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스타십 트루퍼스>의 1인칭 시점과 일장 연설 본문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와 동명 실사 영화는 서로 많은 차이점들을 드러냅니다. 실사 영화는 강화복을 빼먹었고, 네오독을 빼먹었고, 갈비씨 외계인들을 빼먹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차이점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에는 일장 연설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시민이 자발적으로 군대에 들어가야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원작 소설은 온갖 설교들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고등학교 선생, 훈련소 조교, 선배 장교, 지휘계통 장성까지 줄줄이 설교들을 늘어놓습니다. 저는 그런 설교들이 강화복이나 네오독이나 갈비씨 외계인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설교들은 소설 주제를 뒷받침합니다. 다른 SF 밀리터리들 역시 강화복 같은 장비를 써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런 설교들은 다른 SF 밀리터리들과 <스타십 트루퍼스>를 가르는 기준입니다. <영원한 전쟁> 역시 파이팅 슈트라는 강화복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영원과 전쟁>과 <스타십 트루퍼스>는 사상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조 홀드먼이 뭐라고 생각하든) <영원한 전쟁>은 자본주의 경제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실사 영화는 저런 설교들을 빼먹었을까요. 너무 노골적으로 보수 우익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마 그런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 역시 있겠죠. 소설은 설교들을 떠들기에 좋은 매체입니다. 소설은 텍스트입니다. 반면, 영화는 영상 매체입니다. 영상 매체는 시각적인 측면에 집중해야 합니다. 설교는 시각적인 영역이 아닙니다. 설교는 추상적인 영역이고, 그래서 영상 매체는 설교들을 담지 못합니다. 영화가 설교 장면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설교 장면을 감동적으로 연출하는 영화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소설과 달리, 기나긴 시간 동안 영화는 설교들을 풀어내지 못합니다. 시각적인 측면보다 추상적인 측면이 길어진다면, 영화는 균형을 잃습니다. 그건 영상 매체라는 태생적인 한계입니다. 텍스트 매체와 영상 매체는 서로 다르고, 서로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강화복 병사가 화끈하는 싸우는 장면은 소설보다 영화에 더 어울릴 겁니다. 영상 매체이기 때문에 영화는 화끈한 강화복 전투를 훨씬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 설파는 영화보다 소설에 더 어울릴 겁니다. 소설은 이데올로기라는 추상적인 영역을 차근차근 풀어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는 1인칭 시점이 아닙니다. 소설 <스타십 트루퍼스>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고, 소설은 주인공의 관념과 심리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반면,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는 주인공의 관념과 심리를 파고들지 못합니다. 영상 매체이기 때문에 영화는 그저 주인공의 표정이나 몸짓이나 행동을 보여줄 뿐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실 이는 비단 <스타십 트루퍼스>에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1인칭 소설들은 많고 많습니다.
하지만 1인칭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드뭅니다. <클로버필드>처럼 1인칭 시점 영화들은 실험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1인칭 시점 영화들은 평범하지 않고 실험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시점이 추상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영화는 서툴게 시점을 조절합니다. 소설은 얼마든지 추상적인 시점을 조절할 수 있으나, 영화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영화가 1인칭 시점을 모방하고 싶다면, 엄청난 독백들이나 자막들을 동원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막들을 동원해도, 그것조차 그저 편법에 불과합니다. 반면, 소설은 자유롭게 사람들의 심리와 관념을 들락거릴 수 있어요.
이는 SF 영화에게 치명적일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 기술이 바뀔 때, 어떻게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는지 조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직접 관념을 전달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저 간접적으로 관념이나 생각을 비출 뿐입니다. 반면, 소설은 훨씬 수월하게 그런 것들을 파헤칠 수 있죠. 꾸준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SF 소설이 SF 영화보다 낫다는 뜻은 아닙니다. SF 영화는 현란하고 웅장한 볼거리를 선사할 수 있습니다. <오블리비언> 같은 영상미는 정말 멋집니다. 영화가 시시하다고 해도, 영상미는 정말 놀랍고, 관객은 충분히 두 눈을 호강시킬 수 있을 겁니다.
저는 SF 소설과 SF 영화가 각자 다른 장점을 추구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는 SF 그림,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테이블 게임 및 비디오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SF 소설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는 SF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게임을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이 세상에 오직 SF 소설들만 존재하고, 다른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게임이 모두 사라진다면…. 음, 세상이 꽤나 삭막하게 보일지 모르겠어요. 저는 SF 영화나 SF 비디오 게임이 보여주는 시각 효과를 좋아합니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