이 없죠.]
영화 <어벤저스>나 <트랜스포머> 같은 요란한 블록버스터들을 볼 때마다, 종종 저는 19세기 SF 작가들을 떠올립니다. 메리 셸리나 쥘 베른, 허버트 웰즈는 자신들이 자연 과학적인 상상력을 소설에 불어넣는다고 여겼습니다. 메리 셸리에게는 자신이 본격적인 SF 작가라는 자각이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는 자신이 뭔가 상상 과학적인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했죠. 쥘 베른이나 허버트 웰즈에게는 자신이 사이언티픽 로망스를 쓴다는 확신이 있었고요. 비록 그때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용어는 없었으나, 두 작가는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분명히 자각했습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와 쥘 베른, 허버트 웰즈는 <어벤저스>나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가 사이언스 픽션을 대변할 거라고 절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사이언스 픽션은 하드 SF 소설이 아니라 저런 요란한 블록버스터들입니다. 비단 일반적인 관객들만 아니라 영화 언론들조차 사이언스 픽션을 화려한 시각 효과나 액션 블록버스터와 동일하게 여깁니다. 숱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공상 과학이 되고, 시각 효과가 되고, 액션 블록버스터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SF 소설을 읽지 않음에도 사이언스 픽션이 유치하다고 비웃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비난하나, SF 소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저 블록버스터 영화나 비디오 게임을 언급할 뿐입니다. 하지만 정말 사이언스 픽션을 논하고 싶다면, 우리는 SF 소설을 이야기해야 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에서 출발했어요. 어떤 평론가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토마스 모어나 조나단 스위프트에게서 출발했다고 말합니다. 근대 철학자들 역시 외계인 사회를 이야기했고, SF 소설은 거기에서 출발했을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무슨 소설에서 출발했든,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에서 뻗어나왔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 자랑하는 핵심을 간직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세상이 바뀌는 모습을 논리적으로 상상하고, 어떻게 사회 구조와 인간의 관념이 바뀔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저는 그게 사이언스 픽션이 중시하는 가치이고 정수이고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매체는 소설입니다. 철학이 그런 것처럼 소설이 추상적인 관념이나 연대기나 사상을 구체적으로 풀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SF 역시 바뀌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이어스 픽션은 변화를 이야기하는 장르입니다. 시대가 흐를수록 세상은 바뀌었고, 사회 구조와 인간의 관념 역시 바뀌었습니다. 시대가 바뀐다면, SF 역시 바뀔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사이언스 픽션은 더 이상 소설이라는 한계에 머물지 말아야 할지 모릅니다. 영상 기술은 엄청나게 발달했고, 온갖 영화들과 비디오 게임들은 압도적인 경외감을 선사합니다. 비단 <어벤저스>나 <트랜스포머> 같은 요란한 블록버스터들 이외에 정말 경외적인 영화들이나 게임들 역시 많습니다.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정말 외계 행성을 탐사하는 경외감에 젖을 수 있습니다. 증강 현실 장치가 도와준다면, 그런 경외감은 대폭 올라가겠죠. 아마 미래에는 지금보다 훨씬 놀라운 영화들이나 게임들이 많이 등장할 겁니다. 따라서 사이언스 픽션 역시 소설에서 벗어나고 압도적인 영상 매체로 옮겨야 할지 모릅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계속 골동품 같은 소설에 매달려야 할까요. 저렇게 멋진 영상 매체가 존재함에도 왜 사이언스 픽션이 소설이 되어야 할까요. 생생한 시각 효과로 외계 행성을 탐험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우주를 돌아보는 경외감을 느낄지 모릅니다. SF 소설은 그런 생생한 체험을 절대 전달하지 못할 겁니다. 따라서 사이언스 픽션은 영상 매체로 옮겨야 할 겁니다.
저는 그런 영상 매체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영상 매체들을 체험할 때마다, 저 역시 압도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그런 것들은 정말 매력적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런 영상 매체들이 압도적이라고 해도, 결국 그것들은 추상적인 관념이나 사상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런 관념이나 사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이 계속 소설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 관념이나 사상이 중요할까요? 왜 작가들이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표현해야 할까요? 저는 관념이 인간의 행동을 규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 세계관이 있고, 세계관에 따라 사람들은 말하고 움직이고 느낍니다. 어떻게 그런 세계관이 형성될까요. 세상이 바뀐다면, 그런 세계관 역시 획기적으로 바뀔 테고, 사람들 역시 엄청나게 바뀔 겁니다. 하지만 영상 매체들은 그런 세계관을 깊게 묘사하거나 분석하지 못합니다. 세계관은 추상적인 영역이고, 영상 매체들은 추상적인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죠. 영상 매체들은 어마어마한 우주나 외계 행성을 보여줄 수 있으나, 사람들의 속내로 들어가지 못해요. 하지만 소설은 그럴 수 있고, 따라서 사이언스 픽션은 계속 소설에 머물러야 할 겁니다.
저는 사이언스 픽션이 그저 놀라운 외계 행성을 보여주는 장르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런 놀라운 영상 매체들을 좋아하나, 사이언스 픽션은 거기에서 더 멀리 나가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경외적인 우주 속에서 인간을 규정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