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이 시각적이지 않다고 해도… 본문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입니다. 저는 수많은 신화들, 민담들, 소설들이 그걸 증명한다고 생각해요. 시각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입니다. 그래서 신화 속의 오딘은 지혜를 구하기 위해 눈동자를 내놨을 겁니다. 예수는 소경을 치유했고, 이는 꽤나 유명한 기적입니다. 허버트 웰즈는 장님들이 사는 나라를 상상했고, 존 윈덤은 아예 대재난이 장님들을 양산한다고 상상했습니다. 존 발리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든다고 가정했어요. 주제 사라마구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킨다고 썼고요.
남한에서는 심청이 이야기가 가장 유명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두 눈을 위해 심청이는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 했죠. 행복한 결말에서 심봉사는 신분 상승한 딸을 만나고, 마침내 두 눈을 뜹니다. 현자들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앞을 못 본다고 비유하죠. 이런 신화들, 민담들, 소설들은 시각이 정말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은 소설에게 아주 치명적일 겁니다. 소설은 텍스트 매체이고, 시각적인 매체가 아닙니다. 시각적인 동물은 텍스트 매체보다 다른 시각적인 매체를 흥미롭게 생각하겠죠.
그래서 만화나 영화나 게임은 소설보다 친숙할 겁니다. 글을 몰라도, 사람들은 만화나 영화나 게임을 대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매체들은 그림들을 보여주고, 사람들은 두 눈으로 그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을 모른다면, 사람들은 소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소설에는 그림이 없습니다. 설사 삽화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림은 부차적인 요소입니다. 대부분 숱한 소설들에는 삽화가 없고, 독자는 작가가 묘사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상상해야 합니다. 작가는 상황을 제시하고, 독자는 그걸 머릿속에 그려야 합니다.
독자는 화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림이 없기 때문에 독자는 마음의 두 눈으로 그림을 봐야 합니다. 이는 꽤나 귀찮은 작업이고, 그래서 소설은 상대적으로 귀찮은 매체입니다. 왜 이런 귀찮은 매체를 읽어야 합니까? 이 세상에는 화려하고 멋진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이 많습니다. 특히, 최신 비디오 게임들은 만화나 영화가 따라가지 못하는 아찔한 동영상들을 선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태여 소설을 읽을 이유가 있을까요? 소설 따위는 사라지고, 만화나 영화나 게임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논리를 SF 소설에 적용할 수 있겠죠. 왜 독자들이 SF 소설을 읽어야 할까요? 온갖 SF 전략 게임들은 웅장한 우주와 멋진 우주 함선들을 보여줍니다. 대작 4X 게임들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화려한 우주 함대 전투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외계 함선들은 요란하게 포탄을 날리거나, 어뢰를 쏘거나, 방어막을 전개하거나, 레이저를 뿜을 수 있어요. 이렇게 멋진 비디오 게임을 놔두고, SF 독자들이 소설을 읽어야 할까요? 소설을 읽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까요? 소설 따위를 멀리 던져버리고, 우주 4X 게임에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요?
팍팍하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구닥다리 소설을 읽어야 할까요? 비디오 게임은 20세기 매체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비디오 게임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 역시 소설을 썼습니다. 그렇게 소설은 오래된 매체이고, 그렇게 구닥다리 매체입니다. 구전을 포함한다면, 소설은 훨씬 오래된 매체가 될 겁니다. 왜 세련되고 첨단적인 21세기 문명인이 구닥다리 매체인 소설을 읽어야 합니까? 지금부터 다들 소설을 불태우고, 만화나 영화나 비디오 게임에 매달려야 할 겁니다. 21세기 문명인이 문화를 즐기는 진정한 방법은 그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SF 소설에 아무 가치가 없을까요? 정말 SF 소설은 낡고 귀찮은 구닥다리 매체일까요? 언뜻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선을 좀 더 돌린다면, SF 소설이 품은 귀중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블로그에서 꾸준히 이야기한 것처럼 SF 소설은 추상적인 관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인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소설은 가장 좋은 매체입니다. 만화나 영화나 비디오 게임이 추상적인 관념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해도, 소설보다 잘 표현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작가가 사상이나 철학이나 연대기나 이론을 전개하고 싶다면, 만화나 영화나 비디오 게임보다 소설을 선택해야 할 겁니다
게다가 SF 작가들은 반드시 그런 사상이나 연대기나 이론을 전개해야 합니다. 관념이나 사상, 연대기 없이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솔라리스>나 <블라인드사이트>나 <물에 잠긴 세계>나 <광기의 산맥>이 존재할 수 있나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우주 정거장에서 소설 주인공이 학문 사상(솔라리스 학파)을 논의하지 않았다면, <솔라리스>는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탐사 대원들이 생물학 이론을 전개하지 않았다면, 소설 주인공이 자신의 관념을 표현하지 못했다면, 남극 대원이 외계인의 벽화를 묘사하지 않았다면, <블라인드 사이트>와 <물에 잠긴 세계>와 <광기의 산맥>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요? 화려한 시각 효과? 웅장한 디지털 음악? 유닛 비용이나 건물 건설? 저는 우주와 이성을 바라보는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소설은 사상을 가장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매체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만화와 영화와 게임이 좋다고 해도, SF 소설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매체입니다.